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의 '인생화보'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씨의 기구한 인생역정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명곤(kim5459) 기자
얼마 전 모 언론사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자료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사실임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관리들의 전면적인 재등용, 반민특위법 제정의 무산 등 해방후 이승만 정권이 첫단추를 잘못 꿴 결과로 친일분자들은 호의호식하며 영화를 누린 반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해방된 지 58년이 지나도록 지지리도 못 배우고 못 먹고 살아온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조사의 결론이었다.
3·1절 85주년을 맞아 미주지역 곳곳에서도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플로리다 한 구석진 시골에서 가슴에 응어리를 품은 채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있다. 일제 강점하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아들 백도선(71)씨다.
백도선씨의 부친 백기환 지사는 1883년 평남 평양시 신흥리에서 백낙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낙흥은 갑오경장 당시 평양군 총사령으로 청국군 사령관 이진 장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워 패배하기는 했으나 그쪽에서는 모두 알아주던 신화적 인물.
아버지는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기독교 신자였던 백기환은 일찌기 평양 숭실학교 2학년을 수료하고 캐나다로 유학하여 대학에서 3년동안 건축학을 공부한 후 귀국해 함경도 일대에서 선교사 및 건축기술자로 일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건너가서 김좌진 장군이 교장으로 있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 백씨는 자신의 호를 따서 무장독립투쟁부대인 '진천부대'를 창설한다. 백기환은 진천부대를 이끌고 압록강 건너 초산 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등 일경들을 살해하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일대의 조선인들에게 아버지에 이어 또하나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 지역 일본 헌병들과 경찰들은 '진천부대 비장패'라 하면 무척 행동이 빠르고 전술이 뛰어나 오금을 펴지 못할 정도로 무서워 했다고 한다. 백씨는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신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등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백씨는 평양경찰서와 평남도청 폭파 계획을 세우다 일제 밀정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백기환 지사의 부인 강해숙씨 또한 비장패 두목의 아내 답게 독립정신이 투철했다. 재판이 벌어지던 날 강씨는 법정 앞마당에 있는 자갈 두 개를 치마폭에 몰래 싸가지고 들어간다. 그녀는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가 재판관이 백 지사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자 "조선 사람이 조선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고함을 치며 자갈을 던져 판사에게 상처를 입혀 법정 모독죄로 2년형을 받았다.
당시 11세이던 백도선의 '고난의 행군'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엄동설한에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된 백도선은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가 담가놓은 김치로 한달 반을 견디며 살았다. 일경의 감시가 심했던 터라 친척도 동네 사람도 백씨의 집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다행히 굶어죽기 직전에 어머니가 가석방되었다.
백도선은 소학교 4학년 때 4번이나 퇴학을 맞아야 했던 일화를 갖고 있다. 일본인 선생이 통신표에 부모 도장을 찍어 오라고 했는데, 성씨 개명을 하지 않은 데다 '백기환'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어서 가져간 덕분이었다. 백도선은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늘 집 주변을 경찰이 감시하는 속에 불안한 나날을 살아야 했다.
▲ '진천부대 비장패 두령' 백기환 지사의 유일한 후손 백도선(71) 씨가 3월 1일(미국시간) 오후 7시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벌어진 3·1절 기념행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2004 김명곤 감시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100리 떨어진 삼릉으로 이사해 살던 백도선이 해방을 맞은 것은 13세 때였다. 해방된 조국은 백도선 가족의 찌들린 삶에도 당장 '해방'을 안겨다 주었다. 북에 들어와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백도선의 아버지에게 '혁명가' 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건설상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고 했다.
대우는 황송할 만큼 융숭했다. 아침 저녁으로 승용차를 보내 혁명가 백기환을 출퇴근시켰다. 쌀은 물론 갖가지 먹을 것 입을 것과 집도 제공되었다. 어린 백도선은 어리 둥절하기만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쫓기던 생활만 해 오던 아버지가 요샛말로 '뜨는' 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버지는 '미국의 스파이' 라며 잡혀 갔다.
어느날 남쪽에서 김구 선생이 밀사를 보냈는데 그 밀사는 명주천에 김구 선생의 '어서 내려 오라' 는 밀서를 써 갖고 왔다. 기독교인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체질에 맞지 않았던 백기환은 즉시 명주천에 밀서를 써서 '가겠다' 며 내려 보냈다. 그런데 38선을 건너다 그 밀사가 그만 붙잡히고 만 것이다. 백기환은 즉시 체포돼 평양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김일성의 배려로 3개월만에 석방되었다.
별을 보며 남으로 향하다
풀려나서 조심스레 상황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백도선을 마당으로 불러 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너 저기 별 보이냐"고 물어보시더니 "내일 저 별만 보고 당장 이남으로 내려 가라"고 백도선에게 명령했다. 백도선의 나이 14세 때였다.
사고무친으로 서울에 온 백도선은 '피난민 고아'나 다름없었다. 백도선은 거리를 전전하다 빈민들이 모여 살던 왕십리에 단칸방을 겨우 마련했고, 얼마 후 아버지가 네 식구를 이끌고 남녘으로 내려 왔다. 가족들은 그나마 여섯 살배기 막내 동생을 어딘가에 놓쳐버리고 왔다.
후에 북에 살다 남하한 어느 분을 만나 여섯 살배기 그 동생이 홀로 집에 돌아와 있더라는 얘기를 듣고 백도선의 가족은 가슴을 쳤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이후로 아버지 백기환 지사는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김구 선생을 도와 새나라 건설에 앞장섰으나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정치판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비벼 살며 하루 하루를 견디는 중에도 백도선은 공부를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도선은 따로 떨어져 나와 신당동에 문칸방을 얻어 배명중학교에 보결로 입학해 향학열을 불태운다. 이때 백도선은 광교 조흥은행 옆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자신의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계까지 담당해야 했다.
'고구마 세 알' 싸들고 해군 입대
그러던 어느날 회현동 해군본부 앞을 지나는데 게시판에 '해군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 왔다. 당시 16세이던 백도선은 '밥 걱정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이를 17세로 속여 응모해 무난히 합격했다. 며칠 후 백도선은 어머니가 '가다가 요기하라'며 싸주신 따뜻한 기운이 식지 않은 고구마 세 개를 기차에서 풀어 먹으며 진해로 향했다. 백도선은 이 '고구마 세 알'의 모정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백도선은 해군에 입대해 '신호병' 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해군 인사본부에서 '발광 신호나 수기 신호 '최고수' 하면 백도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군대에서 별난 특기로 인정을 받게 된 백도선은 신이 났다. 밥 걱정 잠 걱정 해결에 모두 인정해 주는 특기 사병이 되었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백도선은 이 신호 특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뒤바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백도선이 해군에 입대한 지 1년 3개월만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종종 일본에 가서 배를 인수하는 일에 신호병으로 파견되던 어느 날, 백도선은 3개월 훈련일정과 함께 이번에는 미국 샌디에이고로 파견된다. 샌디에이고에서 3개월 훈련이 끝나고 귀로에 오르기 하루 전날 백도선은 약간 풀어진 기분으로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던 이모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 잘못이었다. 2,3시간 거리인줄로만 알고 출발한 백도선은 한참을 달리고서야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다시 되돌아 가기에 버스는 너무도 멀리 달려 와 있었고, 하루 반나절을 걸려 다음날 아침 6시에 샌프란시스코 이모집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네가 도선이냐!" 며 반겨 맞아 준 이모에게 백도선은 아침을 먹자 마자 사정을 말하고 다시 버스역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12시까지 귀대해야 했다. 조금 늦으면 배가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백도선은 식구들의 선물을 사라며 이모로부터 받은 3백불을 받아 들고 가슴을 졸이며 귀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참을 달린 끝에 버스가 백도선을 내려 놓은 곳은 애리조나였다. 애당초 영어 한마디 못하던 처지에서 중간에 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백도선은 운전사에게 손짓 발짓을 다 해가며 다음날 아침 일찍 샌디에이고로 가는 첫 차가 있다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뜬눈으로 버스역 부근의 호텔에서 밤을 지샌 백도선은 다음날 아침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샌디에이고로 갔다. 도착해 보니 이미 배는 떠나고 없었다.
백도선은 훈련 중 누군가가 '배가 귀로 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즉시 버스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달려 간 백도선은 바닷가 호텔의 꼭대기층을 잡아놓고 창에 목을 드리우고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낮에는 호텔 꼭대기 방에서, 밤에는 항구를 빙빙 돌며 무려 15일 동안을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탈영병'이 되어 버린 백도선은 당시로서는 거액이던 3백불을 며칠만에 다 써버렸다. 영어를 못해 최고급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받아가며 생활한 결과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백도선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았다. 그러다 어느 버스칸에서 동양여자를 만났는데 일본 여자였다. 결국 그 여자의 친절한 안내로 직업소개소를 찾았고 직업소개소에서는 이틀을 기다리면 일거리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백도선은 그 유명한 금문교가 바라다 보이는 공원 벤치에서 이틀동안 새우잠을 자고 지정된 시간에 새벽같이 일어나 직업소개소 앞으로 갔다. 곧 트럭 한대가 오더니 백도선을 비롯한 몇사람의 노동자를 싣고 한 참을 달리더니 짐을 부리듯 내려논 곳은 화훼 농장이었다.
노동 첫날, 시간당 50센트, 하루 4불의 임금을 받았는데, 당장 잘 곳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일이 끝난 다음 서성거리고 있는 백도선에게 십장이 무슨 볼일이 있냐는 듯 물어 왔다. 노 하우스! 십장이 손짓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더니 보일러 창고 뒷켠에 있는 빈방으로 안내했다. 보일러 지기가 살던 방이었다. 제법 깨끗해 보이는 침대에 시트도 있었고 화장실은 물론 샤워시설까지 갖추어진 훌륭한 방이었다.
1주일간 개밥을 먹다.
들어온 지 일주일 되던 날 영어가 가장 큰 문제였던 백도선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함께 일하던 친구가 백도선이 침식을 해결하고 있는 방에 놀러 왔다. 여기 저기 나 뒹구는 빈 깡통을 보곤 친구가 "너 개 키우느냐" 고 물었다. 백이 고개를 저으며 노!라고 대답하자 친구가 "오 마이 갓! 저건 개가 먹는 깡통음식이야!" 라며 소리를 질렀다. 백도선은 일주일 동안이나 개밥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개가 깡통밥을 먹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데다 당시 개밥 깡통에는 지금처럼 개그림이 없었으니 백도선이 그런 야만적인 실수를 할 수 밖에.
예기치 않게 삶의 공간이 바뀌어 어벙벙했지만 백도선은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한국 해군 생활에서 익힌 대로 새벽 6시에 일어나 화훼농장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해서 사장이 쓰는 지저분한 사무실을 매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놋으로 만들어진 재떨이를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 놓기도 했다. 그러기를 며칠 백도선을 눈여겨 본 사장이 백도선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자초지종을 묻더니 그날 저녁으로 백도선을 자신이 보증을 서 야간학교에 입학시켰다. 백도선은 9개월간 그 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익혔다.
사장은 이후 가끔 백도선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어느날 저녁 식사 중에 "너는 매우 스마트한데 지금 너의 형편으로는 군대에 가면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 이라며 미군에 지원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백도선은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고 대답했다. 이 때 사장이 백도선에게 신문에 난 광고문을 보여 주었는데 미 육군에서 한국어 통역관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미 육군에 입대
백도선은 다음날 모병소에 가서 신체검사와 함께 응시원서를 내 합격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미군이 되어 한국전에 재배속된다. 1948년 4월 대한민국 해군 제복을 입고 군대생활을 시작한 백도선이 한국전쟁 중에 신호 특기자로 뽑혀 배를 인수하러 미국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탈영병이 되었고 이번에는 미 육군 제복을 입고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백도선 씨는 "아마도 세계전쟁사상 한 전쟁에서 한 군인이 완전히 바뀐 국적으로 한번은 해군, 다른 한번은 육군으로 참전한 예는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백 씨의 기구한 삶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한국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부모 형제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전혀 예기치도 바라지도 않았던 미국인으로 살기에는 된장 냄새가 너무 깊게 박혀 있었다. 특히 존경받던 독립군의 후손이 떳떳치 않게 탈영병의 불명예를 안고 살아 간다는 것도 늘 꺼림칙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썩을 대로 썩어 말기 증상을 보이던 1959년 초. 백씨는 미 육군으로 제대하기 2주 전에 회현동에 있던 해군본부를 찾아 갔다. 참모총장에게 자신이 어쩔 수없이 탈영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참모총장은 자신이 탈영병이 될 당시 대령 계급으로 함장이었던 이용훈 장군이었다.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설명을 듣던 참모총장이 법무감을 불러 탈영병에 대한 처리를 지시했다. 그러나 법무감은 "우리 해양 경비법에 미 육군 하사를 처벌할 법은 없다"면서 탈영병 오명을 벗고 싶으면, 미군에서 제대하고 오라고 일렀다.
한국 군사재판서 사형선고 받다
백 씨는 미 육군에서 제대한 후 즉시 한국 해군에 자신의 탈영사실에 관한 재심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군사재판 사상 초유의 이 재판을 지켜 보기 위해 재판 당일 법정은 방청객들로 꽉 들어 찼다. 백 씨는 이 날 한국전 당시 샌디애고에서 벌어졌던 모든 상황을 다시 설명했고 자신이 미군이 되어 많은 훈장을 받은 것과 다시 한국전에 참여하게 된 것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 날 군사재판에서 백씨는 법대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즉시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사형수로 감방생활을 하는 중 당시 육군 법무관이던 백씨의 이종사촌형의 귀뜸으로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정치 상황으로 정권이 뒤바뀌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개월이 되던 어느날 저녁 이종 사촌형이 형무소 감방에 찾아와 백씨를 불러내 갔다.
백씨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면서 "아마도 재판 전부터 사전에 어느 정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유의 몸이 된 백씨는 다시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그때까지 자기 한 몸은 건사 할 수 있었으나 아직도 서울에 가족이 살고 있었고 때는 보릿고개로 굶어죽는 것이 예삿일이던 시절이었다.
백씨는 미 8군에 군속으로 다시 취직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백씨는 1973년 미국으로 다시 이주해서 텍사스와 뉴욕에서 잠시 살다가 플로리다 중부 스타크라는 농촌 도시에 둥지를 틀고 20여 년을 살았다.
"이젠 고국에 돌아가 살고싶다"
한 때는 100에이커의 땅을 빌려 각종 채소를 심어 팔기도 했으나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지난해 은퇴한 백씨는 한국정부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최근에 친일파 후손들이 자기땅을 찾겠다며 날뛰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손이 떨릴 지경"이라며 "한국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집단이냐"고 거칠게 불만을 토로했다. 백씨는 그동안 수차례 고국을 드나들며 국가보훈처등 정부 요로에 해외에 살고 있는 독립 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와 경제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때마다 '당신 아버지는 독립지사로 이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당신은 미국에서 잘먹고 잘 살터인데 왠 불만이냐'며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나마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해외독립유공자예우법안이 통과돼 지난해 5월부터 월 8백불정도의 생계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해 백씨는 크게 감사해하고 있다. 백씨는 해외에 90여명 정도의 독립운동가의 직계 후손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어렸을 적부터 배를 곯는 생활을 수없이 경험해 온 백씨는 현재 한국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몹시 비분강개해 했다.
"한국전 당시인가 국민방위군 사건 때 사병들이 먹어야 될 양식을 빼돌렸던 사람들이 사형당한 일 있잖습니까. 남에는 결식아동들이 아직 많고, 북에서는 배곯아 죽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데 국민의 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운 사람들을 가만 놔둘 수 있는 겁니까? 중국사람들, 아랍 사람들 이런 것 깨끗하게 잘 처리하는 데 우리는 왜 못하는 겁니까. '역적법' 이라도 만들어서 이들을 다스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70을 넘긴 백씨는 이제 한국에 영구 귀국해 살고 싶어한다. 가장 큰 이유는 최근 몇년간 거칠고 텃세가 강한 남부 백인 '레드넥' 들에게 당한 수모 때문이다. 초기 정착과정에서 백씨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최근 한국인 하나 없는 동네에서 백인 레드넥 지주들과 살면서 이민 생활에 뒤늦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미국인 지주가 어느날 갑자기 부당하게 렌트비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만 했다. 수해나 냉해 때문에 작물에 피해를 입어 신청할라치면 지주가 달려 와서는 "내 땅에서 종사 지었으니 나와 반반씩 나눠먹자"고 억지를 쓰는 데 백씨는 질려 버렸다.
거부하면 변호사 동원해서 소송을 제기해 법정에 불려 다녀야 하는 통에 결국 지주가 해달라는 대로 거의 다 들어 주어야 했다. 독립군 후손이 여기까지 와서 지주의 횡포를 견디며 수모를 당하며 산다는 생각에 서글퍼지기 시작했고 건강도 옛날 같지 않아 백씨는 지난해 완전히 농삿일에서 손을 떼고 은퇴했다.
백 씨가 영구 귀국해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못 살아도 좋으니 하루 밥 세끼 먹고 비 피할 집만 있으면 선친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고국에서 '명예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제때에 배우지도 못했지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도 없지요, 더구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지요, 무슨 맛으로 말년을 이 미국땅에서 살아갑니까. 그래도 한국에서 독립 유공자 자녀라고 3·1절이나 8·15 때 초청받기도 하면서 우리말 하며 살아 가는 것이 훨씬 낳지 않겠어요? 북에 두고 온 막내동생도 찾아 나서야겠고요"
첫댓글 우리나라에서 살아여 좀만 참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