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
20061241 도덕과교육 김세경
고전이란 오랜 시간 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들이지만 나를 포함한 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읽기에 너무 딱딱하고 때로는 너무 현학적이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작품들이 많다. 죄와 벌 역시 예전부터 꼭 한번 읽어야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작품 중의 하나였다. 비록 과제 때문이기는 하지만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뜻 죄와 벌로 책을 선정하였다. 주제는 윤리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크게 집착하지 않고 일단 내용을 파악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어 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죄와 벌』은 예상대로 읽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그리고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제 나는 윤리학적 관점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삶과 행동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세상에서는 온갖 불법이나 범죄를 행할 수 있는 사람, 아니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을 위해서는 법률 따위는 없는 것과 같다는, 즉 모든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으로 분류한다. 범인은 항상 복종을 일삼고 법을 범할 권리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범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비범인은, 특히 비범인이라는 이유로 해서 모든 범죄를 행하고, 어떠한 법률도 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할 때는 그 일부분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고, 또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역시 그 비범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너무 부조리한 것에 분격하고 가난 때문에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있는 반면, 사회에 존재할 가치가 없고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도 같은 고리대금 업자 노파가 잘 살고 있는 현실에 분개 한다. 그리고 결국 그 노파를 살해한다. 앞서 말했듯 그가 노파를 살해한 것은 인류를 위한 선택이었으며 단지 백해무익한 기생충 한 마리를 죽였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는 다르게 노파 살해 후 그의 정신과 육체는 황폐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생각대로 노파를 살해한 것이 인류와 사회를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면 그는 살인 후에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도 없는 망상과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단지 주인공의 행동이 범죄인가 아닌가 보다는 인간의 양심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양심과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틀, 즉 인간의 도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살인이란 법을 어긴 것임을 벗어나서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원초적인 룰이다. 이를 어겼을 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책감과 불안, 고민들은 원초적인 ‘벌’이 되는 것이다. 즉 법정에서 판사가 형벌을 판결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의 살해 후에 겪는 정신적 고통도 이와 동일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원초적인 ‘벌’을 부정하며, “내가 죽인 건 인간이 아니야! 다만 잘못된 질서를 파괴하고 불쌍한 사람을 가여워 했을 뿐.” 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살인 후 그가 갑자기 앓기 시작하는 것으로 그의 말과 마음, 즉 양심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입으로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스스로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며 스스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중에 소냐의 충고와 사랑으로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법적, 사회적 벌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나는 그가 겪는 정신적 고통이 오히려 그에게는 더 큰 벌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며 이를 어겼을 때 인간은 스스로 죄책감과 혼란을 겪게 되는 것, 이것을 인간이 갖는 기초적 윤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책의 후반부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창녀가 된 소냐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그녀의 충고로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 그리스도적 소냐의 사랑을 통해 죄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인해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미래를 이끌며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라는 결론으로 책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결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사회의 부조리, 인간의 선과 악, 양심과 죄책감, 처벌과 용서 등 많은 생각거리와 논쟁거리의 귀결점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니... 조금은 허탈하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결국 책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랑을 통해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죄책감을 통해 마음의 벌은 받았어도 합법적인 벌을 받음으로써 진정 인간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즉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좀 더 인간 내면의 성찰과 사색을 통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바라보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 파멸에 이르렀다면, 그 회복 역시도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단순히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켜져야 할 윤리가 있고, 그 윤리의 출발점이 인간의 양심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절. 살인, 근친상간, 도둑질, 강간 등을 금지하는 것을 원초적인 윤리라고 한다고 한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이러한 원초적인 윤리는 정해졌다. 그리고 이를 지켰을 때 인간은 인간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러한 원초적인 윤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그릇된 사상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고 처벌을 받게 된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됨으로써 그가 원초적 윤리를 거역한 벌은 받게 된 것이므로 그것으로 끝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용서와 인간성의 회복을 도스트예프스키는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얘기했듯이 책에서는 사랑을 통해 근원적 인간성을 회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나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의 근원은 인간 그 자체, 다시 말해 내면 깊은 곳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 후 몸과 마음의 병으로 고통 받는 것처럼 죄를 짓는 것도 나 자신이며, 그에 대한 처벌을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조금은 상투적이지만,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끊임없이 스스로 자문자답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끝으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