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스탄불에서 2일 째, 두 궁정과 크루즈, 그리고 개혁
터키를 국명 변경에 맞추어 튀르키예로 바꾸라는데 나는 그대로 쓰렵니다. 꼭 이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군요. 그러면 곧 폴란드를 폴스카, 스페인을 에스파냐 등으로 고쳐야겠네요. 우리가 수천 년을 사용해온 북경과 남경도 베이징 난징으로 바꾸는데 이것 하나 바꾼다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요. 그러나 서양에서는, 예를 들어 독일은 Deutschland인데 우리는 독일, 미국 등 영어권은 Germany, 프랑스에서는 Allemagne, 러시아에서는 Germania라고 부릅니다. 자기들이 수백 년 불러왔던 그대로 부릅니다.
이스탄불에서의 둘째 날입니다. 아침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크루즈로 시작하군요. 우리는 비를 맞으며 선착장에서 전세선으로 해협을 둘러보며 주변의 유서 깊은 건물들을 구경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군요.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옛 성벽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군요. 잘 보존된 곳도 보이고 그 위에 집을 지은 곳도 있는데 이게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배를 타니 어제 본 소피아 회당이 저 멀리 보이는데 주변에 미나레트(minaret) 부르는 첨탑을 가진 비슷한 건물/회당이 너무 많아 배가 조금 이동하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미나레트는 한 개에서부터 4개, 6개까지도 있다는데 4개 이상은 상당한 지위를 가진 인물만이 지을 수 있다고 하네요. (사진 1,2, 길가의 성벽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본 소피아 회당)
나는 지도를 볼 때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 놀라곤 합니다. 하와이섬의 진주만이 그 하나이지요. 화산섬은 보통 해안선에 단조로운데 진주만은 오목하게 파여있고 그 입구를 포드 섬이 막고 있어 천혜의 군항이지요. 보스포루스 해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중해 동쪽 그리스의 다도해인 에게해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어와 널찍한 마르마라라는 바다를 만들고 흑해로 연결되는 좁은 길목이 바로 이 해협입니다. 마르마라해는 11,300 평방km이니 경상남도 10,541 평방km보다 넓습니다. 부산과 울산광역시를 합치면 비슷하겠지요. 두 물목 사이에 이런 넓은 바다가 있다니, 이게 자연의 조화가 아닌가요? 이만큼 넓은 해역에서 흑해와 연결된 해협은 폭이 가장 좁은 곳이 700m, 길이 31km, 평균수심 65m이니 그 전략적 가치는 가름할 수 있겠지요.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할 겁니다.
두 해협은 모두 중요하지만, 시대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소아시아, 페르시아 간의 교류가 빈번하고 쟁패전이 치열했던 시기에는 트로이가 있는 다르다넬스가 중요했겠지요. 페르시아 대군이 이 해협을 건너 그리스로 진격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여길 지났으니까요. 자연히 트로이 등 주변 도시들이 번영을 누렸을 겁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동로마제국/오스만 터키의 수도가 되면서 보스포루스가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군사적 요충이 됩니다. 지금 그리스와 터키가 비록 앙숙이지만 서방의 나토 회원국이고 미국의 동맹국이라 다르다넬스는 군사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는 반면 보스포루스는 러시아 해군의 진출을 막는 최전방 방어선이 아닙니까? 그래서 3개의 다리와 해저 터널 및 철도가 있습니다. 이 중 한국 기업들이 한 개를 건설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일행은 이 좁은 해협을 마르마라해 쪽으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저 멀리 해협을 드나드는 배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듯하더군요. 우크라이나 밀을 실으러 들어가려는 것인지 다르다넬스 쪽으로 나가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크루즈선 주변에서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 해협에 돌고래가 사는가? 아니면 흑해나 에게해에서 밀려 들어온 것인가? 시칠리아섬 부근엔 돌고래가 멸종되었다고 하더군요. 로마 시대부터 돌고래 사냥에 열을 올려 씨가 말랐다는데 이 해역에서는 살아있군요. 이들이 에게해로 나가 이탈리아반도 남단 이오니아해로 들어가면 시칠리아섬 주변은 물론 지중해 전체의 생태계 복원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인데,... 부질없는 생각인가요? 원래 자연계의 먹이사슬에서 한 가지가 빠지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이것이 다시 자리잡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동네 공원이나 대학이 남아 있는 숲을 보세요. 20여 년 전만 해도 다람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습니다. 모두가 야생 고양이 탓입니다. 이놈들은 쥐만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잘 타니 다람쥐들이 멸종된 것이지요.
오후엔 돌마바흐체 궁전과 토카프 궁전을 보았습니다.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오스만 터키의 대표적인 궁전이라 하더군요. 토카프는 전통 이슬람식 궁전이라네요. 오스만 터키제국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후부터 아시아,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뻗치면서 기세등등하던 시기 술탄이 1459년부터 1856년까지 400년간 거주하던 곳이랍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해, 그리고 이를 굽어보는 전략요충인 골든 혼이 합치는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죠. 그래서 이슬람의 체취가 듬뿍 묻어난다고 합니다.
전문가의 눈에는 건축양식이나 실내에 비치된 유물들의 특성들이 잘 보이겠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사진 촬영이 금지된 한 전시관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세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영화 ‘벤허’에는 모세가 길고 화려해 보이는 지팡이로 유대인을 이끌고 홍해를 가르는 장면들이 나옵니다만 여기에 전시된 지팡이는 우리가 어릴 때 나뭇가지를 꺾어 싸움 놀이하던 것 만한 약 1.5m 정도쯤 되는 작은 것이네요. 양을 치던 모세가 쓴 지팡이라면 사실 이게 맞을 겁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마신 술잔도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질그릇 잔이거나 나무잔이었겠지요.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나오는 성배(holy grail)는 인간이 닿지 못하는 먼 곳 몽살바트(Montsalvat)라는 성에 높이 모셔져 있으며 매년 비둘기 한 마리가 내려와 그 초능력을 강화한다고 하지요. 이런 성배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전승이고 신화이겠지요. 모세의 지팡이 같은 초라한 듯 담백한 것을 보면 오히려 경건한 마음이 솟습니다. (사진, 구글에서 찾은 모세의 지팡이)
‘돌마바흐체’ 궁전은 ‘정원이 많다.’라는 뜻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서 지은 것이라 합니다. 베르사유는 1660년대 루이 14세 전성기에 만들어진 궁전인데 이후 세계 여러 나라 궁전과 정원의 전범이 되지요. 런던의 햄튼 코트, 그리고 중국의 원명원도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서양루(西洋樓)라는 건물 하나가 그렇다고 하군요. 돌마바흐체는 해변에 맞닿아 있습니다. 바다 쪽에서 찍은 사진들이 멋있네요. 화려한 석조 건축물에 정원이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더군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가 공화국이 되면서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하렘의 방 하나를 집무실 쓰다가 사망한 곳이라 모든 시계는 그가 집무 중 사망한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파샤는 장군이란 뜻으로 케말 파샤의 본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입니다. (사진, 토카프와 돌마바흐체 궁전)
자, 이 정도로 궁전에 관한 순례를 마칩니다. 나의 글보다는 사진이 훨씬 잘 보여줄 것이니 구글 등을 찾아보세요. 두 궁전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머리에 맴돕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달리 산업화한 유럽과 일찍부터 교류하고 접촉해온 터키가 왜 수백 년이 넘도록 개혁다운 개혁을 이루지 못하여 19세기가 되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게 되었느냐는 점입니다. 그리곤 100년이 넘도록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면서 영토는 잠식당하고 쇠락하지요. 근대 서양 열강들의 외교문서에는 터키와 이란, 그리고 한국을 개혁에 실패한 대표적인 국가로 언급되곤 합니다.
물론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겉핥기식으로 간단히 집어봅시다. 산업화가 늦은 것은 일단 접어둡시다. 동유럽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그 필요성을 절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독일이나 러시아 등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접촉, 교류 혹은 전쟁을 치르면서 과거의 방식으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감을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터키는 계속해서 맞고 터지면서도 느긋했습니다. 느긋했다기보다 그래도 왕조는 존속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있었겠지요. 마치 조선과 대한제국이 백척간두에 서 있으면서도 이씨 왕실은 유지될 것으로 믿었던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정치제도의 민주적 체제와 연결될 것입니다. 물론 독일, 러시아 등도 군주제입니다만 위에서 말한 대외관계나 왕실의 지속성에 대해 느끼는 절박감에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절대왕정이란 정치체제에 권력다툼이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요? 동양에서는 왕자로 태어나면 경제적 안락함과 세속적 지위를 누리지만 형제간의 우애는 상실한다고 하지요. ‘왕자의 난’ 등 왕권을 갖기 위한 형제간의 참극을 수없이 보지 않습니까? 왕위 계승자가 아닌 똑똑한 왕자가 정치권력에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역모에 연루되기 일쑤입니다. 오스만 터키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왕에 대한 암살 혹은 미수 사건이 점철되어 있다더군요.
왕위 계승자가 확정되면 이에 위협이 되는 모든 왕자를 도륙했다고 합니다. 왕위 계승자가 똑똑하고 민첩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반대로 고종과 같은 암군이 가장 중요한 개화기에 40년 이상 왕위에 있었다면 국가적 재난이겠지요. 후일 왕자들을 죽이는 게 잔인하다 하여 이들을 한곳에 모아 감시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모이를 주면서 돌봐주는 애완동물 같은 생활을 했겠지요. 이들 중 국가경영에 자질이 있고 관심을 보이는 왕자가 있으면 그 말로는 뻔했을 겁니다.
여기에 또 ‘개혁’이란 反전통적인 요소의 도전이 끼어듭니다. 김홍기 목사는 개혁이란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한 동경과 전통 간의 갈등이라 하군요. 짧지만 핵심을 찌른 말입니다. 기존 권력을 지키려는 보수층은 베르사유궁을 모방한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설하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창설하는 것까지는 용인했을 겁니다. 마치 고종이 중국이나 일본에 견학단을 보내고 신문을 발간하고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별기군을 만들고, 덕수궁 안에 서양식 석조전 건설 등등은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는 정치제도를 개편하려는 시도가 조금만 보여도 모두 역적질로 처형해 버리지요. 터키 집권 보수층 역시 개혁이란 미명아래 ’궁중 쿠데타‘ 같은 방식으로 왕을 살해하거나 실권자를 쫓아내지만, 자신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근본적인 개혁, 즉 제도를 통한 권력관계의 재조정과 개혁을 주도할 신진 세력을 장기적으로 양성하는 기제(mechanism), 즉 프로이센의 관료제 등은 꿈도 못 꾸었던 겁니다.
어제(5/15) 끝난 대통령 선거가 보여주듯이 에르도안 현 대통령 2003년 내각제 총리부터 현재까지 권력이 장악한 결과 부패가 만연하여 1차 투표에서 과반 획득에 실패했습니다. 가이드 김홍기 목사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서 누가 되어도 진정한 개혁은 기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즉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본질적인 개혁은 여전히 어렵다는 말입니다. 삼성 제품을 모방해서 그럴듯하게 보이게는 만들어도 더 이상 ’우리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제품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군부의 영향력이 큰 탓인지, 그래서 현 대통령과 야당 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의 성향이 비슷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거 결과를 나타낸 지도를 보니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해안지역은 야당을 지지하고 있군요.(20232.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