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있는 그대로
인사동 찻집
지인과 나란히 앉아
낙엽이 지는 창밖을 보며
차를 마셨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언어를 거르지 않고
나를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되었다
지인은 말했다
기도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지인이 권하는 기도는
나를 꾸짖는 말로 들렸다
그때는 그랬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의 가을을 말하지 못했다
2. 난화분
시월 마지막 주 아침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나보다 먼저 도착한
난화분이 와 있었다
난을 보내주신 분은
김경린 선생님의 따님이신
김예자 시인이었다
김경린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행사에
선생님과의 추억담을 쓴 인연으로
꽃을 보내주신 김예자님의 정성이지만
하늘에 계신 김경린선생님이 보내주신
꽃이라 생각했다
3. 한강공원의 사계
눈이 내려
춥고 쓸쓸하던 망원동 한강공원
그곳에 봄이 찾아왔다
매화꽃이 피고 작약 꽃이 피고
장미꽃이 피는 봄
그러나 봄은 짧게 지나가고
여름이 돌아왔다
색색으로 장엄하게
넓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던 구름
검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한강을 범람하게 했다
이제 가을이 되어
낙엽이 지면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목 오리가 춤을 추며
긴긴 겨울이 돌아오겠지
4. 낯설었던 봄
너와 나로 만나서
우리가 되었을 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살자던 당신
말은 그럴 듯 했으나
우리가 가족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약속을 깨는
매체가 있었다
술은 마약이라고
진단을 내린
병원을 멀리하고
술이 술을 부르던 봄
약속을 깨고 행복을 깨고
목련꽃이 피던
따뜻한 봄
5. 젊은 엄마들
봄볕이 내리는 오후
그늘진 골목길에
아기들과 함께 모여 있는
젊은 엄마들
그들 곁을 지나던 나는
혼자 말을 했다
저들은 왜 일찍 결혼을 하여
엄마가 되었을까
좀 더 젊었을 때 자유롭게
직장생활을 하고
자유롭게 젊음을 보내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말을 해놓고
다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그때는 다른 말을 했다
저들은 어떻게 일찍 결혼을 하여
엄마가 되었을까
6. 남미를 여행할 때
헤밍웨이의 생가 등
남미를 여행할 때
조그만 기차역으로 가던 길
길가에 모여 있는 어린이들을 만났다
여행을 다니는 들 뜬 마음에
지갑을 열고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적은 액수의 돈이지만
그들은 달러를 받아들고 기뻐했다
같이 간 일행들도 그들의 순박함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다
돌연 나는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 토정선생 사당으로
관광을 왔던 예쁜 여인이었다
산골 동네 어린이였던 나를 불러
사과와 과자 등을 주고 가던 여인
고운 얼굴 단아한 옷차림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살아났다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 무논도 기억이 났다
7. 강요하지 마세요
이불 속에 누워
뒤척이는 나를
깨우려 하지 마세요
아직도 더 쉬고 싶어요
피곤하다 귀찬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사람이 다르고 생활이 다르니
그대와 하는 말이 다를 수 밖에요
갱년기가 언제 지나 갔는지
행복이 있기는 했었는지
모르고 지나 갔으니
모르는 것에 대한 미련보다는
아는 것에 대해 정진 할래요
일이 많은 날이라도
쉬어갈래요
8. 낙엽의 눈물
왜 울어 바보같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거야
푸른 잎 청춘이 그리워서야
단풍든 고운 정이 아쉬워서야
아니면 왜 눈물을 흘리는거야
지나간 과거야 그렇다치고
밟히고 쓸리는 현실이 고달퍼서야
겨울이 오기전에 가는 생이
서러워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