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3 주일예배
본문: 눅 13: 22-30
제목: 좁은 문으로
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만 구원을 받는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3-24)
성경에는 구원 받은 자가 많은 것으로 말씀하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만 다니면, 세례만 받으면, 직분만 받으면,
구원 받은 것으로, 천국은 따논 당상으로 여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이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이사야가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만군의 주께서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롬9:27,29)
유대 랍비들은 유대인이면 천국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가르쳤다.
유대인이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니까, 율법을 줄줄 외우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10:5)
유대인이니까, 교인이니까,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말씀은 없다.
로마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지금 개신교회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부흥사는 ‘교회 평생 다니고 지옥 가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고 했다.
주님은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것을 표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님의 산상설교의 결론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큰 문 넓은 길로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데, 그곳이 멸망 곧 지옥문 지옥길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 큰 교단, 유명 목사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큰 교회, 목사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단 말이다.
바로 이어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력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5-16)
이 거짓 선지자들이 큰 문 넓은 길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고가니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을 삼가라는 것이다.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성품의 열매, 행함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열매는 보지 않고 외양 외식만 보는 것이 문제이다.
좁은 문 협착한 길로는 찾는 자가 적은 데, 그곳이 생명 곧 천국 문이요 천국 길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데도
예수님의 제자는 열 둘 뿐이었다.
그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혀 끌려가니까 다 도망갔지만요.
그래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못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조건 하나 하나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구원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초대교회와 그 대를 이은 발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보면
그들은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능히 살았다.
우리도 말로만 초대교회 초대교회 하지 말고
발도인들의 역사를 통해 초대교회를 회복하고 뒤를 이어야만 한다.
2. 너희는 밖에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미7:27-28)
‘너희’가 누구인가?
이방인들은 개 취급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자기들만 구원 받는다는 유대인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라 하셨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8:12)
유대교회의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로마교회도, 이를 개혁한 개혁교회도, 이 개혁교회를 개혁한 현대교회도,
유감스럽게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이 되었다.
이 네 쌍둥이들은 큰 문 넓은 길로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였다.
노략질하는 이리들이 양의 옷을 입고 교회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능히 주님의 제자되는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예레미야가 증언한 말씀 그대로의 반복이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렙5:30-31)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셨다.
천국을 구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기만을 힘써놓고서는 천국을 바라다니 염치가 없다.
집 주인이 한 번 문을 닫은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이 없다.
주 앞에서 먹고 마셨고, 길거리에서 가르침을 들었더라도
주님은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신다.
떠나 가면 갈 곳은 지옥 밖에 없다.
바깥 어두운 곳이다. 유황불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데도 캄캄하고 어둡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가장 극심한 슬픔과 가장 극렬한 분노를 말한다.
구원 받은 자들의 복된 모습, 그 영광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소속이 문제가 아니고 자랑과 업적이 아니고
정말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고 전인격과 삶이 변화되었느냐가 기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가 기준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능히 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야 하고 은혜의 선물이어야 한다.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는가가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그와 같이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했는가?
중심을 보시고 분별하시고 상과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다.
3.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많다고 하셨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제삼시에 온 자에게도 제심일시에 온 자에게도 똑같이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주셨다.
그랬더니 나중에 온 자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자나
어떻게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할 수 있느냐고 원망하였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먼저냐 나중이냐의 기준이 우리의 셈법하고는 다른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능히 제자되는 삶을 살았느냐가 기준이지
먼저 되었느냐 나중에 되었느냐가 기준이 아니다.
나중 제십일시에 왔더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썼느냐가 기준이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헬라인이냐 야만인이냐 로마인이냐 히브리인이냐
백인이냐 다른 색이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세상은 좋아하지만
주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페하려 하신다.
초대교회가 또 발도인교회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변화된 인격과 삶, 어려운 이웃들을 하나님 사랑으로 섬기는 것,
몸과 마음을 다해 예수의 제자로서의 가르침과 삶을 보고, 그 매력에 끌려,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교회는 매력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덕분에 엄청난 속도로 자랐다.
240년 키프리안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교회에 120개의 행동수칙 모음을 남겼는데,
거기에 전도를 권면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일해야 한다.’
‘성령이 자주 불로 나타났다.’
‘고아와 과부가 보호 받아야 한다.’
(알렌 크라이더,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복음전도’)
능한 자들의 전도와 선교가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기독교국가가 되어 강제적으로 끌어모으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그 방법을 버리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모으면 부흥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만다.
천국에 가까이 있던 자가 나중에 멀어진 자가 되고 만다.
광야의 고난과 연단으로 인해 나중 되었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서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된 나중이를
주님은 먼저 된 자로 세우실 것이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자가 먼저 되었다가 나중 된 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이 나중 되었다가 먼저 된 자이다.
나중 되었으나 먼저 된 자들이 자신과 이웃과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켰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성경도가 되어야 한다.
죽이는 율법 조문 교리 조문들이 아니라, 살리는 영으로 마음판에 말씀을 쓰는 성경도,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를 본받고 전통을 이어받는 성경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