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 여러 불자님들 손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그러한 기記의(적힌) 쪽지가 있습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문자 그대로 한량이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님이란 뜻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협조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만등불사萬燈佛事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슴에 있는 무량광불無量光佛하고 만등불사萬燈佛事하고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것부터서 먼저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진리는 항시(항상) 광명光明이나 빛이나 그러한 걸로 해서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고, 또는 진리의 반대인 사악邪惡이나 부정적인 어떤 부조리나 그러한 것은 어둠이나 그런 암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헌데 그러한 암흑을 밝혀서 보다 더 광명光明한 마음으로 또는 광명한 세계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어느 종교宗教나 다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광명光明 가운데서 가장 근원적인 광명, 가장 본바탕인 광명 이러한 광명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님입니다. 만등불사萬燈佛事는 비록 만등이라 하는 수치가 될 망정 이것은 만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만등 백만 등 또는 무진無盡 등, 끝도 갓도 없는 그러한 등불, 그러한 끝없는 등불, 한없는 등불을 키워서 우리가 무량불無量佛(무량광불)까지 가는, 우리 스스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되고, 또는 천지 우주가 모두 다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가 되는, 이러한 것을 기구祈求하는데서 만등불사의 참뜻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대부분 다 아시지만은 우리 번뇌를 가장 간추리면 하나의 무명無明이나 그런 말로 해서 표현 되겠지요. 조금 더 부연시키면 그때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이라, 조금 더 부연시키면 조금 더 퍼뜨려서(자세히) 말하면 탐진치만의貪瞋痴慢疑라. 탐욕심을 부리고貪, 노여워하고瞋, 또는 어리석은 마음을 품고痴, 또는 만의慢疑라, 아만심我慢心 그런 만심慢心을 내고, 또는 참다운 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서 의심疑心을 내고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라, 이러한 오번뇌五煩惱 이것이 보통 말하는 근본번뇌입니다. 이러한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무량광명無量光明을 못 봅니다. 무량광불無量光佛을 못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불교를 위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바른 신앙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 우리 신앙대상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바른 행위行爲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하現下 우리 종교계가 혼미昏迷를 거듭하고 있고, 또는 우리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 빛나는 공헌을 못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바른 신앙을 갖지(갖고 있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바른 신앙은 어떤 것이 바른 신앙인가? 이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확실히 우리가 알고서 믿어야 합니다.
불교가 워낙 광대무변廣大無邊해서, 교리가 짧고 교리가 천박해서 조금만 몇가지 쭉쭉 외이면 신앙생활에 별로 지장이 없을정도로 간단하면 모르겠지만 불교는 너무나 광대무변합니다. 마치 하나의 양을 모는데 양이 도망가는 길이 한 갈래 밖에 없으면 그냥 한 갈래로 쭉 가서 잡을 수가 있지만, 길이 여러 갈래면 그때는 어느 길로 양이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양을 못 찾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수행하는 방편方便도 많고, 가지가지의 그런 경전經典도 많이 있고, 이러한 광대무변한 그런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을 바로 못두면, 그런 많은 가운데서 간추려서 그런 골수법문을 딱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의 실행이, 우리의 행行이 따를 수가 없습니다. 행行(행동)이 못 따르면 우리한테 가피加被도 올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성불成佛이라 하는 불교인의 구경목적究竟目的을 달성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 신앙대상인 부처님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서 본바탕을 보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 우리 불자는 부처님을 그저 신앙적으로, 어려운 말로 하면 앙신仰信이라, 우러를 앙仰자 믿을 신信자, 앙신이라. 신앙적으로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헌데 부처님께서나 또는 그 뒤에 무수도인들의 말씀을 빌어서 부처님의 개념을 내린다고 생각해 보면 부처님이란 우리 인간성人間性의 본질인 동시에 또는 바로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바탕입니다. 우리 인간은 각 현상은 보지만 일체존재의 본성本性은 못 봅니다. 허나(그러나) 비록 못 본다 하더라도 본성을 본 분들 말씀으로 해서 우리 인간성의 본바탕, 인간성의 본질, 우주만유의 본질, 이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물리적인 표현으로 말씀할 때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명無量光明입니다.
불교란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나 일체 모든 학문과 종교철학을 다 거기에 포섭해 있어놔서,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 어떤때는 그러한 부처님을, 우주만유의 본질인 동시에 우리 인간성의 본질인 부처님을 이렇게도 표현도 하고 저렇게도 표현합니다. 과학적인 표현도 있고, 또는 철학적인 표현도 있고 그때그때 중생근기衆生根機에 따라서 달리 표현하십니다. 헌데 우리의 본바탕, 우주의 본바탕인 그 무엇, 그 무엇을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부처님입니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면 그때는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때는 진여眞如나 또는 여래如來나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나, 또는 주인공主人公이나, 하나의 모든 것을 다 통일한 하나라고 그래서 하나의 본질이라고 그래서 일물一物(한 물건)이나 그러한 걸로 해서 부처님을 철학적으로도 표현도 합니다. 진여眞如 또는 법성法性, 불성佛性 그런 걸로 철학적으로 표현도 합니다. 헌데 물리적 표현으로 한다고 할 때는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무량광無量光이라,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 번잡합니다만 한가지 더 풀이 해야 될 것은 무엇인고 하면 광명光明 그러면, 부처님의 광명은 우리가 보는 색광色光이 아닙니다. 광명을 우리 불교에서는 색광色光과 심광心光으로 구분합니다. 빛 색色자 빛 광光자, 우리 인간의 제한된 안목으로 우리 중생도 볼 수 있는 그런 광명은 색광色光입니다. 헌데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마음의 본질, 우주의 본질인 불성佛性을 깨달은 분만이 볼 수 있는 그러한 광명은 마음 심心자 빛 광光자 심광心光입니다. 허나 광명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단지 성상性相이라, 성性(성품)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심광心光이요. 상相(모양)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색광色光입니다. 우리가 보는 전등불(전깃불)이라든가 또는 등불 그런 불도 역시 그 본바탕은 본질은 이것은 심광心光입니다. 이러한 심광心光 색광色光 다 합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 한도 끝도 없는 광명입니다.
우리가 법당에서 부처님 참배할 때 보면 부처님의 영상불影像佛?(불상) 뒤에 가서 탱화부처님이 계십니다. 탱화부처님은 가만히 보노라면 부처님 정상에서 빛이 나와서, 비록 탱화는 좁아서 미처 못 보이지만 그 빛이 무량세계無量世界로 몇 바퀴, 몇 바퀴 돌아가지고 다시 부처님 정수리로 딱 들어오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부처님의 광명이, 부처님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자성自性, 우리 본성本性, 우주의 본성을 인격적으로 표현해서 부처님인데, 그런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부처님의 정수리에서 빛이 나온 것을 우리한테 보이도록 그린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앞에 현관 앞에 가서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는 그러한 또 글귀가 있습니다. 광명변조는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내내야 무량광불無量光佛하고 같은 뜻입니다. 광명변조光明遍照라, 광명이 천지우주에, 불교말로 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조금도 흠축欠縮이 없이, 조금도 간극이 없이 다 충만해 있는 것을 가리켜서 광명변조라 합니다. 천지 우주를 두루 다 비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지혜, 이러한 것을 깨달은 분이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요, 또는 그 뒤에 나오신 무수한 도인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바탕인 그런 불성佛性, 인격적 표현으로 하면 부처님, 철학적으로 하면 진여眞如 또는 하나의 물건一物,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마는 열반涅槃이나 도道나 그런 것도 역시 다 철학적으로 부처님을 표현해서 그렇게 합니다.
헌데 그러한 부처님 그러한 불성은 대체 어떠한 재주(능력)가 있는 것인가? 어떠한 공덕이 있는 것인가? 비록 그러한 부처님이 우리의 본성本性인 동시에 우주의 본성이라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성이 별로 가치도 뭣도 없고 그저 한 물物(물질)이나 또는 요새(요즈음) 말하는 그런 소립자라든가, 원자나 그런 정도밖에 안 되면 그것은 별로 신통한 가치가 없습니다.
허나(그러나) 우리 본질인 본바탕인 불성佛性이나, 우주 만유의 본질인 불성은 무량無量의 무한의 모든 지혜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불성)을 공덕이 하도(너무) 많으니까 도를 통한 통달무애通達無碍한 그런 도인道人들이 몇 수만 년을 두고서 헤아리고 찬탄하고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헌데 그러한 무량공덕을 간추려서, 우리 불교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이러한 말씀으로 요약을 합니다.
상常은 무엇인가? 상은 항상 상常자, 상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영생해서 항시(항상) 상주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나 일체만유一切萬有의 현상은 비록 그때그때 무상無常해서 변화하고 또는 소멸한다 하더라도 본바탕인 불성佛性 이것은 영생상주永生常住합니다. 이것보고 항상 상常자 상 그럽니다. 그 다음은 락樂이라, 즐거울 락樂자 락이라는 말씀입니다. 락 이것은 일체행복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고생은 눈꼽만치도 없고서 모든 행복을 원만히 다 갖추고 있단 말씀입니다. 이것이 락樂입니다. 그 다음은 아我라. '아'는 나 아我자입니다. 나 아我자, 이것은 조그마한 제한된, 번뇌煩惱도 일으키고, 또는 죽기도 하고 생사生死를 거듭하는 그런 조그마한 소아小我가 아니라,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자재할 수 있는, 신통神通이나 또는 지혜나 또는 기술이나 뭣이나 모든 것을 다, 하여튼 일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그때는 아我입니다. 불교 말씀으로 해서 이러한 아我(진아眞我, 대아大我)를 가리켜서 삼명육통三明六通 그럽니다. 삼명육통이라. 이런 것은 전문적인 말이기 때문에, 풀이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일체공능一切功能을 할 수 있는 능력 보고 그때는 아까 말한 상락아정常樂我淨 가운데 아我라고 그럽니다. 즉, 다시 말하면 진아眞我인 동시에 대아大我인 셈입니다. 우리 같은 범부 아我는 이것은 소아小我고,, 소아의 껍데기를 벗어버려서 참다운 자기인 불성을 성취한 그런 아我를 가리켜서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 그럽니다. 그런 대아大我에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아까 말씀마따나 상락아정常樂我淨 가운데서 이것이 아我입니다. 그 다음은 정淨이라, 맑을 정淨자입니다. 이건 무엇인고 하면은 번뇌라 하는 것은 조금도 없고 우리 마음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해서 천지를 다 비추는 그러한 광명스러운 마음을 가리켜서 그때는 정淨 그럽니다. 흐림이 있고 또는 구름이 있고 그림자가 있다고 하면 천지를 못 비추는데, 조금도 흠축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그러한 광대한 청정淸淨한 그런 경계, 이것보고 정淨 그럽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 상常자 즐거울 락樂자 나 아我자 또는 맑을 정淨자. (상락아정常樂我淨) 이것이 우리 본성인 불성佛性에 갖추어져 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성불成佛을 다 서두르고 있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먼저 이러한 나한테 갖추어있는 내 부처님, 일체만유의 근본인 부처님 이러한 부처님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합니다. 나한테 있는 부처님, 내 본질인 부처님이나, 또는 박가한테 있는 부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이나 그때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합니다. 원융무애란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만, 조금도 차이도 없고, 조금도 그런 어떠한 차별도 없고 이것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원융무애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넓은 바다에서 바람의 연緣 따라서 이렇게 천파만파千波萬波 파도가 생기고 물거품이 생깁니다. 그 파도나 거품이나 그것은 좀 낮은 것도 있고, 높은 것도 있고 대소大小의 차별은 있고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물이란 점에 있어서는 물은 똑같은 물이듯이, 현상적인 사람은 비록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또는 일반 다른 동물인 개나 소나 돼지나 또는 돌멩이나 또는 산이나 냇이나 하늘에 있는 별이나 그와 같이 천지만유天地萬有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본성인 부처, 불성인 점에서는 그때는 똑같습니다. 원융무애합니다.
상相(모양)은 천차만별이나 성性(성품)은 똑같습니다. 불성佛性은 똑같습니다. 이러한 불성佛性 가운데 들어있는 무량공덕無量功德, 이것이 아까 말씀마따나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영생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일체 행복을 다 원만히 갖추어 있는 것이고, 또는 일체지혜나 일체기행一切機行이나 그런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고 또는 청정해서 천지우주를 다 비추는 것이고, 이러한 끝도 갓도 없는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우리의 불성공덕佛性功德입니다. 이렇게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갖기 위해서 무진無盡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보배寶貝하고, 위대한 그런 보물도 많이 있고 또는 가치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것은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가치, 영원히 멸치(멸하지)않는 가치 이것은 역시 우리한테 있는 불성佛性입니다. 몇십 년 살다가는 하찮은 우리 이 목숨을 천만개 내버려둬(내던져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소중한 보배입니다. 이러한 보배이기 때문에, 이러한 보배를 위해서 무수한 분들이 생명을 천번만번 다 희생을 시킨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은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왕이지요. 헌데 그분께서 부처님의 교단을 많이 돕기도 하시고, 부처님을 깊이 신봉했습니다. 이분이 부처님을 초청을 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천이백 대중을 거느리고서 궁중에 가셨단 말입니다. 가셔서, 부처님 자리를 딱 이렇게 장엄하게 만들어 드리니까 부처님께서 걸터앉으시기 위해서 발을 이렇게 턱 올린단 말씀입니다. 인도의 풍습은 맨발로 다닙니다. 신(신발)을 안 신습니다. 우리 교주인 부처님께서 맨발로 다니시고 어느 때나 모자도 안 쓰고서 항시 원정백족圓頂白足(삭발한 머리와 맨발)이라. 맨머리에다가 맨발로 다니셨다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우리 같은 중들이 이런 옷을 입는 것도 실은 송구스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맨발로 이렇게 턱 올리시니깐. 부처님께서는 상호相好가, 상호모양이 32대인상三十二 大人相이라, 중생이 따를 수 없는 서른두가지의 아주 원만무결한 상호가 있단 말씀입니다.
또는 80종호八十種好라, 여든가지의 소소한 그런 상이 있단 말씀입니다. 헌데 그런 가운데 부처님 발바닥은 천복륜千輻輪이라, 일천 천千자 바퀴살 복輻자 바퀴 륜輪자 천복륜이라. 그건 무엇인고 하면, 마치 이렇게 바퀴살 모양으로, 자전거 바퀴살 모양으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발바닥 모양이 돼있단 말씀입니다. 바퀴살 모양으로 돼있는 부처님의 발의 천복상으로부터서 광명이 나와서 광명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온 우주를 다 비춘단 말입니다. 이렇게 막막한 때에 부처님 같으신 그런 도인들이 계시면 얼마나 우리가 행복스럽겠습니까. 부처님의 발에서부터서 나온 광명도 그와 같이 천지를 비추거니 하물며 부처님의 미간백호眉間白毫라, 부처님의 정기가 모여있는 미간백호에서는 얼마나 찬란스런 광명光明이 비추겠습니까.
그와같이 부처님의 발바닥상, 천복륜千輻輪으로부터 광명이 나와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두루 비추고 있으니까 그때 빈바사라왕이 아주 감격해서 마지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말씀드리기를 "대저 세존께서는 어떠한 공덕이 계셨기에 금생에 나오셔서 그와 같이 그런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해서 중생의 번뇌를 다 비추시고 또 중생의 고해苦海를 다 그렇게 구제하십니까." 이렇게 이제 부처님한테 말씀드렸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 말씀이 내가 과거 인행시因行時에, 내가 과거 보살행을 닦을 때에, 부처님께서 닦으신 기간을 가르켜서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라, 삼아승지겁이라. 삼아승지겁 이것은 여기서 다 해설할 수는 없습니다만 무량세월입니다. 우리 중생의 산수로 해설할 수 없는 그런 무량세월입니다. 이런 세월동안 닦고 닦고 또 닦고 보시布施도 하고 또는 인욕忍辱도 하고 지혜智慧도 닦고 한량없는 육바라밀행六波羅蜜行,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이러한 등등의 그러한 모든 좋은 행을 닦아왔단 말입니다.
헌데(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와같이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에 어떻게 했냐면, 어떤 때는 하나의 주린 범을 위해서, 새끼를 낳고서 먹이가 없이 기아에 헤매는 주린 그런 범을 위해서, 내 스스로 그런 범한테 가서 내 가슴(목)을 작대기로 찔러가지고서 피를 내고, 내 심장을 뽑아내서 보시를 했고 또한 어떤 때는 한 마리의 매한테 쫓겨서 어디로 갈 바를 모르는 비둘기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내 살을 베어주다가 나중에 종당에는 몸땅 내 몸을 바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구차한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저 바다에 가서 바다 속에 있는 마니보주摩尼寶珠 같은 훌륭한 보배를 캐기 위해서 내 옷자락으로 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쪽박으로 바닷물을 그냥 품기도(푸기도) 했고, 샘하나 품기도, 꽤 큰 샘은 두레를 몇 두레는 들어야 합니다. 근데 갖다가 하물며 바닷물을 품는다는 것(퍼내는 것)은,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무진無盡의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바닷물을 품는 것은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헌데 그 중생을 위해서 내 모두를 바치고자 하는 정성, 그런 정성 때문에 바닷물을 품었다(퍼낸다)는 말입니다. 바다 가운데에 무진의 보배가 있다고 그러니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바다 가운데는 용왕이 마니보주摩尼寶珠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마니보주는 일체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보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불성 모양으로 일체 모두를 할 수 있는 그런 보배가 마니보주입니다. 마니보주를 용왕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그것을 얻어서 가난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때는 바닷물을 품는단(퍼낸단) 말입니다. 그 바닷물을 품는(푸는) 정성이, 비록 내 몸똥아리는 내가 금생今生에 못하면 또 내생來生에 품고 내가 몇만 생 몇천 생을 되풀이한다 하더라도 지금 다 품어야(퍼내야) 하겠다, 바닷물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으나 우리 생명은 한계가 없습니다.
이 몸뚱아리는 금생에는 사라진다 하더라도 몇만 생 몇천 생 한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생 만생 다시 태어나서 거듭해서 품는다(퍼낸다) 하면 비록 바닷물이라 하더라도 안 품어질(퍼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바닷물을 품으니까 하늘에 있는 천신天神들이 그때는 감동했다 말입니다. 천신들이 내려와서 그때는 바닷물을 품는단 말입니다. 천신天神들이나 그런 신중神衆들은 우리 사람 수와 같이 이렇게 적지가 않습니다. 몇 십억 몇 백억 몇 천억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천신들이 갖다가 바닷물을 품으니까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딱 가진 용왕도 그때는 겁이 나겠지요. 용왕도 겁이 나고 또는 감탄을 해서 그냥 이렇게 바다 해변으로 나와서 마니보주를 바쳤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중생을 구제도 했고 이와 같이 나는 몇 천 번 몇 만 번 내 몸을 바치고 내가 희생하고 이렇게 해서 내가 공덕을 세우고 더러는 육바라밀六波羅蜜 더러는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 더러는 십선十善이라, 일체계행을 다 지키고 이러한 모든 선행善行을 다한 이런 공덕功德으로 해서 내가 금생에 나와서 내 모양이 이렇게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으로 딱 돼있고 내 발모양 또한 천복륜千輻輪이라, 바퀴살 같은 그런 모양이 되어서 거기서 나오는 광명光明이 천지 우주를 비춘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인과因果를 믿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 불교인들은 바른 신앙,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은 무엇인가? 그러한 부처님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믿고서, 부처님의 공덕을 또 알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부처한테 가기 위한, 부처가 되기 위한, 성불하기 위한 그런 방법을 또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이렇게 많이 모이시면 조금 지리(지루)한 감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같이 나이 먹은 중들은 참무(가만히)있다 하면 허무감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만나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은 것입니다. 앞으로 한 십 년이나 지나면 저 같은 사람은 금생에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좀 지리하시지만은 말을 좀 더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배가 고프시더라도 참으시고서 조금 (더)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본질, 우리 본 바탕이 이것이 불성佛性이고, 우주만유의 본질도 역시 부처인데, 그러한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이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오고 또는 부처님 법문이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배 아프면 배 아픈만치 머리 아프면 머리 아픈만치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말씀한 법문이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우리 신앙대상을 표현하는 그런 말로 해서 더러는 아미타불阿彌陀佛, 더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더러는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지금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만 해도 삼천불三千佛이라, 삼천불이라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 있습니다. 삼천불 이름을 다 적은 경전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 주여'하고 하느님만 믿으면 그때는 신앙대상이 하나뿐이니까 간단명료하지만 우리 불교는 그냥 아까 말씀마따나 지장보살, 약사여래, 또는 무슨 부처님 이와 같이 부처님이나 보살 이름이 굉장히 많아놔서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가장 좋을 것인가? 아까 말씀마따나 교리가 복잡하고 광대한 것이 한편은 좋아도 너무 교리가 많으면 또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골수骨髓를 잘 못 추린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기우杞憂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부처님은 원융무애圓融無碍라.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만, 원융무애라는 것은 저 일본에 있는 물이나 우리 한국의 걸(개울)에 있는 물이나 그 물이 똑같이 조금도 그것이 차이없이 하나의 물이듯이 갑한테 있는 불성佛性이나 을한테 있는 불성이나 개한테 있는 불성이나 또는 하나의 돌멩이를 구성하는 불성이나 불성佛性은 다 똑같은 종류의 불성입니다. 헌데 그러한 원융무애한 하나의 무한無限의 공덕功德을 갖춘, 불성을 우선 전체적으로 가장 많이 총체적으로 표현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 그럽니다.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이라 말입니다. 백천만의 불호佛號가 있다 하더라도 통틀어서 표현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 그럽니다.
그러한 똑같은 부처님을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고 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 그럽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불을 떠나서 저만치 어디가서 따로 그런 여성적인 어머니같은 모양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융圓融한 부처님, 일체의 공덕를 다 갖춘 하나의 부처님 그러한 부처님을 전체적인 면에서 본다 할 때는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그럽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 할 때는 자비로운 방면에서 본다 할 때는 그때는 관세음보살님 그럽니다. 지혜로운 면에서 본다 할 때는 그때는 문수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그럽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그러한 하나의 원융한 부처님을,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이끌어서, 우리가 죽어지면 몸은 다한다 하더라도 우리 업식業識, 우리 식識은 남습니다. 우리 마음은 남습니다. 그러한 우리 업식業識을 인도해서, 우리 본고향인 불성佛性이 빛나는 빛나는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그러한 면에서 본다 할 때는 그때는 지장보살이고, 또는 인로왕보살입니다.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나 우리 중생의 고해苦海를 제도하는 그런 면에서 본다 할 때는 그때는 약사여래입니다. 따로따로 따로따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으로 이렇게 차별이 있지만 부처님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불성佛性 그것은 차별이 없습니다. 무차별의 평등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어느 면에서 보는 것인가? 자비로운 면에서 볼 것인가? 또는 지혜로운 면에서 볼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부처님의 이름이 결정됩니다. 지혜로운 면에서 본다 할 때는 문수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 할 때는 관세음보살 또는 보현보살, 전체 통틀어서 본다 할 때는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하나의 원융한 부처님이나, 그때 그때 공덕 따라서 삼천불三千佛뿐만이 아니라 몇 천만의 부처님도 그때 이름을 우리가 붙일 수가 있습니다.
허나 여기서 우리 불자가 생각할 점은 무엇인고 하면, 그러한 부처님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어려운 말로 해서 능소능대能小能大합니다. 어떠한 때는 필요가 있으면 필요가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몇 천만의 모양도 나툴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현대 과학을 배운 사람들은 부처님의 신비로운 지혜를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허나 부처님의 지혜는 광대무변廣大無邊에서 아까 말씀마따나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 갖추고 있어놔서, 어떤때 필요하면 몇 천만의 모양도 나투어서 우리 중생한테 현신現身해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부처님 몸은 우주에 꽉 차버립니다. 작은 때는 조그마한 바늘구멍에도 부처님은 계십니다. 작은 몸으로 큰 몸으로, 큰 몸일 때는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 딱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본성本性이 불성佛性이고, 우주의 본성이 부처거니, 불성이거니 가장 적극적으로 가장 똑바로 직설로 표현하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의 한 덩어리입니다. 이것이.
지금 앞에 있는 광명변조光明徧照라, 광명변조 이것은 부처님 이름으로 하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이라는 인도 음音의 부처님을 우리 뜻으로 보내서 그때는 광명변조입니다. 광명변조불光明徧照佛이라, 광명이 천지 우주에 들어있는 부처란 말입니다. 인도 말로 하면 비로자나불인 것이고 또는 줄여서 말하면 그때는 법신불法身佛인 것이고 말입니다. 헌데 그와 같이 천지 우주가 바로,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말로 대일여래大日如來라, 광명光明이 끝도 갓도 없이 조그마한 태양같은 그런 해가 아니라, 대일大日이라. 큰 대大자 날 일日자 대일이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하나의 광명체가 된 그러한 부처란 말입니다. 대일여래라.
이와 같이 우리는 부처님을 능소능대能小能大라, 어떤 적은 가운데도 부처님은 다 계시는 것이고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부처님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똑바로 믿어야 만이 우리가 이제 성불을 하고자 해서 섣부른 욕심도 안 내고, 바로 바른 수행修行, 바른 계행戒行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이러한 불성을 위해서 참 자기를 위해서는 이까짓 몸뚱아리 천만 개를 그때는 희생시켜도 조금도 아깝지 않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부처님의 이름, 이름이 비록 하나의 원융圓融한 부처님인데, 그때그때 공덕功德 따라서 아미타불 또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그와 같이 이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러나 그건 원융무애圓融無碍라, 간극이나 어떠한 차별이 없이 혼연일체渾然一體라. 마치 이 방안에다가 등을 열 개를 키우면 등불도 광명 이것이 갖다가 이런 광명, 이런 광명 차이가 그렇게 있지 않습니다. 비록 열 개를 등을 키운다 하더라도 등불 그 광명은 똑같이 하나가 딱 혼화混和가 되어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불성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한테 가 있으나 석가님한테 가 있으나 나한테 가 있으나, 누구한테 있으나 그때는 원융한 똑같은 부처님입니다.
각 도인들이나 그런 성인들은 모두가 다 그러한 불성佛性 자기 본질, 그러한 것을 우리가 찾고자 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소중한 보배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삼보三寶라 말입니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아닙니까? 부처님 불성佛性이 바로 불보佛寶요. 부처님의 가르침 그것이 법보法寶요 말입니다. 가르침 따라서 수행하는 그분들이 그것이 승보僧寶요 말입니다. 세상에 보배가 많이 있지만 이러한 삼보三寶 즉 불보, 법보, 승보 이러한 보배같이 소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불성佛性을 찾고자 해서 모두 무진無盡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아무리 불성佛性이 좋고 위대하다 하더라도 불성을 찾는 그런 작업, 우리 수행修行이 미흡하면, 불성은 남의 것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불성을 못 찾고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우리는 수용을 못 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불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빠르게 찾을 것인가? 즉, 말하자면 우리 현대사회, 이 산업사회, 바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그러한 쉬운 방법을 몇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지리(지루)하시더라도 조금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성불의 방법으로 해서 가만히 그저 묵묵부답으로 그저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있고자 해서 하는 방법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과거 숙세宿世로 지어내려오는 그런 전생前生의 무수한 번뇌(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가 있고, 또는 금생의 번뇌가 있고, 금생에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하고 이런 번뇌(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가 있고, 이러한 번뇌 때문에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성불을 할려고 그러면 그때는 불성佛性이 우리 마음에 좀체로 빛나오지 않습니다. 자꾸만 업장에 그때는 가려서 불성까지 우리가 못 가고 맙니다.
이러한 데서 불성을 찾는 그런 방편方便으로 해서 화두話頭가 생겼지요. 보통 1,700 공안公案 그래서 1,700가지의 화두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이 다 요체要諦는 근본 뜻은 우리한테 있는 불성佛性을 캐는 방편에 불과합니다. '이뭣고'라는 그런 화두라든가 또는 '무無'자라는 그런 '무無'란 화두라든가 또는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판치생모板齒生毛) 그런 화두라든가, 그런 모든 훌륭한 화두가 있습니다마는 모두가 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본 바탕인 그런 불성佛性을 찾고자 하는 방편에 불과합니다. 원래 불성佛性은 이름名도 없고, 모양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심광心光 마음 심心자 빛 광光자, 심광이 천지 우주에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그런 광명光明은 우리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그런 광명입니다. 즉,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무량광불이라. 지금 어떠한 화두라 하더라도 다만 화두는 지금 보통 통용돼 있는 1,700가지의 공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 어떤 것이나 우리 공부하는데 빌려쓰고 우리가 분명히 우리 자성自性, 우리 불성佛性만 찾으면 또 화두가 됩니다.
한도 끝도 없이 화두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주신 화두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이제 우리 불자님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그런 도인들이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이것이 염불공안念佛公案입니다. 가장 쉬운 가장 쉬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것은 부처님께서 주신 화두입니다. 도인들이 많이 계셔서 우리가 가서 무슨 화두를 주십시오 하면 그분들이 우리 근기根機에 딱 맞추어서 화두를 턱 주시면 몰라도, 그런 도인들이 많이 계시지 않는 경우는 가장 보편타당한 화두, 부처님께서 모든 경전經典에서 말씀하셨고, 또는 부처님 뒤에도 역시 모든 도인들, 우리 한국도 (신라 때는) 원효元曉, 의상義湘 또는 자장慈藏, 또는 고려 때는 보조국사普照國師 또는 진각국사眞覺國師 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또는 태고스님太古普愚 또는 나옹화상懶翁和尙, 이조 때는 무학대사無學大師 또는 기화(함허)득통대사己和得通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진묵대사震默大師, 또는 사명당四溟堂, 근래 와서는 연담蓮潭有一 또는 번내藩內(문하)의 그런 스님들(초의선사 등) 그런 스님들이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모두가 다 찬탄하고 참구한 그런 화두가 이것이 염불화두念佛話頭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부처님의 이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화두 가운데 부처님의 이름을 똑바로 바로 되는 화두같이 더 높은 화두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제가 조금 어폐가 있는 말씀입니다. 화두에는 원래 고하高下는 없습니다. 높고 낮은 것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부처님께서 금구친설金口親說로 부처님의 그런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님의 언어로 직접 말씀하시고, 또는 각 도인들이 가장 많이 했고 이러한 화두가 이것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부처님을 우리 법신法身부처님, 우리 불성佛性을 총체를 표현할 때는 아미타불인 것이고, 거기다가 우리가 귀의歸依한다는 귀명歸命한다는 뜻으로 해서 나무南無를 거기다 보태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또는 관세음보살, 부처님을 자비로운 면에서 본다고 할때에 일반 중생을 자비로 구제하는 그러면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경經에 보면 관음觀音 33신身이라, 또는 관음觀音 32신應身이나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다 근원적으로 해석할 때는 천지 우주가 전부 다 관음화신觀音化身입니다. 우리 역시 관음화신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하늘의 별이나 천차만별千差萬別의 현상 이대로 관음화신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산이나 냇이나 돌이나 어떤 것이나 물이나 흙이나 또는 하나의 중성자나 또는 원자핵이나 모두가 다 본질은 불성佛性입니다. 어떤 것이나 불성 아님이 없기 때문에 본질은, 따라서 불성에서 이루어진 현상들은 똑같이 그때는 부처님입니다. 다만 인연因緣 따라서 그러한 불성을 느끼고 더 느끼고 보다 더 많이 느끼고 적게 느끼고 그런 차이 뿐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부처님 말씀에 염불행자念佛行者 인중분다리화人中芬陀利華라.<若念佛者 當知此人 則 是人中分陀利華>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분다리화라, 분다리화는 가장 고귀한 꽃보고 분다리화라고 합니다. 분다리화라. 향기나 또는 여러 가지 그런 꽃의 아름다움이나 가장 고귀한 꽃 보고 분다리화 그럽니다. 헌데 염불행자 인중人中, 사람 인人자 가운데 중中자, 염불 행行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분다리화라, 가장 향기롭고 고귀한 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혹시 또 여러 불자님들께서 오해를 하실까 봐서 제가 부언해서 더 말씀을 드립니다만 염불念佛 그러면 꼭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그것만이 염불이 아닙니다. 비록 이뭣고, 이뭣고 한다 하더라도 역시 이뭣고 거기다가 불성佛性을 분명히 의미한다고 하면 그때는 염불입니다.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는 그런 화두(판치생모板齒生毛)를 든다 하더라도 거기다가 불성佛性이라 하는 우리 본성本性을 분명히 의미한다고 하면 그때는 그도 역시 염불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원래 광대무변廣大無邊하고 한도 끝도 없어놔서 어떻게 말하나 간에 우리 의미 부여가 불성을 분명히 부여한다고 하면 '이뭣고'를 하나 '무無'자를 하나 그도 똑같은 염불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이 순간찰나도 불성佛性에서 안 떠나는 그런 마음 자세 이것이 즉 염불입니다. 이렇게 하면 염불念佛인 동시에 그때는 참선參禪입니다.
지금 더러는 참선은 저만큼 지혜도 높은 사람들이 하고 있고, 염불은 그냥 지혜도 별로 안 높고 일반 대중들, 일반 무식대중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만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든 간에 부르는 건 상관이 없이 다만 우리 마음이 우리 본 바탕인 불성佛性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안 여의면은 비록 하느님을 (불러도) 그때는 무방합니다. 그때그때 연緣(인연)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하시고 싶은 분들은 관세음보살을 하시면서 우리 불심佛心을 안 여의고, 또는 무無자 하시는 분들은 무無자를 하시면서 불심佛心을 안 여읜단 말입니다.
헌데(그런데) 가장 고약한 문제가,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것이 불성佛性인가? 불성을 본다고 하시니깐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안 보이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을 안 여읜다는 불성을 안 떠나는 그 문제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서 안 떠나는 것인가? 누구나가 불자는 다 불성을 안 떠나고 싶지요. 불성을 안 떠나는 최선의 방편方便, 방편이 그것이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이라. 오늘 만등불사는 그러한 의미의 가장 큰 의미는 무량광無量光입니다. 무량광! 즉, 무량광명無量光明,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은 도인들이 그런 심광心光으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심광, 마음의 빛, 천지 우주를 감싸고 충만해 있는 무량광無量光, 다시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면 천지 우주는 무량광뿐입니다. 무량광으로 천지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산이요, 냇이요, 또는 어둠이 있고 또는 그림자가 있지만은 바로 본다 그러면은 바로 보면은 천지 우주는 바로 무량광명無量光明입니다.
천지 우주는 고故로 바로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라,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다만 중생이 업장業障에 어두워서 미처 비추어 못 볼 뿐입니다. 이러한 무량광명無量光明을 상상하면서, 상상하면서 우리가 이제 염불도 하고 우리가 한단 말입니다. '무無 '자도 역시 무無 무無 하면서 무량광명을 상상을 고렇게 하고, 아미타불 또는 무량광명을, 아미타불이란 그 의미가 바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가장 실은 적합한 셈이지요. 아미타불 이것이 무량광명을 끝도 갓도 없는 그런 허공세계虛空世界, 광명이 신비로운, 우리가 보통 상대 유한적인 불교 말로 하면 유위법有爲法적인 그런 광명이 아니라, 청정심광淸淨心光이라, 그런 광명을 생각하면서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무량광명을 생각하면서 하는 공부, 이러한 공부를 하면 불교 말로 해서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서 말입니다. 우리 공부는 원래 우리 불성佛性 가운데서 정定이나 혜慧나 일체지혜를 갖추어 있어놔서, 우리 공부하는 방법 역시 원래 불성의 성질과 똑같이 해야만이 빨라집니다. 지혜智慧나 자비慈悲나 그런 선정禪定이나 그런 것을 이렇게 갖추어서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아까 말씀마따나 근본체성根本體性인 무량광명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염불도 하고 또는 화두도 우리가 외인다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물론 염불도 화두입니다.
우리가 원래 부처인지라, 우리 본성本性이 원래 부처인지라. 비록 우리 죄장罪障이 무거워서, 천만생千萬生을 우리가 뱅뱅 돌아서 윤회할 수 있는 그런 죄가 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가 우리 본성을 안 떠나고, 우리 불성인 본성을 안 떠나고서 자꾸만 부처님을 생각하고, 외이고 외이고 한다고 그러면 어려운 말로 하면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서 딴 생각이 딴 잡스러운 생각이 끼지 않도록까지 한다고 그러면 그때는 걸음걸음 우리는 차근차근 불성한테로 가까워집니다.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그때는 그냥 딱 망상이 다 끊어져 버려서 그때는 무념처라, 망상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버리면 그때는 우리는 우리 본성本性인 불성佛性하고 하나가 딱 되는 것입니다. 약인일념칭명호若人一念稱名號 경각원성무량공頃刻圓成無量功이라.<장엄염불莊嚴念佛> 사람이 만약에 부처님 이름이나 그런 화두를 안 쉬고 자꾸만 외이고 외이고 이렇게 참구參究하다 보면, 찰나 동안에 그냥 우리 본성이 부처인지라, 부처가 딱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불자가 가는 길이고 또는 아까 말씀마따나 불교는 철학이요, 과학이요, 종교요. 일체의 모든 문화가 다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가르침인지라,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이나 어떤 과학이나 다 종당에는 이와 같이 성불成佛의 길로 다 들어와야 합니다.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전생前生에 선업善業을 많이 짓고, 또는 금생今生에도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 모든 종교, 많은 종교 가운데서 하필이면 불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되고 개 되고 소 되고 우리가 몇만 생 동안 빙빙 돌다가 금생에 다행히 사람 되고, 사람 되서도 45억이라는 되는 우리 인촌人村 가운데서 다행히 불교인이 되었습니다.
불교인이 되었으면 가장 큰 일이 무엇인가? 가장 큰 일이 역시 아까 말씀마따나 나의 본성인 불성佛性을 우리가 계발啓發하는 일입니다.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오늘 만등불사는 우리가 그냥 등 하나 키우고 우리 자손의 복이나 빌고 재수나 (운수)대통을 바라고 이러한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시냇물이 탁수濁水가 되면 시냇물을 다스릴라면, 먼저 상류부터서 딱 청원淸源하니(맑은 근원에서) 거기서 흙덩어리나 황토층이나 그런 것이 안 내려와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조그마한 이익이나 우리 행복이나 어떤 운수運數나 그런 것을 설사 바란다 하더라도 그러한 우리 운명運命의 가장 행복스러운 가장 근원이 무엇인가? 그건 역시 우리 마음이지요. 지금 사회에서 의식개혁 운동을 합니다마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무슨 제도를 잘 다스리고, 또는 어떠한 완벽된 그러한 규칙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을 행사하는,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 마음이 사람 의식이 정화淨化가 못 되면 그 사회는 정화가 못 됩니다.
달마스님 말씀에 약능료심若能了心 하면은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사람이 마음의 본성을 안다고 하면 만행萬行이 구비具備라. 만가지가 다 그때는 절로 갖춰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만등불사를 기해서 비단 지엽적인 가지나 이파리나 그런 행복이 아니라,가장 근원적인 영생의 행복 그러한 행복을 위원爲願(행하고 기원)하는 그러한 자세에서 우리 가슴에 붙어있는 무량광불無量光佛, 내 본성인 광불光佛,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런 광불 그러한 광명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는 그런 무량광불인, 그러한 대명사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러한 근원적인 광명, 근원적인 행복의 요인을 한시(잠시) 순간도 오만(오로지) 꼭 그 자기 본성인 그런 불성佛性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이런 것을 놓치지 말고서 등불을 키울 때나 안 키울 때나 간직하시면서 그렇게 하시면, 비록 자기 아들이나 딸이나 자기 친척을 자기 집에다 이렇게 두고 자기 혼자만 왔다 하더라도 역시 무량광명無量光明이란 그 광명 이것은 원래 성性(성품)이라놔서, 원융무애圓融無碍라놔서, 우리 광명이, 생각하는 우리 광명이 우리 집안을 다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 행복을 위한 최선의 길은 역시 우리가 우리 마음을 부처님 생각, 무량광명無量光明을 생각하면서 무량광명은 이것은 물리적 표현인 것이고, 부처님은 이것은 인격입니다. 모든 지혜공덕智慧功德을 다 갖추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오늘 등을 들고서 유의留意있게, 우리 근원적인 행복을 더욱더 북돋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산승山僧의 법문을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19831022 청화큰스님 지리산 백장암 만등불사 법문
영상법문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X-oAE_9HOHw

첫댓글 큰스님의 초기 대중법회 법문으로 1983년 지리산 백장암 만등불사 법문입니다. 보배로운 큰스님 말씀으로 전체법문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큰스님 말씀 그대로 정리하였습니다.
일부 말씀을 올린 후 전체영상법문은 이번주 후반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수고 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