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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해남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대흥사(大興寺)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위치한 두륜산 도립공원 내의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불린다.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에 따르면 신라의 승려였던 정관(淨觀)이 서기 426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죽미기》(竹迷記)에는 544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을 자장과 도선(道詵)이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대흥사는 고려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서,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 역할을 한 사찰이다.
경내에는 국보 제308호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국가지정문화재 7점과 시도지정문화재 6점, 그리고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부도와 비석들이 소재한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1975년 9월 2일 명승 제4호 '해남 대둔산'으로 지정되었다가 1998년 12월 23일 사적 및 명승 제9호 '해남 대둔산 대흥사 일원'으로 재분류되었다.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이 절의 기원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重創)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1604년(선조 37)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 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3년에는 불탄 천불전(千佛殿:지방유형문화재 48)이 재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抑佛)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의심(義諶)․삼우(三遇)․도안(道安)․문신(文信)․추붕(秋鵬) 등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백설당(白雪堂)․천불전․용화당(龍華堂)․도서각(圖書閣)․표충사․서원․서산대사기념관․대광명전(大光明殿)․만일암 등 기타 많은 당우(堂宇)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전(應眞殿前) 3층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석탑,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등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를 비롯한 여러 명승의 부도(浮屠)와 탑이 있으며, 특히 서산대사의 유물과 이광사(李匡師)․김정희(金正喜)․이삼만(李三晩) 등 역대 명필들의 필적으로 된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 대흥사의 유물 . 유적들
1.대흥사 응진전전 삼층석탑 (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 대흥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0호로 지정되었다. 응진전(應眞殿) 앞에 토담이 둘려진 곳에 세워진 이 석탑은 넉 장의 돌로 짠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下臺)와 중석(中石)을 붙여서 넉 장의 장석(長石)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을 구성하였으며, 중석에는 네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2주씩을 각 면에 모각(模刻)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모두 1석(石)으로 되어 있으며, 초층(初層) 탑신에는 네 우주가 있고, 2층 탑신은 그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든 데 비하여 넓이는 그다지 줄지 않은 점이 주목된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 등이 남아 있고, 노반은 4층 탑신으로 잘못 알 정도로 크며, 앙화는 8각형의 꽃송이를 세우고 작은 화형(花形)을 배치하여 횡대(橫帶)를 돌린 점이 특이하다.
1967년 해체․보수할 때 상층기단 안의 자연판석 위에서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가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안치수법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연곡사(谷寺) 3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다.
2.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大興寺北彌勒庵三層石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 대흥사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의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에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에 조성된 석탑이다. 조성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2중기단 위의 3층석탑으로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기단은 지대석(地臺石) 위의 하대석과 중석(中石)을 1석(石)으로 하여 4장의 긴 돌로 짰고, 그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있다. 갑석(甲石)도 4장으로 구성하였고 상층기단 중석은 1장의 돌이고, 상층기단 갑석은 1석으로 밑에는 부연이 있으며, 중앙에 1단의 괴임돌이 있어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각각 한 장인데, 탑신부의 1~3층은 위로 갈수록 체감되어 있고, 각기 4개의 우주를 갖추고 있다. 다소 넓은 옥개석은 받침이 1․2층은 4단, 3층은 3단이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이 남아 있고 다시 노반형과 앙화형(仰花形)의 석재가 놓여 있다. 이와 같이 비교적 반듯하고 전형화된 석탑이 남쪽지방에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3. 탑산사 동종 (塔山寺銅鐘) :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大興寺)에 있는 고려 후기의 종.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79cm, 입지름 43cm이다. 정부(頂部)에는 용통(甬筒)과 용뉴(龍)가 있으며 용통에는 마디마다 무늬가 양각되고, 이를 등지고 있는 용두(龍頭)는 매우 선명하게 조각되었다. 종견(鐘肩)에는 연판(蓮瓣)을 돌려세웠고, 그 밑 상하에 주문대(珠文帶)가 있는 견대(肩帶)가 있어 그 안에 당초문(唐草紋)이 양주(陽鑄)되었다.
종신 하부에는 복판연화(複瓣蓮花)로 된 당좌(撞座)가 네 곳에 배치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보아 선이 아름답고 조루(彫鏤) 또한 수려하여 고려시대 동종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종신 보살상 밑에 새겨진 “塔山寺火香徒上玄智…”로 시작되는 명문으로 보아 탑산사에 있던 동종임을 알 수 있으며, 그 후 해남읍의 일본 헌병수비대, 만일암(晩日庵) 등을 전전하다가 대흥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4. 대둔사지 ; 전남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대흥사(大興寺)의 창건 역사와 사적 등을 기록한 책.
목활자본. 4권 1책. 윤우(倫佑) ․혜장(惠藏) ․의순(意恂) 등 승려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이 편집하고, 시오(始悟) ․자홍(慈弘) 등의 교정을 거쳐 1823년(순조 23)에 간행되었다. 이 중 권4에는 ꡐ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ꡑ라는 제명이 붙어 있는데, 윤동(尹)이 쓴 발문에서 이 권을 자하산방(紫霞山房)에 머물러 있던 다산의 편집임을 밝히고 있다. 이 사지는 그때까지의 대흥사 관련 기록이 있는 《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 《북암기(北庵記)》와 《죽미기(竹迷記)》 등에서 종합 발췌하여 엮어낸 가장 신빙성이 있고 상세한 사지이다.
이 책은 아도(阿道)가 세웠다는 옛 기록의 부실성을 논박, 신라 말에 창건된 것임을 주장하고, 조선 중기에 휴정(休靜)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장 ․발전된 사실을 논증하여 휴정과 관련이 깊은 것을 중시하고 있다. 아울러 휴정 이후로 배출한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의 행상(行狀)과 그들의 사상을 기술한 약전(略傳)도 수록하였다. 당우(堂宇)는 남 ․북원(南北院)으로 크게 나누어졌었던 모양인데, 북원의 24개, 남원의 12개 건물의 명칭과 중수자의 이름까지 상세히 조사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만일암 등 18개 부속암자의 위치 ․창건연대 등도 적고 있다.
5.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
대흥사서산대사부도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구비한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부도의 전체 높이는 2.7m이다. 인근에는 서산대사부도의 탑비가 있는데, 귀부·비신·이수를 구비하고 있다. 그렇지만, 귀부 상면에 배치된 비공(碑空)이 장방형임에 반해 비신 및 이수는 방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원형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1647년(조선 인조 25)에 건립되었다.이처럼 탑비가 1647년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중대석과 상대석의 동물장식,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과 상륜부의 장엄이 주목된다.
이 부도는 임진왜란시 승병활동으로 알려진 서산대사의 부도라는 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특수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첫째,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 부등변팔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옥개석에 표현된 기와골, 내림마루, 암·수막새기와, 겹처마 등의 목조건축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같은 양식의 부도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둘째, 중대석 및 상대석에 표현된 각종 동물상의 표현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볼 때 중대석에는 주로 팔부신중 및 공양상이 부조되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모각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의 중대석 네 면에는 화문이, 나머지 면에는 각각 동물을 양각했는데, 아마도 사자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대석에도 통식의 연화문과 함께 거북과 연꽃·게를 양각했는데, 이같은 조형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일례이다. 특히 게와 조개로도 볼 수 있는 연화문이 표현된 것은 바다가 가깝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조형물에 표현된 것이다. 셋째,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두(龍頭)이다.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옥개석 전각에는 귀꽃이 배치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에서는 1면에는 추정 다람쥐를 나머지 7면에는 용두(龍頭)가 표현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각에 용두가 배치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구도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교리적인 배경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완전한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부도의 상륜부는 통식의 부도와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방형과 원형의 조화를 통해 안정감을 유지했고, 특히 매우 사실적인 용을 조각함으로써 다른 부도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다. 다섯째, 서산대사가 입적한(1647년 1월) 해에 탑비가 건립된 점으로 보아 부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서도 가장 선두에 놓일 수 있는 예가 확인됨으로써 이 시기 석조부도 연구에 또 하나의 자료를 보태주고 있다. 더욱이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곡사서부도(1650년) 보다 양식적으로 우수한 면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어 이 계통의 부도는 9세기 중반에 건립된 이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건립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산대사부도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부에 표현된 다양한 조식은 다른 부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수한 일면을 지니고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