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서울시청역에서 내리면 서울광장 맞은 편에 서있으니 찾기도 쉽고 들어가기도 쉽다. 예전 모습으로 군사복을 갖춰입은 수문장이 서 있기는 하지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아 들어가기도 쉬울 뿐 아니라 그다지 넓지 않아 약속시간이 어중되게 남아 있다거나 근처의 호텔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진들과 혹은 친구들과 못내 헤어지기가 아쉽다면 들어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덕수궁이다.
하지만 이 덕수궁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볼 곳은 아니다. 조선 60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시기인 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의 궁궐이었는데, 첫 번째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략을 피해 의주까지 피신했던 선조가 1년 후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불에 타 없어진 궁궐 대신, ‘정릉동 행궁’으로 삼아 정무를 봤던 곳이고, 두 번째는 경복궁에서 일어난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갔던 고종이 이곳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던 곳이다.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웠던 절체절명의 시기에 국난극복을 위해 힘쓰던 가슴 아픈 현장인 것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경운궁의 침전이었던, 아름다운 이층집 석어당에서 ‘계축일기’를 읽고자 한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중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이 작품은 인목왕후를 모시던 궁녀가 썼다고 전하기도 하고 그 문체로 보아 인목왕후 자신이 썼다고도 하는 작품인데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대비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당쟁이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계축년(1613년)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며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폐비가 되어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내용의 궁중비사인 것이다. 궁중의 풍속이나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고 순우리말을 구사했으며 중후하고 아름다운 궁중어와 문체를 남겨서 옛말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석어당’은 글자 그대로 ‘옛날 임금이 계시던 집’이란 편액을 달고 단청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조용히 앉아 있다. 이 건물이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를, 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돌아와서 임시로 사용했을 때는 궁궐이 아니라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단청이 없었을 것이고, 1904년 경운궁 대화재 후 다시 지으면서도 그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고자 단청을 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비켜달라는 핑계로 이 땅을 내디딘 왜군들의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선조는 노심초사했을 터이니 정유재란까지 7년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왕의 심신은 병약했다고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의인 허준은 침통과 탕재를 들고 이 침전에 수시로 드나들었을 것이나, 선조는 찹쌀밥을 드신 후 기가 막혀 1608년 2월 1일 57세로 이곳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즉위를 한다.
즉위 후 광해군은 이곳 임시궁궐을 ‘경운궁’이라 이름 붙여 주고, 새로운 궁궐 창덕궁을 지어 옮겨갔기에 왕이 계시지 않는 궁궐이 되었다. 하지만 모후이자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를 모시고 가지않고 석어당에 유폐시켜 버린다. 안팎의 담을 더 높이 쌓고 가시덤불을 담 위에 얹고 문에는 첩을 박고 축대 밖으로 담을 쌓았다고 계축일기에는 적어 놓고 있다.
‘상이 돌아가셨는데 슬픈 빛이라곤 찾을래야 없어 상복 임에도 태연히 웃으니 보기에 민망하더라’
‘공사 처리를 하도 못하여 단 한 장의 문서도 친히 결재를 못내시는 형편이더라’
'천성이 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고 포악함이 심하더라 '......
근간의 평가와는 달리, 일관되게 광해군의 포악함과 무능했음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계축일기의, ‘침전으로 쓰던 곳 다락집의 높은곳에 올라 돈의문 밖으로 끌려나가는 영창대군을 바라보며 곡기를 끊으시고 계축년 (1613)부터 3년 간은 콩가루를 꿀물에 탄 것을 하루 한 번씩만 잡수시며 밤낮 애곡하시더라’라는 구절을 통해 당시에도 다락집의 형태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축일기는 또 말한다.
‘생활은 또 얼마나 참혹했는지 옛집이라 두루 새어서 비오 때면 몸 둘곳이 없어 하도 민망하여새는 데를 이어 고쳐 달라고 빌되 듣지 아니하라’
'나인들이 신을 것이 없어 헌옷을 뜯어 노끈을 꼬아 짚신처럼 만들기도 하고, 헌신을 뜯어 신는 것을 기워 신으나 헤퍼 견디지 못하여 화살촉을 빼내어 송곳을 만들어 짚신 짓기를 시작하더라’
‘궁중에 더럽고 지저분한 물건을 한데 모아 두라고 하시니 쳐내지 못해 두어 해가 지나니 악취가 방안에 가득하고 구더기가 생겨서 방안과 밥 지어 먹는 솥 위에 기어올라 아무리 씻어 내어도 없어지지 않더라’
‘씨 뿌리지 않은 나물이 침실 앞뜰에 가지가지 나니 기특히 여겨 가꾸어 뜯어 삶아 먹으니 향기롭고 맛이 좋거늘 모두 먹었더니 꿈에 사람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물을 얻어먹지 못해 하기에 이 나물을 주노라 하더란다’
이렇듯 우여곡절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인조반정 이후 복위가 된 인목대비의 이야기는,
‘만력 임인년(1602)에 중전이 아기를 잉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가(광해군장인 유자신)가 중전으로 하여금 낙태하실 일을 하려고 놀라시게 하되, 궐내에 팔매질도 하고 액정 사람을 사귀어 내인의 측간에 구멍을 뚫고 나무로 쑤시며 여염처에 명화강도났다 소문내니, 이 때에 궁중에서도 유가를 의심하더라’ 라고 시작되어
‘계축년부터 겪던 서러운 일이며 상시 내관 보내어 저해하고 꾸짖던 일이며, 박대 부도 불효의 일들을 이루 기록하지 못하여 만 분의 한 마디나 기록하노라… 나인들이 잠깐 기록하노라’ 로 끝을 맺는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인목대비에게 어보를 받기 위해 창덕궁에서 말을 타고 경운궁에 달려오는 동안 그 뒤에는 광해군이 끌려왔고, 석어당 마당에서 36가지의 죄를 물어 유배 보낸 뒤, 정전인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인목왕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간 후 270여 년간 빈 궁궐이 된다. 그 후 고종대에 들어 다시 새로운 나라 대한제국의 궁궐이 된 곳이 본래의 이름이 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이다.
'경운궁'이란 이름 대신에 ‘덕수궁’이란 이름을 얻은 사연도 알아 보면서 천천히 둘러보자.
특히 고즈녁하게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석어당의 앞뒤를 둘러보며 선조와 광해군 인목왕후 인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자.
첫댓글 소설 같은 역사는 곱씹을수록 맛있다. 달고 쓰고 맵고 역겹고 음식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