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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수필의 표정과 기질(2010. 수필학 18호) - 오차숙
1. 아방가르드의 표정&기질이 있는 수필-수필학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그 무대 위에서 맡은 시간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그 시간만 지나면 잊혀지고 마는 가엾은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 맥베스(Macbeth)5막 5장
맥베스의 전개처럼 사람의 삶은 유한하면서도 난해하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덧 삶의 종말까지도 채색하며 읊조리고 있는 장면들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세상의 무대 위에 짧게 머무르는 인생을 배우로 설정하며 연극너머 보여 지고 있는 그림자의 파노라마가 처연하게 스쳐간다. 그래서인지 ‘현대예술’이라는 이름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갈증을 느끼는지, 갈수록 난해하다.
근대 이전에는 테크네(techn)가 기교의 문제로, 뮤지케(Musike)는 영감의 문제로 각기 대조를 이루는 가운데 이어져 왔다. 근대예술이 자리를 잡을 무렵까지 크게 두 갈래의 유파로 나타났다.
그것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였다. 신고전주의는 엄격한 규칙과 그에 따른 기교를 중시하는 반면, 낭만주의는 영감에 의한 신비와 광기, 열정을 중요시 했다. 음악에서는 바흐에서 모차르트까지 고전주의 음악인 반면, 베에토벤에서 브람스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 음악이다. 그림에서도 다비드(David, 1748-1825)에서 앵그르(Ingres, 1780-1867)까지 신고전주의 미술, 고야(Goya, 1746-1828)에서 들라크루아(Delacroix, 1798-1863)까지가 낭만주의 미술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가 유럽의 예술을 지배하고 있을 때 신고전주의는 프랑스 미술을 대표한 - ‘프랑스 미술아카데미 전범이 되었다. 그때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들이 가르치는 기법을 전수받는 데 몰두했고, 그 기법을 잘 전수 받게 되면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는 표현해야 하는 내용이 대부분 정해져 있어, 무엇을 그리든지 그리는 절차와 기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었다.
그 결과 신고전주의는 그림의 분위기가 대부분 비슷했다. 그 특징도 그림 전체 분위기가 안정되어 있어야만 했고 묘사도 깔끔해야만 했다.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채색을 하거나 흐트러짐을 보이는 것은 금물이었던 것이다.
신고전주의와 대결했던 낭만주의 예술은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제에서부터 광기와 일탈이 주를 이루었고, 격렬한 감정과 충동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도록 붉은 색이나 노란 색을 많이 쓰며 색조의 대비를 최대한 강조했다.(예술개념, 움직이는 미로, 조광제).
낭만주의 그림은 신고전주의 그림보다 훨씬 감각적, 관능적, 충동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야수파 화가 세잔(1839-1906)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 현대예술이 탄생한 지 100여 년이 흘러갔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분명히 예술의 본질이 소통에 있었지만, 근대예술과 현대예술은 이 소통을 거부하고 있음이 강하게 나타났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온 후 회화 자체도 그 대상성을 잃었고, 음악 또한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詩)에서조차 그 의미가 파괴되고, 연극까지도 그 자체가 부조리 해졌다고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말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볼 때 수필 역시 제 자리 걸음, 그 보다 오히려 퇴보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선인 수필가들은 작품다운 작품을 써 왔다고 하지만 무엇이든 정체된 것은 죽음 그 자체라서 시대적인 면, 의식적인 면으로 볼 때 하루 속히 변화가 필요, 수필문학도 다시 정비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신변잡기로 통용되고 있는 수필을 개혁하기 위한 몸부림 - 환골탈퇴의 그 정신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의식을 개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통성을 깬다는 그 자체가 아쉬운 면도 있지만, 몇몇 도전자의 행위들이 탐탁지 않게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몇 주전자(主戰者)라도 ‘도자기의 진리’를 잊지 말고 혼탁한 터널을 통과해야 광명의 세계가 정착된다.
이것으로 볼 때 오감(五感)을 열어놓고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과 대화를 나누어갈 때 작가 특유의 창작의 형태와 그 형태를 뒷받침해 주는 창작의 샘물이 고갈되지 않게 된다.
만물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인식시켜 준다.
그 오묘함 속에는 반드시 희로애락의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이므로 수필은 인간학(人間學)으로서 타 장르보다 처절하게 ‘삶의 그림자’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삶은 생(生)의 그림자이므로 글 쓰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색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 그 자체가 인간의 소중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는 삶의 ‘심장’이므로 글쓰기의 소재로 나타난다.
독일어 '사텐(Schatten)'이라는 단어는 그림자를 한자로 ‘영(影)’이라고 표현하며그림자와 그늘이 내포되어 있지만, 카를 융이 말하는 사텐의 개념은 비교적 그늘보다는 그림자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영(影)의 개념은 물상의 그림자뿐 아니라 거울이나 물에 비친 영상(映像)과 가상(假相) -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필쓰기도 ‘그림자’의 그 농도는 작가의 재산과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성의 표정과 기질(氣質)이 내포되어야 하는 만큼, 작가만의 삶의 그림자,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철학의 그림자가 중요하게 나타나므로, 그 그림자를 마음껏 표출 시킬 때 생명력이 숨어 있는 작품이 된다.
중국문헌상에는 그림자의 용례를 그림자신(神)이라고 말하는 영신(影神), 위패를 모신 영당(影堂)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림자의 의미는 그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림자밟기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 그림자도 정체되어 생명력을 잃게 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든 그 반대의 사람이든 그림자를 지니게 되어있다. 빛을 향하면 향할수록 그 뒤에 반사되는 그림자는 커지게 마련이고, 사람의 의식 또한 의식의 빛에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무의식 속에서 느낌자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게 되어 있으므로 인생의 삶은 극(極)과 극 - 천상(天上)과 지옥에서 왔다 갔다 하는 중천(中天)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 역시 연옥(煉獄)의 세계 주인공들이다. 그 세계는 빛과 그림자와 가까운 세계이므로 언뜻언뜻 내비치는 고통의 유희들을 춤을 추듯 자기만의 기질과 표정을 빌어 작품화 했을 때, 작가마다 작품의 표정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림자가 없는 날은 흐린 날씨 - 죽음 그 자체에 가깝다.
살아있는 삶이라면 인간에겐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므로 각자의 행동반경에 따라 그 그림자는 다르게 되어 있어, 그 자체를 그 사람의 영(靈)의 창고, 육(肉)의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영육(靈肉)의 합일로 인해 이루어지는 삶은 작가마다 따라다니는 희로애락과 더불어 상상력과 철학을 통해 소재를 작품화 시킬 수 있으므로, 표정과 기질이 있는 작품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수필은 그 치열함이나 몰입성이 타 장르보다 뒤지지 않아 거침없이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고, 기존 수필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어 수필의 영역을 확장 시켜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수필 인구는 현재 수 천여 명의 시대를 치닫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고전수필만을 고수하며 정체 된다면 수필은 신변잡기, 잡문의 인식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도태 당하는 문학으로 침체될 지도 모른다.
선인들이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써왔다 하더라도 그분들의 시대에서 이미 수필의 문학성은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왜 동물 중에서 거대한 공룡이 지구의 흔적에서 사라졌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겠지만 덩치가 거대한 공룡도 기후의 변화에 적응치 못해 지구로부터 구정조정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으로 볼 때 수필도 수많은 수필 인구가 존재하지만 각자 변화의 주전자(主戰者)가 되지 않고서는 문학으로 살아남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많은 수필가가 수필은 신변잡기, 수필은 비문학이라는 오명을 안고 망망대해를 허우적대야 할 것인지 어느 장르보다 예술화된 기질로 변화시키며 그 어려움을 뛰어넘을 것인지는 지금 그 자체를 깨닫고 있는 여러 수필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달려있다.
해결책의 하나로서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그림자를 자신만의 제스처로 형상화시키며 다른 장르와 접목시켜 보기도 하고, 입체적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하면 수필의 미래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화풍도 다를 바 없지만, 모든 것의 기법이나 의식이 바뀐다는 것은 그리 쉽진 않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 순간들을 질박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맑고 고운 기운으로 원고지를 접하기도 하고, 위태롭게 묘사하기도 하며 극적인 경지까지 치닫다 보면 문학성은 물론, 자타의 카타르시스를 해결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수필문학이 문학의 선상에 우뚝 서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수필 작가로서 피 흘림을 운명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의 확장을 위해 도전하는 것은 비전을 향하여 꿈을 꾸게 하므로, 바람직하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 자체를 인정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응시해 나갈 필요가 있으므로, ‘실험수필’이라고 명명한「음음음음 음음음」한 편을 발췌하여 텍스트로 삼아 보고자 한다.
2. 장르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통섭세계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오호라 맞소 난(蘭) 한 그루를 키우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오호라 웬 걸 미안하오 난 한 그루를 키우다 보니 권태로 인해 힘들어졌소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고 오호라 여전히 암 말 마소 난 한 그루 생(生)하기 위해 한 판의 춤을 추어보세 바람과 구름은 남사당패로세 생은 한 판의 춤사위라구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오차숙의 「음음음음 음음음」 중에서
위 작품은 아방가르드란 이름을 빌어 만물의 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피상적으로는 한 그루의 난을 키우기 위한 작가의 고통이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웬걸 미안하오. 권태로 인해 힘들어 졌소. 그러나 여전히 암 말 마소. 음음음음 음음음. 생은 한판 춤사위로세”라고 춤사위를 벌이고 있으며 갈등과 고통으로 인해 반발, 거부, 수용, 합류의 단계를 넘나들며 ‘남사당패들’이라고 지칭하고 나선다.
이 작품은 수필에서의 아방가르드란 낯선 이론을 빌어 창작된 경우이므로, 과거의 창작 형태나 그 이론을 거부하며 전복시키려는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영혼으로만 흥얼거릴 수 있는 삶의 멜로디, 그 멜로디가 무수한 파편들로 분해되며 타 장르와 융합되는 가운데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의미지로 반영되는 것이, 작품「음음음음 음음음」의 특징이다.
지루하고 어렵고 주제가 선명치 않아 안개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고비를 넘기고 나면 마치 피안의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전혀 다른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도 한다.
그 어떤 암울함과 묘한 불안감, 사랑과 증오, 갈등과 방황, 자책, 응시 - 여러 모양으로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훑어 볼 때 어쩌면 심리적 호기심, 또는 뇌리를 자극시키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시지프처럼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음음음음 음음음’ 흥얼대며 삶을 위로받고 응시하고 용서하고 수용하고 증오하며 -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대상을 풍자하고 질타하고 흡수하면서 지옥의 세계, 연옥(煉獄)의 세계를 거쳐 천상(天上) - 궁극의 세계에 도달하고 나면 나름대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묘한 느낌에 전의되어 희망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관성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작품을 해부하는 계기가 내게는 작품의 의미를 재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실험 수필 중 한 편을 자료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은 내적인 무의식과 외적인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 발생하는 ‘새로움의 효과’에 의해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우연이야말로 작품을 창작해가는 순간에 접목되며 얻어지는 ‘의미 있는 의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각예술 - 잭슨 폴록의 그림을 연상할 때도 도움이 된다.
여러 물감들이 화폭을 메우며 요동치는 감각을 보여 줄 때 현대예술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균제보다는 파격을, 필연적 계획보다는 우연을, 인위성보다는 자연성을 내세우고 있음을 헤아릴 수 있어, 이해가 빠르게 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창작기법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초현실자들의 심리적 자동기술이라고 부르는 것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고전적인 작품처럼 창작하는 순간 계획된 절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행위를 도입함으로써 오직 창조 작업이라는 미명 아래 - 활동 속에서만 용솟음치는 요소요소의 생동감을 작품 의 창작 내면과 그 과정에 끌어들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우연’이라고 명명되는 ‘무의식’의 의미는 혁명적으로 나타난다.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은 의식적인 창작 구성 보다, 살아있는 순간의 전체성을 감지해내는 영감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의식을 넘어선 무의식 또는 우연에 의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품은 대체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위성을 뛰어넘는 색다른 미감이 있어 무언가 낯선 세계로 안내되며 자신과 타인의 카타르시스를 해결해 주므로, 배우와 관객이 함께 뛰어노는 마당놀이에 가깝다.
그 ‘무엇’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따르지 않고, 낯선 세계의 창조과정처럼 해석 과정에서도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어 무의식의 파동이 긍정을 몰고 오기도 하고, 부정의 그림자로 몰려가기도 하는 불투명한 춤사위가, 이 작품의 키 워드라고 할 수 있다.
뭐어라 그으래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오 생은 한 판 그래픽 소설이라고 생은 한 판 춤사위라고 한 판의 춤사위는 천 개의 단어를 조립한 말장난 보다 느낌을 줄 때가 때로는 있다오 남사당패들의 외줄타기 외로움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의 행로를 걸어가더라도 호오 탕한 춤사위는 삶을 지탱시켜 주는 이유가 되거든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의 춤사위로세
-오차숙의「음음음음 음음음」 중에서
이 발췌문은 작품집『음음음음 음음음』에 대해 서평을 쓴 한국수필학회 회장 윤재천 선생께서 실험수필「음음음음 음음음」에 대해 눈여겨 본 관점이다. 작품을 폭넓게 살펴보기 위해 발췌했으므로 작품의 이미지, 아방가르드에 대한 정의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오차숙은 작품「음음음음 음음음」에서 실험적 수필을 시도하고 있다.
수필만이 ‘신변잡기’라고 치부하는 오명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인생을 ‘춤’으로 형상화시키며 삶의 과정들을 한 판 춤으로 승화시키고 마는 표정들이 남다르게 나타난다. 작품을 기기묘묘한 표정과 기질(氣質)로 표출하며 작품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독특하다. 작품 제목도 랩송(Lapsong) 방식으로 표현, 기존 수필가들이 써 온 전통수필에 조심스럽게 도전하고 있어, 아방가르드 적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의고전주의에 대항하며 등장한 예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혁명적인 예술경향으로 다다이즘,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를 의미한다.
오차숙의 수필 쓰기의 기법과 그 의식은 마음속에 잠재된 마그마를 연기처럼 뿜어내며 작품 속에 그림자를 설정해 놓고 있다.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오는 연기를 통해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다.
계군일학(鷄群一鶴)처럼 도드라져 기성수필에 대한 관념이나 형식을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고 역설하고 있다.
3. 현재를 직시하고 각도를 달리 한 수필철학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Danto: 1924~)의 <예술의 종말 이후>라는 책은 미래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술작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제시해 준다. 예술에는 반드시 정답과 공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통념이 무용해져 해체되고 있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그동안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고급정신활동의 산물로서 오직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현대예술사는 고급스런 정신운동은커녕 충동적이고 인간의 본능적인 - 스릴 있는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비일비재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술 그 자체는 모방이 아니라 독자적이면서도 작가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그 의미가 있음을 설파한다.
그 현상은 다다이즘을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통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예술작품들을 추켜세우는 형상을 의미한다.
작품의 아름다움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작품의 표현방법 - 때론 입체적 기법을 사용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에 그 가치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특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더니즘 예술이 극단적으로 변해 갈 때 도드라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예술은 작품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충격’ 그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다.
피카소 같은 경우는 그림에 잡지를 찢어 붙이거나 막대기를 붙이기도 했고, 뒤샹(Duchamp)은 남자 소변기를 예술작품이라고 전시하기도 했으며, 쇤베르크(Schonberg) 역시 일반 피아노로는 연주할 수 없는 무조(無調)음악을, 존 케이지(John Cage) 역시 소음음악을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그 외에도 충격적인 예술들이 적지 않아, 충격을 주지 못하는 작품들은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필도 제 자리 걸음만 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인식되어 실험적 기법, 과감한 의식으로 작품들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들고 있다.
물론 고전적이거나 고답적인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고 그 자체가 독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그래도 장르 간의 벽이 해체되고 있는 이 시대에 수필도 좀 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문학으로서 가치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실험수필이든 고전수필이든 자기 고백적 성향이 강한 문학임엔 틀림없다. 그 결과 타 장르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수필’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수필의 개념이 비본질적인 성격으로 이루어졌다는 문학으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쓸 수 있는 장르라고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여러 독자들이나 작가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인식은 수필을 쓰는 우리들에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문학이 아닌 장르를 붙들고 긴 세월 고생을 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 때가 허다하다. 수필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독자도 그렇거니와 수필을 습관적인 손놀림, 감정놀림으로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전을 가지고 도전을 꿈 꾸지 않을 수 없다.
알고 보면 수필은 짧음 속에서도 단편 형식으로 이루어진 수필, 구성이 철저히 되어있는 수필, 잠언처럼 사람의 마음을 찬찬하게 만져주는 수필, 메타포로 이루어져 깊은 뜻을 지닌 수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수필이 왜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비문학’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생각의 보편화와 고정화된 습관, 쉽게 접근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그 지망생들, 쉽게 이루어지는 강의 때문일 수도 있다. 지망생에게 작가로서의 실력을 갖춰주기 보다 발행인의 명예를 위한 사업수단에서 빚어지는 과잉 배출 때문일 수도 있고, 원고를 선별하지 않고 게재하는 잡지사의 책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너나없이 느낌이 약한 작품들을 창작할 때가 많다.
그림자 속에 갇혀 있어 출렁임이 없는 작품들, 허상과 실상이 조화롭지 않아 경이로움이 없는 작품들,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 사람을 사로잡는 눈빛이 없는 작품들 - 무표정의 작품들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로 볼 때 문제가 없진 않다. 일류 모델들도 자기의 개성과 본질을 드러내지 않고 상업적인 표정에만 몰입하게 되면 쥐약을 먹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보더라도 수필가의 생각이나 그 이미지, 잡지사의 개념들까지도 좀 더 변해야만 비전 있는 수필이 된다.
하지만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므로 그 정답은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도 풍속화가 신윤복과 김홍도의 소재를 바라보는 관점, 그들이 예술과 대좌(對坐)하는 각도를 보아도 그 차이가 없진 않다. 신윤복의 ‘월하정인’ ‘월하밀회’ ‘이브탐춘’, ‘기방무사’ 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때도, 김홍도와 임금 정조는 그 작품들을 음탕한 작품, 또는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해석했지만, 그림의 작가 신윤복은 자신의 마음이 음탕해서도 아니고, 오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눈앞에 보여 지는 울고 웃는 그 모습들이 아름다워, 유혹하는 마음들과 유혹 당하는 마음들이 순수해서, 갈등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들이 위선이 없어서, 그 만의 특징 있는 그림 - 속화(俗畵)들을 그렸다는 것을 보더라도, 예술인들의 의식과 그 철학은 각양각색 - 무궁무진 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때 수필도 그 자체를 정비하여 예술적인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실체가 수면 속에 잠겨 하늘을 볼 수가 없다.
김유신 장군도 습관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여색(女色)을 지나치게 좋아해 눈만 뜨면 기생집을 다녔다고 역사는 전해진다. 그에겐 아끼는 명마(名馬)가 있어 김유신이 밤낮에 관계없이 그 안장에 안기만 하면,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장군의 명마는 기생집으로 곧장 김유신을 모시고 간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김유신은 어느 날 자신을 습관에 의해 다시 기생집으로 태우고 가는 명마(名馬)를 단칼에 죽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해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순간의 무서운 결단이 선덕여왕을 보좌하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고정화 된 것에서 변화를 되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도 삼성에는 이병철의 고통이 있었고, 현대에는 정주영의 고통이 있었듯이, 수필 계에도 수필가들의 비전 있는 생각과 함께 의식의 변화가 생기게 된다면, 살아 있는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순조로운 것은 세상에 많지 않지만 수필가들이 책임감을 느껴 획기적으로 변화를 꿈꾸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목적을 향한 에너지가 각자의 표정과 기질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
예술가는 작은 소음을 듣더라도 소리의 영원한 깊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가을에 겨울의 소리를, 겨울에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므로, 수필은 작가의 기교와 유희, 영감의 충돌, 깊은 화해가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과 함께 수필의 문학성, 예술성을 위해 변화의 주전자(主戰者)가 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수필 계에도 비전 있는 작품들이 정착되리라 확신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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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남, 「수필문학발전을 위한 문제점 진단」(세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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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제, 「예술개념, 움직이는 미로」(동녘, 2008)
정진권, 『수필쓰기의 이론』(학지사, 2000)
진중권, 『미학오디세이』 (휴머니스트, 2003)
첫댓글 읽어보지 않고 스크랩해 갑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요.
희자샘, 오늘 일욜, 즐거운 시간 보내시는 거죠?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저는 어제 부산 언니집에 갔다가 오늘 저녁 때 돌아왔습니다.
식구들 밥 챙겨주고 겨우 앉았는데 목도 따갑고 잠이 쏟아집니다....
피카소,
뒤샹,
쇤베르크,
존 케이지,
그리고 오차숙...
책으로 읽기는 했으나 모니터 화면에 김희자 작가가 올렸으니 또 읽게 되네요.
등피 출간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