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채인택
⑤ 한국을 취하게 하는 니혼 사케 닷사이
한‧일 간 음식문화 교류는 정치‧외교 문제와 별개로 꾸준히 확대돼 왔다. 특히 일본에서 ‘니혼슈’ 또는 ‘니혼 사케’로 읽는 일본주(日本酒‧쌀로 빚은 청주)의 한국 내 소비는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대 사케 수입국이다. 인구 대비로 하면 일본 밖에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케를 즐기는 셈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케 열기가 이렇게 뜨거운 것일까. 특히 한국과 일본 사이의 그 숱한 굴곡 속에서도 사케 소비는 일시 줄었다가도 금세 탄력 있게 다시 회복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의에서 대접한 ‘닷사이’
지난 7월 일본 도쿄 나리타 공항. 면세점 주류 코너의 한복판에 닷사이(獺祭)가 진열돼 있었다. 카트를 끌고 다니는 면세점 직원이 연신 빠진 분량을 채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도쿄 시내에서 들른 마트 주류 코너에서도 눈에 띄는 장소에 자리 잡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검색하자 공항 면세점이 마트보다 2000엔 더 싸다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한국어 포스팅이 줄줄이 보였다.
닷사이는 일본 혼슈(本州) 서부 야마구치(山口)현의 아사히(旭) 주조에서 생산하는 최상급 술이다. 요즘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최고 인기 사케다.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물론 메이지(明治)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총리 등 일본의 역사적인 보수 정치인을 다수 배출한 지역이다.
닷사이 45. 하얀 생선회는 물론 여름 채소의 맛이 진한 가지두부 가라아게와도 잘 맞았다. 야마구치에서 온 이 사케는 2016년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찾았을 때 내놓은 사케다. 최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첫 모금에선 깔끔하면서도 혀를 감싸는 감칠맛이 강했다. 잔을 더할수록 가벼운 단맛이 뒤늦게 차올랐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야마구치에서 생산된 닷사이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6년 5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가 내놓으면서다. 그 덕분에 아베 총리의 고향(출생은 도쿄지만 부친의 고향이자 부친과 자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에서 생산되는 지역 사케인 닷사이는 일본에서는 물론 한국,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2014년 4월 23일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아베 신조 당시 총리와 도쿄 스시 레스토랑에서 사케를 마시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닷사이’…쌀의 77%를 깎아내고 속살로만 빚어
단순히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사용한 것만으로 이런 명성과 지위를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닷사이를 파헤쳐봤다.
우선 닷사이는 일본주 등급에서 최상급인 준마이다이긴조(純米大吟醸)급만 만든다. 차게 해서 흰살 생선 등과 함께 마시는 게 좋은 다이긴조(大吟醸) 급은 쌀을 깎아 50% 이하만 남긴다. 그 다음인 긴조(吟醸)급은 깎고 남기는 게 60% 이하다. 도쿠베츠(特別)가 붙어 있으면 통상 60% 정도다. 주정을 별도로 첨가하지 않고 쌀만을 발효시켜 빚은 술에는 준마이(純米)라는 표시를 한다.
사실 이는 최소 기준이다. 닷사이는 이런 기준을 훨씬 넘어선다. 같은 다이긴조급이라도 더욱 부드러운 맛을 내기 위해 쌀을 과감하게 더 많이 깎아냈다.
그러면서 다이긴조급을 셋으로 다시 나눴다. 미가키 니와리 산부(磨き二割三分)와 미카키 산와리 고부(磨き3割9分), 그리고 45의 세 가지. 23%를 의미하는 2할3푼이나 39%를 가리키는 3할9푼, 그리고 45라는 숫자는 모두 정미배합(精米歩合) 비율을 나타낸다.
닷사이 2할3푼.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정미배합 비율은 술을 빚기 위해 쌀을 깎고 남긴 비율을 가리킨다. 닷사이는 23이라면 이 술을 빚을 때 사용하는 굵직한 야마다니시키(山田錦) 품종의 쌀을 바깥에서 77%를 깎아내고 안에서 23%만 남겨서 술을 담았다는 이야기다. 단단한 겉 부분을 이렇게 깎아내고 부드러운 속 부분만 남기는 지극정성으로 술을 빚었으니 맛이 부드럽고 향이 오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술꾼들이 오바마가 마셨다고 그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소비자는 오로지 비용 대비 효율을 따지고, 맛있는 것을 찾는다. 맛의 세계에는 권력도, 지위도 국제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일본 식당, 140년 전부터 미국에 확산… 민간외교 활용도
전 세계적으로는 일본 식당의 확산과 요리의 보급, 그리고 식품 수출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일본식(日本食) 레스토랑 해외보급추진기구(JRO)’에 따르면 2007년 전 세계 2만4000개이던 일본 음식 식당이 2021년에는 15만9000개로 6.6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비약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농림수산물과 식품 수출은 2007년 4000억 엔에서 2022년 1조4148억 엔으로 3.5배 이상으로 늘었다. 일본이 체계적으로, 국가와 민간이 함께 노력하면서 일본 음식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일본 음식은 오랫동안 전 세계에 확산됐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의 군함이 찾아와 개항을 요구한 이른바 구로후네(黑船‧흑선) 사건 이후 일본은 1854년 3월 31일 미·일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개항을 했다.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코다와리 쓰키지 일본라멘 식당. 파리의 맛집으로 알려진 이곳은 언제나 관광객들로 붐빈다. 연합뉴스
일본에서 200여 년에 걸친 쇄국이 끝나고 이민이 가능해지자 가난한 농부를 중심으로 브라질 등 중남미와 미국 등 북미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음식 문화도 함께 들고 갔다. 미국 내 첫 일본음식점인 다이와야(大和屋)가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때가 1887년이었으니 그 속도를 짐작할 만하다.
음식은 문화 교류와 전파의 선봉장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는 1893년 리틀도쿄 지역에 일본 음식점 미하루테이(見晴亭)가 개업했다. 미국에선 1903년에는 소바 가게가, 1905년에는 튀김 가게가, 1906년에는 초밥(스시) 가게가 각각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음식의 세계화의 첨병인 스시, 한인 경제에도 기여
스시 전파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1912년 도쿄 시장이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벚나무 묘목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워싱턴에서 봄마다 벚꽃 축제가 열리자 일본 스시협회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벚꽃을 보기 위해 몰린 미국인들에게 홍보용 스시를 제공하면서 북미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 도쿄 한 레스토랑의 스시. 연합뉴스
이렇게 미국 등 전 세계로 퍼진 일본 스시문화는 일본인 이민자는 물론 한국인 이민자의 경제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준 게 사실이다. 숱한 한인이 미주에서 초밥집을 내거나, 한식과 일식을 함께 다루는 아시아 음식점을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재배된 일부 상표의 쌀에는 영어로 ‘Good for Sushi(스시에 적합하다)’라는 표시가 돼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먹는, ‘둥글고 찰지며 윤기가 나는 자포니카 종’ 쌀임을 나타내는 표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 교민이나 유학생이 풀풀 날리는 안남미 대신 먹을 수 있는, 우리 입맛에 맞는 쌀이다.
사케에 들인 집요한 노력…사케 주조용 쌀 120여 종 개발
사케는 일본에서 열리는 국제행사 때 홍보를 위해 늘 등장한다. 지난 5월 11일 일본 니가타에서 열린 '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 회의' 환영행사에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가운데) 등이 일본 전통에 따라 사케통을 망치로 깨고 있다. 사케통 깨기는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고 행운을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의식이다. 연합뉴스
주조호적미(酒造好適米) 슈조코데키마이 지역 사케의 보호‧육성 단체인 지자케쿠라모토카이(地酒蔵元会)에 따르면 사케를 만드는 슈조코테키마이(酒造好適米‧줄여서 사카마이(酒米))는 씨알이 굵고 속의 흰 부분인 심백이 많이 나타나며, 단백질 함량이 적고 겉은 단단하고 속은 부드러운 등의 조건이 있다. 계속 개량돼 신종이 나오기 때문에 야마다니시키(山田錦)‧고햐쿠만고쿠(五百万石)‧오마치(雄町)‧미야마니시키(美山錦)‧가메노오(亀の尾) 등 120여 종이 개발됐지만 주로 20종 정도가 재배된다.
1936년 효고(兵庫)현 ‘농사시험장’에서 개발한 야마다니시키는 ‘술 빚는 쌀의 왕’으로 불린다. 가장 많이 재배돼 전국 사카마이의 약 36%를 차지한다. 알이 특히 굵어 겉부분을 많이 깎아내고 속의 부드러운 부분만으로 고급 사케를 만들기에 유리하다. 부드러우면서 약간 단맛이 난다. 전국 생산의 절반 이상이 효고에서 재배된다. 경험적으로 보면 한국에 수입되는 사케는 야마다니시키를 원료로 한 것이 많은 편이다. 맛이 무난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햐쿠만고쿠는 1957년 니가타(新潟)현 농업시험장에서 개발한 것으로 알이 그렇게 굵지 않아 많이 깎아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부드러운 사케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 깔끔하고 담백하며 균형 잡힌 맛의 사케를 만들기에 유리하다고 한다. 재배면적이 사카마이 중 2위로 약 25%를 차지한다.
2022년 12월 일본 니가타현에 내린 눈에 덮인 차의 모습. 이곳은 이렇게 한겨울에 많이 내린 눈을 봄에 차가운 물로 가둬 벼를 키워서 술맛이 더 있다는 설도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쌀과 사케 주산지로 명성을 날리는 니카타를 중심으로 도야마(富山)‧이시가와(石川)‧후쿠이(福井) 등 동해 연안(北陸‧호쿠리쿠) 지방에서 주로 재배된다. 이곳은 한겨울에 동해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습한 바람의 영향으로 적설량이 많은 지역이다. 봄에 눈 녹은 차가운 물을 가둔 계단식 논에서 키운 벼라서 술이 더욱 맛있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과학적 근거는 알 수 없다.
미야마니시키는 1978년 나가노(長野)현 농업시험장에서 다카네니시키(高嶺錦)라는 품종의 쌀에 감마선을 쬐어 돌연변이를 일으켜 개발한 신품종이다. 한랭지에서 잘 자라 동일본이 주산지다. 이 쌀로 빚는 술은 섬세한 향이 특징이며 가볍고 산뜻한 맛으로 젊은 층에 인기가 있다고 한다. 전국 사카마이 점유율이 7% 정도다.
오마치는 육종으로 개발된 품종이 아니라 1859년 오카야마(岡山)에서 한 농가가 우연히 발견한 키 큰 벼를 계속 재배해 개량한 것으로 전한다. 일본의 사카마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야마다니시키나 고햐쿠만고쿠 등 술과 밥을 위한 수많은 일본 쌀 품종의 기원이 됐다. 심백이 커서 진한 감칠맛이 나기 때문에 고정 팬이 많다고 한다. 점유율은 3% 남짓이다. 오카야마에서 재배하는 사카마이의 95%를 차지한다. 수확 시기가 늦은 만생종이고, 키가 커서 폭풍 등에 잘 넘어져 키우기가 어렵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가메노오는 1888년 북부 야마가타의 농가에서 냉해에 살아남은 강인한 벼만 골라 재배해 확보한 품종이다. 깊이 있는 맛이 나는 술을 만들 수 있다. 냉해에는 강하지만 병충해에는 약한 데다 이 때문에 재배 면적이 줄다가 최근 사케가 다양화하면서 다시 늘고 있다고 한다. 점유율은 2% 이하다.
코로나19 잦아들며 사케 수입 1.68배로
일본주조(酒造)조합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은 2022년 물량 기준으로 405만4175L의 사케를 수입해 미국(908만 3761L)과 중국(738만 8482L) 다음으로 세계 3위의 수입국이 됐다. 인구 대비로 따지면 사실상 세계 1위의 사케 수입국인 셈이다. 한국 사케 수입이 가장 많았던 2018년에는 538만0908L를 들여와 미국(578만L)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랐다. 당시 414만 6394L를 수입한 중국이 뒤를 이었다. 한국의 사케 수입은 2021년 241만8495L에서 2022년 405만4175L로 1.68배로 증가했다.
올해 1~6월 사케 수입 상황도 비슷하다. 물량 기준으로 한국은 220만L를 수입해 중국(322만 9000L), 미국(303만L)에 이어 계속 3위다. 다만 금액 기준으론 한국은 17억8300만 엔을 수입해 중국(62억2900만 엔), 미국(41억2800억 엔), 홍콩(28억1300만 엔) 다음의 4위에 올랐다. 홍콩이 상대적으로 고가 사케를 많이 수입하는 경향을 보였다.
올 상반기 일본의 전체 사케 수출은 1458만6000L에 금액으론 200억 엔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물량은 86%, 금액은 81%가 늘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막을 내리면서 한국의 사케 수입량이 가파르게 증가한 셈이다. 일본 여행 붐과 함께 국내에선 사케 붐이 다시 일고 있다.
일본 조리학교 나카무라 교장의 제철‧향토 음식 충고
후쿠오카(福岡) 나카무라(中村) 조리‧제과 전문학교는 오사카(大阪)의 쓰지(辻) 조리사전문학교, 도쿄(東京)의 핫토리(服部) 영양전문학교와 더불어 일본의 유명 음식문화 학원이다. 나카무라 조리제과 전문학교의 니카무라 데쓰(中村哲) 교장을 후쿠오카와 서울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참치를 겉부분만 살짝 익힌 다타키에 고마(참깨) 소스를 끼얹은 고마다레 참치. 다타키는 고기나 생선의 겉 부분만 살짝 익혀 먹는 서양 전채요리인 카르파초의 일본식 변용이다. 연어나 고등어 등을 이렇게 먹기도 한다. 등푸른 생선인 고등어·전갱이의 회를 칼로 다진 뒤 일본 된장과 채소, 양념과 함께 버무려 먹는 일본 음식도 다타키 또는 나메로라고 한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나카무라 교장과 오래전 한국의 이자카야에서 식사한 뒤 품평을 부탁했다. 그는 “현지의 맛과 분위기는 상당히 따라왔다”면서도 “일본에선 당연시되는 제철 음식과 향토 음식을 찾기가 힘들다”고 에둘러 말했다. 음식은 재료가 중요하며 최고의 재료는 해당 지역에서 나는 제철 농수산물이라는 이야기다.
'고등어회 초밥'인 시메사바즈시. 찰기 있는 밥과 적절한 촛물로 고등어 본연의 감칠맛과 씹는 맛을 조화롭게 감쌌다. 일본은 성인병 예방에 좋은 등푸른 생선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긴다. 차와 함께 일본을 장수국가로 만든 요인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그러면서 조리에서 기본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는 “예로 재료를 썬 모양을 보면 조리사가 얼마나 칼질을 깔끔하게 하는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며 “이는 완성된 음식의 모양은 물론 맛에도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 채소 등을 거칠게 자르면 깔끔하게 자른 것보다 맛과 향, 수분 등이 더 많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일본 음식의 특징에 대해 “고대로부터 외부에서 다양한 음식과 조리 기술을 들여와 섬세함과 정성을 보태 고유의 특징을 새롭게 창조하고 축적해 왔다”고 원론적으로 말했다. 좋은 건 다 받아들여 내 걸로 만든다는 것이다.
연두부와 6~9월 생산되는 여름가지의 겉을 전분으로 감싸고 튀긴 뒤 가쓰오부시(말린 가다랑어 숙성포) 국물을 홍건히 적셔 감칠맛을 낸 가지두부 가라아게. 여름의 맛인 가지를 맛있게 먹는 방법의 하나다. 갓 튀겨 바싹한 가지는 여름을 이길 수 있는 산뜻한 맛이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사실 일본인들은 덴푸라로 부르는 튀김은 16세기에 와서 조총을 전해준 포르투갈인의 템푸라에서, 돈가스는 19세기 독일‧오스트리아의 슈바인슈니첼과 영국의 포크커틀렛에서, 카레는 커리와 맛살라의 나라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에서 각각 배워 입맛에 맞게 혁신했다. 이젠 김치를 받아들이면서 일본 어디서나 먹을 수 있게 됐다.
지난달 도쿄 이세탄 백화점 식품 코너에 갔더니 ‘나물’ ‘반찬’ ‘장조림’ ‘불고기’ ‘양념치킨’이 자연스럽게 팔리고 있었다. ‘나물’과 ‘반찬’은 일본어 대사만 나오는 일본 드라마에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먹는 것에서는 두 나라 국민 사이에 어떤 벽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음식은 화해의 매개가 될 수 있다.
튀김도 종류마다 다른 이름…요리를 대하는 섬세한 자세
일본에서나 한국의 이자카야 등에서 일본 음식을 볼 때 놀라운 것은 품질을 높이고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는 정성과 노력이다. 튀김만 해도 한국에선 재료를 기름에 튀긴 걸 모두 그렇게 부르지만, 일본에선 밀가루와 달걀 반죽을 차갑게 해서 재료를 하나씩 조리하면 덴푸라, 전분 반죽을 이용하면 가라아게, 빵가루를 쓰면 후라이, 재료를 뭉쳐서 튀기면 가키아게로 각각 부른다고 소개했다.
이 각각 튀긴 음식은 조리법은 물론 맛과 바싹함과 재료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 그만큼 섬세하면서 재료를 중요시하는 자세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튀김도 튀김옷을 얼음 등으로 차갑게 관리해야 더욱 바싹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만든 음식이 맛과 모양이 나지 않는다면 그 지역에서 나는 제철 음식을 써서 기본에 충실하게 조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에 대한 집요한 정성…소금 사러 한국까지
또 하나 생각할 점은 음식을 대하는 철저한 근성이다. 나카무라 교장의 소개로 후쿠오카에 있는 야마나카(山中)라는 스시집을 찾았다. 본 음식인 스시가 나오기 전에 맛보기로 고래고기가 나왔는데 소금 대신 간장으로 만든 소스를 내왔다. 껍질에 붙은 기름 부위는 고래에서 가장 흔하고 싸지만 가장 맛이 좋은 부위인데 이를 가장 잘 맛보려면 향과 잡내가 없는 소금에 찍어 먹는 게 제일 낫다. 이는 어려서부터 한국 바닷가 지역의 서민 음식인 고래고기를 먹으며 배운 경험칙이다. 하지만 야마나카 사장이 직접 들고 나타난 소금은 가공 소금이었다.
가공하지 않은 소금은 없느냐고 물어보니 야마나카 사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본에선 혼슈(本州)‧규슈(九州)‧시코쿠(四國) 사이의 바다인 세토나이카이(瀕戶內海)의 갯벌에서 과거 김과 천일염을 생산했는데 이 바다는 이제 공업화로 인한 폐수 배출로 오염돼 더 이상 이를 생산하지 못하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국산품(야마나카에겐 일본산)만 쓰는 걸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프랑스산 게랑드 토판 천일염이나 오스트리아산 암염 등은 쓰지 않는다. 물론 일본에서도 천일염을 내는 곳이 있지만 대량 생산을 하지 못하고 지역 특산물 수준으로만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신안 증도에서 나오는 토판 천일염을 추천했다. 일본산만 쓴다는 고집과 음식의 맛을 최대한 살린다는 요리사의 소명 의식 사이에서 선택해 보라고 권유했다.
전남 신안군 마하탑염전에서 작업자들이 토판 천일염을 만들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몇 달 뒤 야마나카 사장이 수제자를 데리고 한국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기별을 받고 나가서 만났다. 한국산 천일염을 맛보는 그의 표정을 진지했으며, 맛본 다음에는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그와 그의 수제자는 배추 절일 때 쓰는 굵은 것부터 조리에 쓰는 고운 것까지 여러 가지 신안 증도산 천일염을 들고 귀국했다. 아예 신안의 염전을 한둘 매입해 질 좋은 천일염을 스스로 관리해 가면서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공급받을까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일본 대중음식점 모인 동부이촌동 ‘리틀 도쿄’
서울에 일본식 선술집인 이자카야(居酒屋‧거주옥)가 가장 먼저 몰린 곳으로는 다양한 요리로 유명한 천상과 꼬치구이로 이름이 알려진 문타로 등이 몰린 이태원 제일기획 주변을 들 수 있다. 주인이 일본에서 보고 따왔다는 천상(天翔)이란 상호는 일본발음으론 ‘덴쇼’지만 가게 주인은 한국발음을 쓴다. 문타로(文太郎)는 일본 발음이 ‘분타로’인데 문타로로 쓴다. 한국에 일본 문화가 그대로 들어오지 않고 다양한 변용과 각자 해석을 거쳐 이식됐음을 보여주는 상호다.
서울 이태원의 이자카야 천상에서 만난 모듬회. 씹는 맛이 강한 한국식 활어회와는 다른 일본식 생선회였다. 꼬리지느러미 쪽을 따서 피를 빼고 수건에 싸서 숙성시켜 살살 녹는 듯 부드러움 식감을 냈다. 같은 생선회라도 강한 식감을 중시하는 한국에선 양념장 바른 마늘·고추를 얹고 상추나 깻잎에 싸서 먹는다. 부산등 남해안 바다에선 씹는 맛을 유난히 강조하는 딱딱한 돌도다리가 인기 있는 이유다. 해파리를 향이 강한 일본식 깻잎인 시소에 싸고 빨간 색을 낸 절임인 시소구라게(시소해초)가 가운데 종지에 보인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이보다 앞서 일본 ‘오리지널’ 대중음식을 서울에 알린 지역으로 가정식 중심의 소박한 일본음식점이 몰린 동부이촌동을 꼽을 수 있다. 동부이촌동는 ‘리틀 도쿄’로 불릴 만큼 일본음식점이 몰렸다. 일본인이 직접 주방을 지키면서 운영하는 일본가정식 음식점이 중심이며 일본라멘집도 인기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일본음식점도 함께 몰리면서 1990년대부터 일본의 대중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맛집 동네로 이름이 났다. 일식(日食)이나 선술집을 뜻하는 이자카야 대신 한자로 ‘와쇼쿠(和食‧화식)’나 한글로 ‘일본가정식’, 영어로 ‘재패니즈 레스토랑(Japanese Restaurant)’을 주로 내세운다.
이곳에 일본인이 많이 살고 일본음식점이 몰린 이유로 주변에 일본인학교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지만 확인해봤더니 서울일본인학교는 1972년 용산구 한남동에 문을 열었다가 1979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옮겼으며, 2010년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또 다른 주장으로 동부이촌동 주변에 과거 경제개발시대 한국 기업이 영입한 일본인 기술자나 서울에 파견된 상사원이 몰려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위한 일본 가정식 식당이 줄이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가정식을 서울에 본격적으로 보급한 인물로 냉동기술자 출신의 일본인 상사원 미타니 마사키(三谷正樹)가 꼽힌다. 미타니는 자신의 성을 딴 미타니야(三谷屋)를 1998년 용산구 이촌동에 문을 열었는데 최근에 폐업했다고 한다. 지금은 강남과 판교에 같은 이름의 식당이 남아있다. 한국인 부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은 스즈란(鈴蘭)을 붙인 스즈란테이(鈴蘭停)라는 가게도 차렸는데, 이제는 미타니야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한다.
동부이촌동 신용산초등학교 주변 시장 안에 자리 잡은 아지겐(味源)도 오랜 맛집이다. 고로케‧게살오믈렛‧가지튀김에 연두부에 전분을 입혀 튀긴 뒤 가다랑어 숙성포인 가쓰오부시 국물을 끼얹은 아게다시 도후는 안주로 인기를 끈다. 히레카스‧로스카스에 치킨가라아게, 굴 후라이 등으로 일본의 튀김 조리법을 비교하기에 좋다. 라멘과 나가사키 짬뽕, 야끼소바‧야끼우동, 그리고 냉소바‧냉우동 등 면류도 인기가 높다. 오래 전 자주 찾았더니 얼굴을 알아본 일본인 주인이 메뉴에 없는 일본가정식 요리인 롤가스를 만들어 직접 들고 서비스라며 자리에 찾아왔을 때도 있었다. 편안하고 대중적인 분위기와 맛의 가게다.
호환 가능하지만 가까우면서도 먼 한‧일 음식문화
한국인에게 일본 음식은 전 세계에서 가장 호환이 쉬운 음식이다. 쌀도 같은 자포니카 종을 먹는다.
한‧일의 음식문화는 서로 비슷해 대부분의 경우 호환이 가능하지만, 차이도 있다. 한국의 젓가락 끝은 중국식(뭉툭하고 길다)과 일본식(짧고 끝이 가늘다)의 중간이다
밥그릇을 밥상에 들고 먹느냐 놓고 먹느냐를 두고도 한‧일은 서로 다르다. 과거 한국에선 “거지냐, 들고 먹게”라는 말로, 일본에선 “개냐, 놓고 먹게”라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국의 건더기와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한국식과 젓가락으로 건더기 건져 먹고 국물은 후루룩 마시는 일본식은 명백히 다르다.
면을 먹을 때 소리를 내고 후루룩 면치기를 하는 일본식과 얌전하게 먹는 한국식도 다르다. 회를 겨자 간장에 찍기만 하고 그대로 먹는 일본식와 막장에 찍어 마늘 넣고 고추 넣어서 상추‧깻잎에 싸서 먹는 한국식은 최근 들어서 서로 닮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 음식에서 자주 보이는 시소라는 이름의 일본 깻잎은 한국에선 먹지 않고, 우리가 좋아하는 깻잎은 일본은 물론 한국 외의 지역에선 거의 먹지 않는다. 그래도 이만큼 가까운 나라는 없다. 넘어야 될 산도 많지만 함께 즐기는 문화도 상당하다.
에디터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