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보았다
(요 20:11-18)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즘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여 많이 아프고,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힐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게 되지요. 회복, 치유라는 뜻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이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아파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힐링’이 필요합니다. 전쟁으로 가족과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 재난과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 폭력의 어두운 기억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 모두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참사를 겪을 때, 사회는 아파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강제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 독재정권에서 희생당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리 사회는 고통을 느낍니다. 역사의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해야 할 우리 사회는 오히려 갈등을 불러오며 그 상처와 고통을 헤집어놓고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이 아직 멀었습니다. 과거사 진상 조사나 사회적 참사 진상 조사 같은 기구가 만들어지지만, 여야는 이념대립에 몰두할 뿐입니다. 진실을 밝혀내지도 못하고 고통을 이어갑니다. 역사적 진실조차 외면하는 정치인, 선동가들이 있습니다. 광주항쟁, 4.3 사건, 또는 사회적 참사인 세월호와 이태원 사태를 이념으로 덧씌우기를 하고, 개인적 일탈로 몰아가면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을 아프게 합니다. 이념 갈등은 보수 정치인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이념 논쟁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치유와 회복에서 점점 멀어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뿐입니다. 거짓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거짓 선동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갈등을 일으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대접 받고, 국회의원이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 거짓 선동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사회가 치유와 회복을 통해 갈등이 사라지고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프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치유와 회복의 기회를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기독교의 출발을 알리는 명절입니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부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전 15:12-20)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도마는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요 20:25)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으니 제자들은 믿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증언만 듣고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절 첫 새벽에 무덤을 찾았다가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은 제자가 있습니다. 20장 8절에 보면 ‘무덤에 먼저 갔던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사랑 받던 제자는 요한입니다. 젊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고, 베드로를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무덤 안을 살펴본 뒤에 들어가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않고도 믿은 첫 그리스도인인 셈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언만으로도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조됩니다. 그렇다고 부활 사건이 단순히 신앙의 문제는 아닙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인 것입니다. 믿기는 어렵지만 믿지 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요 11장) 나사로의 부활은 죽기 전의 모습과 관계로 회복한 것입니다.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물론 생각은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생각이 바뀐다고 합니다. 기쁘게 살고, 감사하며 산다고 합니다. 천국을 구경하고 왔으니 바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은 과거의 회복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모습과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완전한 관계의 시작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이전 관계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주님과 제자의 완전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완전한 관계는 17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제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합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고, ‘내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부활의 첫날 처음 무덤을 찾은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 찾았다고 하는 것은 요한 공동체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권위가 높이 인정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덤을 한 명이 찾았느냐 여러 명이 찾았느냐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고 공동체 상황에 따라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제자들이 돌아간 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울고 있습니다. 아마 사랑하는 주님을 도둑 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셨던 자리에 있던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을 건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도둑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시신이라도 찾고 싶어 합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여전히 ‘내 주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뒤를 돌아보니 예수께서 서 계십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 새벽이기 때문에, 또는 울어서 눈이 흐려졌기 때문에, 아니면 부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못 알아 보았다고 설명할 수 있으나 사랑한다면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말씀하시는 분이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며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은 시신이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이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의 발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붙잡는 것은 이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전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활 신앙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초대는 막달라 마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는 우리들도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본 것은 진정한 ‘목자와 양’의 관계에 들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외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기독교가 차별이 없는 종교, 포용력이 있는 종교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자’(눅 8:2)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헌신한 여인이었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영광은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보상처럼 여겨집니다. 처음은 아니지만,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제자라는 이름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17절)고 전합니다. 내려와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두 번의 내려옴과 두 번의 올라감이라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첫 번째 내려옴은 탄생이고 첫 번째 올라감은 십자가 위입니다. 두 번째 내려옴은 무덤에 묻히신 것이고 두 번째 올라감은 승천입니다. 두 번의 내려옴과 올라감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보여줍니다. 참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제 승천을 통해 부활 신앙을 완성하십니다. 승천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새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기쁨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단하여 좋았던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주시고, 치유해주십니다. 그들은 기쁨을 얻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여 불편한 관계가 치유받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우리를 완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곧 영원한 생명으로 기뻐하는 삶입니다. 예수 믿으면 병에도 안 걸리고, 사고도 안 당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겪지도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는 상태’(롬 8:39)를 말합니다. 이런 신앙의 삶을 사도 바울은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자기 감정에 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프면 짜증 내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화가 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어느 때에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지냅니다. 감정이 없고, 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오늘,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