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영도고가다리의 부실공사를 우려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지난날들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라는 것이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 어이없게 곤구리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곤구리 작업하는데 그 밑에 든든한 밑받침 될것이라도 있으면 그렇게 어이없는 일은 안 일어났을 것인데
곤구리 하는 그 아래 무슨 힘이 되어 받쳐줄만한 받침이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무너진것은 어쩌면 예견된 사고였는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곤구리 작업은 될수 있으면 겨울에 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곤구리가 빨리 굳지 아니하고 빨리 견고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무게의 힘을 그 약한 철골 구조물들이 받쳐주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이 다리가 방화대교처럼 무너져 내리는 날이면 더 큰 대형참사가 발생할것이다.
그것도 일반차량이 아닌 콘테이너 물류차량들이 이 다리를 지나가면
그 무게감을 감당못해서 이 다리는 언젠가는 대형참사로 이어질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아파트 놀이터 앞의 그 기둥발 기초공사할때
소방호수로 들이부은 물이 몇날몇일을 부었으니 그 곤구리가 물과 뒤섞여서
그 곤구리는 단단한 기초 곤구리가 될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공사를 뒤집어 엎으려니 그 누군가의 책임자가 나서지 아니하고
누군가의 질책이라도 받을까 두려워 공정을 서두르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가다리 밑에 벌써 균열이 가고 한밤중에 그 균열간곳을 메꾸려
공사를 강행한것을 주민들이 목격하고 데모를 하였지만 그 누구하나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고
다만 고가다리 반대대책위원장만 주민들이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지게 하기위해서 판사는 징역을 살렸다.
이 사고가 난 경위도 어쩌면 판사가 서류상의 검토만으로
이루어진 형식적인 절차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고였는지도 모른다.
판사가 만일 지금 이 장소에 직접 견학하고 지금까지의 우리주민들의
데모과정을 목격했더라면 아마도 이런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였을것인데
그냥 형식적인 서류상의 절차로 말미암아 잘못된 판결을 내렸는지도 모를일이다.
감리가 있고 시공사가 있다고 하지만 서로 덮어주기 바쁘고 같은 소속이기 때문에 공정한 감리가 될수가 없다.
돈이 적게 투입되기 위해서 하청에 하청을 주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가장 힘들게 고생하는 하청직원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추진할뿐이기 때문이다.
포크레인기사들도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투입되어서 돈벌기 위해 나오고
가장 희생하는 쪽은 언제나 힘없고 돈없는 서민들만 희생을 당한다.
그나마 그 곤구리가 부산은행도로쪽이 무너져 내리지 아니한것만으로도 참 다행한 일이다.
그쪽으로 그 곤구리와 철근구조물들이 무너져 내렸더라면 더 큰 인명피해를 입었을것이다.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그 높은 곳에서 곤구리와 철근구조물과 함께 떨어졌으니
그 자리에서 사망한사람이 한사람.
세멘트곤구리에 덮여 나중에 사망한 사람 두사람은 인근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중태로 말미암아 그날 모두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19일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렇게 일하시던 분들은 안타까운 목숨을 내 놓아야 하였다.
그 일을 또다시 행한다면 또 이런일이 발생할것은 뻔한 일인데 그 누가 무서워서 이일을 강행할까
상판을 2미터 더 늘이는데 그것이 무슨지짓대가 있다고 그렇게 지을까.
지금도 힘이 없어서 떨어지는데 차라도 달리는 날이면
양쪽 날개의 곤구리로 인해 그 무게는 더 감당하기 무거운 상태가 되면서
기초 곤구리의 그 하나밖에 없는 다릿발로 인해 그 다리는 생각만 하여도 끔찍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 영도구의 의원들은 아무힘도 권한도 없는것 같았다.
분명 영도구의 일인데도 목소리 높여 이야기 하면 좋을텐데.
부산시의 일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니.
피해는 우리주민들이 보고 이 다리는 그냥 지름길로 지나가는 다리일뿐인데.
영도에서 해운대로 가려면 1시간은 걸릴거리를 북항대교 하나만 건너면 되니까.
처음 이름지을때는 북항대교였던것을 또다시 이름을 바꾸어서 개정한 이름이
부산항대교라던가.
그 이름으로 바꾸니 이런참사가 일어나는구나.
남항대교/북항대교하면 오히려 좋을것인데 그 이름도 영도구와는
아예 다른 이름 부산항대교라고 하면 부산대교와 헷갈리기 쉽상이다.
그이름하나 바꾸면 그 기운도 달라지는데
돈들여 이름짓고 또 돈들여 바꾸고
영도가 섬인데 앞으론 섬이 아니다.
영도가 요지이긴 요지인가 보다.
전쟁터에서 만난이가 영도다리였고
전쟁중에도 유일하게 안전한곳이 영도였으니 그 많고 많은 피난민들이 지나간 자리라서
다른곳보다 더 많이 빌고 빌어야 되는 섬인가보다.
영도의 산이름이 봉래산이었는데
일제시대 영도의 정기를 끊으려고 고갈산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것도 물이 고갈되어 말라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산이름이다.
일제시대 우리의 민족의 정기를 하나하나씩 끊어놓으려고
이렇게 이름까지도 바꾸고 말뚝까지 전국곳곳에 박아놓은것은
분명 우리들이 민족의 혼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고갈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간혹있기는 있다.
영도의 산이 왜 봉래산인고 하니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빼어놓았기 때문에 봉래산이다.
산과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져 보이는 곳이 바로 봉래산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여름이면 벚꽃들이 만발하게 흩날리고
가을이면 억새도 피어난다.
겨울이면 소나무의 푸른기운이 감싸돌고 동백꽃도 꽃을 피운다.
봉래산을 안 오른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흐른것 같다.
봉래산을 오를때는 그 산새의 좋은기운으로 건강해지는 것을 스스로 체험할수도 있었는데
봉래산에서 내려다 보면 부산시의 전체가 보인다.
봉래산의 그 좋은 기운을 그 고가다리로 인해
영도의 좋은기운을 나쁜기운으로 몰아가는구나.
그 고가다리로 인해서 영도에 사망사고가 잘 없는데 사망사고를 간간히 접하는걸 보니
풍수의 기운이 무섭기는 참 무서운것 같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아슬아슬한 찰나의 순간에
아파트에서 떨어지는것을 지나간 아이가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
처음 공사를 시작할때부터 내가 이십년을 넘게 살아도 그런사고는 처음 접해보는것 같았다.
다리밑 엊그제 사고났던곳 그 옆지점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지점의 기운이 교차로이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곳이어서 사망사고가 일어나는 가 보다.
동부산 아이존빌의 주민들의 원성의 기운으로 이곳에 더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가 보다.
그 놀이터 앞도 다음엔 또다시 사고로 이어질것인데
사실 그 자리를 지나가는 나도 섬찟섬찟한 느낌을 받으면서 지나간다.
동부산 아이존빌의 아파트 놀이터 자리에 육영순 여사님의 비가 새겨져 있다.
그 글귀가 참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아파트가 생기기 이전에 이자리는 학교부지 자리이다.
학교부지자리중에도 일제시대 지은 학교터이다.
그러니 이자리가 얼마나 좋은자리라는건 증명된 자리이다.
일제시대를 거쳐 6.25전쟁을 거친 그 자리에 전쟁통에 버려진
무기를 수거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수집을 하였는가 보다.
그런데 불발탄이 있어서 그 불발탄이 폭파하면서 아이들의 희생이
따라서 이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만 잡으면 비가 왔다는 설이있다.
친구들과 함께 가지 못하는 소풍이기에 아이들은 심술을 부리는가 보다.
그 영혼들을 달래어주면 좋을텐데 누가 할것인가.
그 영혼들이 어디서 놀것인가 놀이터를 지키기 위해서 함께 애쓸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놀이터가 보이는 곳에 이렇듯 사고가 자꾸 이어지니
그 놀이터를 없애면 더 많은 참사로 이어지겠지.
놀이터 앞만큼은 그 곤구리공사를 못하도록 미연에 예방하는 차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구나.
그 놀이터 앞에 억울하게 손가락 꺽었다는 에스케이직원의 거짓말이 법정에
선것을 증명이라도 하는듯 에스케이가 맡고 있는 지점에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그 사고가 일어나고 난 다음 저녁에 스산하게 춥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초를 몇개
집안으로 들여 놓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날밤 영도에 눈도 오지않는 곳에 눈이 밤새 내려서 쌓여 있었다.
하늘은 분명 알고 있구나.
미타제일날
절에 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아니 초하룻날 가야지 하고 마음 먹었는데
그날은 아파서 갈수가 없었다.
그것도 소금을 가져가고 싶어서였다.
김장때 쓰라고 가져 가고 싶었는데
미타제일날 소금을 가지고 가려하니 비가 내렸다.
버스를 타고 가면 될것 같아서 가려 마음먹었을때
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우산을 쓰고 소금을 구루마에 싣고 갔다.
출발할때 비가 와서 남편은 소금이 비에 녹아내리니 다음에 가져가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꼭 가져가야 될것 같았다.
비가 와도 구루마에 싣고 갔다.
그런데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비가 왔었는데 내가 힘이 들까봐
태종대 종점에 내리니 비가 멈추어버려서 그래도 수월하게 태종사로 갈수가 있었다.
그날 따라 김장하는 날이었더라.
김장김치를 맛있게 점심먹고 큰스님의 명상전진기도 법문을 우리는 따라할수가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늘 반갑게 맞아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할따름이다.
전생에 아버지 같으신 느낌이 든다.
점심을 함께 먹는 동안 기자분께서도 큰스님의 말씀이 맞다고 말씀하셨다.
큰스님께서는 정말 바른 팔정성도를 신도들에게 가르치신다.
무엇이 바른지 제대로 가르쳐주시니 언제나 배울점이 참 많아서 나는 좋다.
명상전진기도로 해탈에 이를수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처음 내가 이 절에 왔을때는 그 명상전진기도를 하였더라면 그 누구보다 더 잘하는 나였는데
그때의 내 이름은 지금의 내 이름이 아니다.
그때는 유영이고 지금은 미송이다.
2013.12.21.동지전날.
글쓴이 .임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