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曹參判安公墓碣銘 幷序 a_181_126c
公諱縝。字栗甫。自號鶴村。姓安氏。系出竹山。其先有襄良公漢平,僖靖公社卿,文貞公克仁三世顯於麗。都廵問使淑老,都觀察使望之,延昌尉良孝公孟聃三世顯於本朝。又歷三世而爲公高曾祖祖三世者。曰副司直彦錘,僉知中樞景濂,通川郡守贈吏曹判書大楠。而司僕僉正贈左參贊諱廷燮。贈貞夫人晉州柳氏右參贊澗女者。寔公之考若妣。斯其爲公族出也。仁祖己卯。中司馬試。孝宗壬辰。擢文科。分隷成均。序陞至學正。乙未。拜承政院注書。陞爲典籍,兵曹佐郞。遭外艱制畢。拜直講,兵郞。轉司書,正言。出爲安州判官。顯宗庚子。復爲正言,兵曹正郞。又出爲靈光郡守。入爲掌令,正言。復出爲西原縣監。甲辰。以獻納召。已擢東萊府使。丁未。爲全州府尹。還爲判决事,刑兵曹參議。屢爲承旨。辛亥。觀察江原道。秩滿。例付西樞。又屢爲承旨。間爲判决事,戶曹參議。出爲淸風府使。入爲承旨。肅宗乙卯。爲安邊府使。還又出爲茂朱府使。庚申。屢拜承旨,兵戶曹參議。爲黃海道觀察使,淮陽府使。俱病辭。辛酉。擢諫長。遞而復入。以久次陞拜工曹參判。轉貳戶禮二曹。兼捴管金吾。爲開城留守三年而歸。再長諫院。再爲都承旨。一爲禮參。用藥院勞。陞嘉義。斯其爲公官歷也。生而器度夙就。幼失母。哀慕如成人。事參贊公。必有愉色婉容。疾病。禱北辰請代。喪又柴毁骨立。以至友晜弟睦親黨。多人所難及。盖公內行淳備。不易屈指。特志其大。都它可類知也。待人。和厚亡裏襮。然嚴於淑慝辨。嘗面斥醜正者。被其怨怒。遂有槐院之枳。銓曹爲擬春坊。以示公議。公兩皆悠然也。與賊鑴同庚相熟。後覵心術。乃疎絶。及其負寵用事。鉤語餂公。公正色折之。鑴氣沮。時尤菴宋文正公爲禍首。鑴黨合辭請竄。竟得允。公以承旨力爭。爲羣奸劾罷。公雖被摧敗。士論重其方格。而又長子與擧幡列。編配遠方。咸服公家敎之正。公交遊。不爲翕翕熱。尤避遠形勢。仁敬王后之膺德選也。公語人曰。永叔吾所善。今不可過從。永叔金公萬基字也。金公固士流。而公猶嫌焉。其操履之貞如此。雅性澹靜。公退。閉門高卧。絶不追逐朋儕。平居。壹以儉約自律。不喜服美。不事積著。歷中外官。訾産亡所增。昚於辭受。一芥不妄取。未嘗以私干人。亦不受人私。蚤刻厲學業。尤用工於魯論書經。旣茂有本實。發爲文辭。贍蔚典暢。俯就塲屋。輒屈曹偶。而殊不自喜。言則古昔。愨而有味。其語子弟曰。先考讀小學書。終身服行。吾亦一心敬信。爾曹勉之。又以守靜講學。申申戒導。公儒而不迂。周知世務。於事鮮有底滯。同春宋文正公長本兵。任以軍政。甚加稱賞。及後出綰八符。以至按藩分筦。罄無不宜。隨著異績。一時翕然。以通才歸之。參贊公丙丁亂後。常曰。吾登朝籍久矣。一未曾屈膝虜庭。此差可自幸。公又四差燕价。俱以公格不行。乃曰。吾不踏腥羶之窟。待眞人出。一覩禮樂文物。豈不快哉。語雖近戱。志尙可見。斯其爲公行治也。生于萬曆丁巳十二月辛亥。卒于肅宗乙丑正月己卯。以是年三月丁亥。葬于原州雲谷里。以前後二夫人合祔。前夫人全州李氏。學生㫥女。賢而不壽。留二男。長相億。次相萬。俱義禁都事。俱游二宋文正門有名。後夫人安東權氏。牧使義中女。歸公而公通籍。其佐公廉與惠者非一。生三男一女。男相眞司宰僉正。次相泰,相英。女適監察朴弼英。曰允廸,允禧。相億出。郡守允升。李恒坤,進士李翼明,縣監申喜集妻。相萬出。允觀,允恒。李思泰,宋潭源,南濟彦妻。相眞出。而允恭其庶子。允謙,允復。正郞李益炡妻。相泰出。奉事允德,允澤,允定,允吉。朴興漢,進士洪啓宇妻。相英出。參判師洙,申廸,校理林象德,持平金漢喆,李普昌妻。朴弼英出。是爲公內外孫。而其爲曾孫者。曰郡守宗海,縣監宗國,宗彬,經歷宗臣,宗卨,宗說,宗哲,宗傑,宗述,宗岳,宗衡,宗岱,宗崙,宗尹,宗偉,宗望,宗尙,宗老,宗福,宗祿,宗祏,宗業。爲玄孫者。曰進士栻,杓,格,榏,橚,櫟,權,㯓。外出幼未名者。俱不錄。捴九十餘人。斯其爲公始卒若媲匹子姓也。不佞晩生。不及公在朝時。而先君子雅習於公。固嘗有承聞家庭者矣。公生世六十有九年。仕宦餘三十年。居家爲孝子。持身爲介士。治民爲循吏。立朝爲信臣。履順居正。聲實並臻。善毁者莫敢瑕玷。公豈非昭代之完人哉。是宜刻銘金石。以垂來世。其詞曰。
維士何觀。必觀其內。外澤中乾。如黑而采。末路黭黮。互見壞敗。公有質行。後素之繪。立朝事君。惟義與配。寒燠迭變。栝栢自在。興官耆事。又可傳載。有孚盈缶。其心樂豈。曷由以致。內修是賴。我銘斯懿。用風俗輩。
(번역문)
공의 휘(諱)는 진(縝)이요 자(字)는 율보(栗甫)이며 호(號)는 학촌(鶴村)이고 성은 안씨(安氏)이니, 계통이 죽산(竹山)에서 나왔다. 그 선대에 양양공(襄良公) 휘 한평(漢平)과 희정공(僖靖公) 휘 사경(社卿)과 문정공(文貞公) 휘 극인(克仁)의 3대는 고려조에 현달하였고, 도순문사(都巡問使) 휘 숙로(叔老)와 도관찰사(都觀察使) 휘 망지(望之)와 연창위(延昌尉) 양효공(良孝公) 휘 맹담(孟聃) 3대는 조선조에 현달하였으며, 또 3대를 지나 부사직(副司直) 휘 언추(彦錘)와 첨지중추(僉知中樞) 휘 경렴(景濂)과 통천 군수(通川郡守) 증 이조 판서(吏曹判書) 휘 대남(大楠)은 공의 고조ㆍ증조ㆍ조부 3대이고, 사복시 첨정 증 좌참찬 휘 정섭(廷燮)과 증 정부인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우참찬 유간(柳澗)의 딸인 분은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니, 이것이 공의 문벌과 출생이다.
공은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분권(分圈)에서 성균관에 예속되어 차례로 승진해 학정(學正)에 이르렀으며,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임명되어 전적(典籍)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되었다. 부친상을 당하여 탈상(脫喪)한 뒤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병랑(兵郞)에 임명되었다가 사서(司書)와 정언(正言)에 옮겨졌으며, 지방으로 나가 안주 판관(安州判官)이 되었다.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원년)에 다시 정언(正言)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또 나가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되었다가 들어와 장령(掌令)과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다시 나가 서원 현감(西原縣監)이 되었다가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헌납(獻納)으로 불려 들어와 얼마 안 되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발탁되었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돌아와서 판결사(判決事)ㆍ형조 참의(刑曹參議)ㆍ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고 여러 번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만기(滿期)가 되어 예에 의하여 서추(西樞)가 되었으며, 또 여러 번 승지(承旨)를 하였고 그 사이에 판결사(判決事)와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또 나가 무주 부사(茂朱府使)가 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승지와 병조 참의ㆍ호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와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는데 다 함께 병으로 사양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81년 숙종 7년)에 발탁하여 대사간(大司諫)으로 교체되어 다시 들어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고, 호조 참판과 예조 참판에 옮겨져 총관(摠管)과 금오(金吾)를 겸직하였다가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어 3년 만에 돌아와서 재차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두 번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며, 예조 참판을 한 번 역임하였는데, 약원(藥院)의 공로로 해서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니, 이것이 공의 관직 이력이다.
공이 출생하여 도량이 일찍 성취되어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어른과 같이 하였으며, 참찬공(參贊公)을 섬기는 데 반드시 화락한 안색으로 하였고 병환이 있을 때는 북두칠성에 빌어 대신 앓기를 청하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야위어 뼈만 남았으며, 형제간에 우애있고 친척간 화목함에까지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웠던 바가 많았으니, 대개 공이 집안에서의 행실을 순후하게 갖추어 변역치 않는 굴지(屈指)의 대단한 뜻이 있으므로 그 대략 여타의 것을 미루어 알 만하다. 사람을 접하는 데는 화락하고 후덕하여 안과 밖의 다름이 없었으나 착하고 악한 것을 분별하는 데는 엄격하였는데, 일찍이 추악한 자를 면전에서 물리쳐서 그의 원망과 노여움을 샀으므로 드디어 승문원(承文院)에서 장애가 있었고 이조(吏曹)에서 춘방(春坊)에 추천하였을 때는 공의(公議)만 보였는데, 공은 이 두 곳에 모두 태연하였다. 윤휴(尹鑴)와는 나이가 같아 서로 친숙하게 지내다가, 뒤에 그의 심술을 보고 이에 멀리하여 만나지도 않고 끊었었는데, 그가 은총을 입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기에 미쳐 말로 유인하여 공을 낚아채려 하므로, 공이 안색을 바로 하여 거절하자 윤후의 기세가 꺾였다. 이때 우암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화환의 우두머리가 되어, 윤휴의 일당이 합사(合辭)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여 마침내 윤허를 얻자 공이 승지(承旨)로서 힘써 간쟁하다가 뭇 간신(奸臣)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는데, 공이 비록 패배를 당하였으나 사람들의 공론이 그 방정한 표준을 중하게 여기었고, 또 공의 장자(長子)가 거번(擧幡, 편듦)의 반열에 참여하여 먼 지방에 귀양을 가게 되었으므로, 공의 가정 교훈이 올바른 것에 모두 감탄하였다.
공은 교유(交遊)에 있어 구차하게 화합하지 않았고 더욱 형세를 피하여 멀리 하였는데, 인경 왕후(仁敬王后)가 세자 빈(世子嬪)에 간택되었을 때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영숙(永叔, 김만기(金萬基))은 내가 좋아하는 처지였으나 지금부터 지나치게 따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영숙은 김만기(金萬基)의 자(字)이다. 김공은 진실로 사류(士流)였는데도 공이 오히려 혐의스럽게 여기었으니, 그 지조의 곧은 것이 이와 같았다. 우아한 성품이 담박하고 고요하여 공무를 마치고 물러와서는 문을 닫고 높이 누어 친구들과 접하지 않았으며, 평소에 한결같이 검소하고 절약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속하여 화려한 의복을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쌓아 두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안팎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재산을 늘인 바가 없었으며, 사양하고 받는 데 신중하여 하나의 지푸라기라도 망녕되게 취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개인적인 일을 사람에게 요구하는 일이 없었고 또 사람으로부터 개인적인 일을 받아들이지도 아니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서 학업에 힘쓰고 더욱 ≪논어(論語)≫와 ≪서경(書經)≫에 힘을 기울여 이미 성대하게 근본의 충실함이 있었고 드러내어 문사(文詞)를 지음에 있어 매우 풍부하고 통달하였는데,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 문득 동배(同背)들을 굴복시켰어도 절대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고 말을 하면 옛일에 대해 정성을 다해 음미(吟味)함이 있어 그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가 ≪소학(小學)≫을 좋아하여 몸을 마치도록 힘써 실천하였고 나 또한 일심(一心)으로 공경하여 믿었으니, 너희들도 힘쓸지니라.”라고 하였고 또 조용히 학문을 연구할 것을 거듭하여 계도(戒導)하였다. 공은 유자(儒者)이면서도 우활하지 않고 세상의 형편에 대하여 두루 알아 일이 막히는 데가 없었는데, 동춘(同春)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군정(軍政)을 공에게 맡기고 심히 칭찬을 하였다. 후에 외직과 내직을 고루 거치다가 도백(道伯)에 이르러 마땅하지 않음이 없었고 따라서 특이한 치적(治積)을 드러냈으므로, 한 시대 사람들이 흡족하게 통달한 재능가로 인정하였다.
참찬공이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과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4년) 호란 뒤에 항상 말하기를, “내가 조정(朝廷)에 오른 지 오래되었는데, 한번도 오랑캐의 조정에서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조금이나마 스스로 다행한 일이라 할 만하다.” 하였는데, 공이 또 네 번이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가서 모두 공직에 대한 격식을 행하지 않았고, 이에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의 소굴을 밟지 아니하고 진인(眞人)이 나오기를 기다리어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한번 본다면 어찌 쾌하지 아니 하겠는가?” 하였다. 그 말이 비록 희롱에 가까웠으나 그 뜻은 오히려 볼만한 것이니, 이것은 공의 행의와 다스린 업적이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 12월 신해일(辛亥日)에 공이 출생하여 숙종 을축년(乙丑年, 1685년 숙종 11년) 정월 기묘일(己卯日)에 졸(卒)하여 이해 3월 정해일(丁亥日)에 원주(原州) 운곡리(雲谷里)에 장사지냈는데, 전ㆍ후 두 부인을 합장하였다. 먼저 부인 전주 이씨는 학생(學生) 이명(李㫥)의 딸로 현숙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안상억(安相億)과 차남 안상만(安相萬)이 모두 의금부 도사(義禁莩事)를 지냈고 함께 두 분 송 문정공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명성이 있었다.
뒤의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목사(牧使) 권의중(權義中)의 딸로 공에게 시집와서 공이 벼슬길에 나아가자 공이 청렴결백하고 어진 정사를 베풀도록 내조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안상진(安相眞)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이고 차남은 안상태(安相泰) 삼남은 안상영(安相英)이며 딸은 감찰(監察) 박필영(朴弼英)에게 출가하였다. 안윤적(安允迪)과 안윤희(安允禧)는 안상억의 소생이고, 군수 안윤승(安允升)과 이항곤(李恒坤), 진사(進士) 이익명(李翼明), 현감(縣監) 신희집(申喜集)의 아내는 안상만의 소생이다. 안윤관(安允觀)ㆍ안윤항(安允恒)과 이사태(李思泰)ㆍ송담원(宋潭源)ㆍ남제언(南濟彦)의 아내는 안상진의 소생이고 안윤공(安允恭)은 서출이며, 안윤겸(安允謙)ㆍ안윤복(安允復)과 정랑(正郞) 이익정(李益炡)의 아내는 안상태의 소생이고, 봉사(奉事) 안윤덕(安允德)ㆍ안윤택(安允澤)ㆍ안윤정(安允定)ㆍ안윤길(安允吉)과 박흥한(朴興漢)ㆍ진사 홍계우(洪啓宇)의 아내는 안상영의 소생이며, 참판 박사수(朴師銖)와 신적(申迪)과 교리 임상덕(林象德)ㆍ지평 김한철(金漢喆)과 이보창(李普昌)의 아내는 박필영의 소생이니, 이것이 공의 내외손(內外孫)이다. 그 증손이 되는 자로는 군수 안종해(安宗海)ㆍ현감 안종국(安宗國)ㆍ안종빈(安宗彬)ㆍ경력 안종신(安宗臣)ㆍ안종설(安宗卨)ㆍ안종열(安宗悅)ㆍ안종철(安宗哲)ㆍ안종걸(安宗傑)ㆍ안종술(安宗述)ㆍ안종악(安宗岳)ㆍ안종형(安宗衡)ㆍ안종대(安宗岱)ㆍ안종륜(安宗崙)ㆍ안종윤(安宗尹)ㆍ안종위(安宗偉)ㆍ안종망(安宗望)ㆍ안종상(安宗尙)ㆍ안종노(安宗老)ㆍ안종복(安宗福)ㆍ안종녹(安宗祿)ㆍ안종석(安宗祏)ㆍ안종업(安宗業)이요, 고손자[玄孫]가 되는 이로는 진사 안식(安栻)ㆍ안표(安杓)ㆍ안격(安格)ㆍ안익(安榏)ㆍ안숙(安橚)ㆍ안역(安櫟)ㆍ안권(安權)ㆍ안근(安根)ㆍ안흡(安㯓)이다. 외손의 소생과 어리어 작명하지 않은 자는 다 기록하지 아니하였는데 도합 90여 명이 된다. 이상이 공의 출생ㆍ사망 및 배위(配位)와 자손들이 된다.
내가 뒤늦게 태어나 공이 조정(朝廷)에 있을 때에 미처 뵈옵지 못하였으나 나의 아버지가 공에게 학습하였기에 일찍이 가정에서 들은 바가 있었다. 공은 세상에 탄생하여 69년을 사셨고 30여 년 동안 벼슬을 하였는데, 가정에 있어서는 효자가 되었고 몸을 가짐에는 지조 있는 인사가 되었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순량(循良)한 관리였으며 조정에 있어서는 믿음직한 신하가 되었다.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였고 정도(正道)를 시행하여 명성과 실상이 함께 널리 알리어졌기에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감히 결점을 찾지 못하였으니, 어찌 밝은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을 비석에 새기어 후세에 전하는 것이 마땅하겠도다. 그 문사(文詞)는 다음과 같다.
오직 선비는 무엇을 볼 것인가? 반드시 그 내행(內行)을 볼지어다. 밖은 윤택하지만 속이 건조하면 검은 데 색칠한 것과 같아, 말로가 암담하여 서로 파괴됨을 볼 것이다. 공은 질박한 행실이 있어 흰 바탕 뒤에 있는 그림 같아서, 조정에 있을 때와 임금을 섬길 때 오직 의리만을 짝하였네. 덥고 찬 계절 번갈아 변하지만 전나무와 잣나무는 스스로 존재하듯, 관직에 떨친 기덕(耆德)의 사적 또 전하여 기록할 만하도다. 성실함이 동이 속[缶中]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화락하였는데, 어디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을까? 마음을 수양함에서 힘입은 것이라네. 이 아름다움을 내가 명에 써서 속배(俗輩)들을 일깨워 주고자 하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안진 [安縝]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