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변화는 目的因에 의해서 형상이나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善하다고 하는 아리스토탈레스는 플라톤의 비관론을 낙관론으로 대체하였고, 모든 지적 탐구의 목적이 오로지 사물에 대한 이름과 그것을 직관적으로 정의하는 말의 定義論에 있다는 비과학적 본질주의를 주장하였다.
기독교적 신비주의 믿음을 민족주의로 창시한 피히테를 이어서 투쟁의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투쟁의 최종적인 일치인 동일철학은 기존 체제와 질서를 옹호하는 윤리적 법적 실증주의의 간결한 표현으로, 합리적인 모든 것은 실제와 일치해야 하므로 참일 수밖에 없다는 즉, 힘이 진리라는 헤겔의 국가주의는 현대 全體主義의 토양과 비료가 되었다.
사상적 원천에서 헤겔 우파와 동일한 맑시즘은 인도주의적 좌파라는 점에서 구별되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려는 實踐的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과학적 한계인 미래가 미리 결정되어 있을 때에 과학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사회학적 決定論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영역에서의 예측을 역사주의적 예언과 동일한 것으로 오도하였다.
유물론 또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이 아닌 經濟的 역사주의로 역사발전의 중심적인 목적이 삶의 정신적 경제적 自由임에도 불구하고 사회형성이 필연적인 경제적 조건에만 의존한다 함은 자유로운 사상과 상호작용한다는 현실을 외면하였고, 객관적 계급상황이 심어주는 계급의식에서 상황이란 생산성 중가라는 사회적 경제구조이며 계급이익은 제도적 범주라는 상황에서, 체제의 꼭두각시인 계급은 체제개선을 이루지 못하기에 착취자와 피착취자와의 충돌은 필연적이라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인 것이다.
또한 모든 법률과 사회체제에서의 역사적 유물론은 경제적 조건에 토대를 둔 상부구조에 불과한 방만한 자본주의 제도에서 정부는 지배계급의 독재이며 하나의 계급만 남으면 국가도 사라져 경제적 실체를 변화시킬 수 없기에 政治無力化를 주장하지만, 자유와 평등의 도덕적 이념에 의한 제도적인 경제적 간섭주의와 민주적 정치제도의 바탕인 통치자를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에 의하여 정치무력화는 비판된다.
그러나 사회학은 그 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율적 체계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결정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맑스는 자율적 사회학의 옹호자였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의하여 사회혁명이 성취된 후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경제적 사회주의라는 맑스의 豫言은 혁명을 성취한 계급에서 새로운 계급을 형성할 수 있음이 간과되었고,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여러 형태의 간섭주의에 의해 대치되었거나 광풍에 휘말렸던 파시즘이 역사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러한 사회혁명은 역사적 개념으로 프롤레타리아가 폭력을 동원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폭력 사용의 정당성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평등에서의 역사적 진보는 권력을 오로지 制度的으로 통제함으로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축적에 의한 생산성의 증가는 소수에 대한 부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빈곤과 비참을 초래하는 자기모순적인 자본주의가 입법에 의한 간섭정책에 의하여 교정됨으로써 역사적 빈곤에 의하여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과 품위 있는 인간의 삶을 위한 자유를 사랑하는 강조된 倫理는 비판적 이성의 지원을 받아 세계를 변화하려는 평등주의와 더불어 근본적으로 국가를 해체함으로써 열린사회에 대한 강력한 신앙을 제시한 미래형 도덕적 實證主義자였다.
역사란 시대마다 자기의 관점에서 再解釋할 권리가 있는 것이므로 역사주의가 말하는 역사 자체나 인류의 역사는 당연히 없는 것으로, 흔히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권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인간이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할 역사의 의미나 법칙은 없고, 역사에 의미와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일 뿐이다.
'인간은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는 마르크스의 초기 저술 가운데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마르크스의 행동주의라고 묘사될 수 있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포이에르바흐론)의 마지막 부분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