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2리에 있는 신암리 공소는 모진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온 사람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생겨났던 공소이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신암리(神岩里)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부락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혜화동)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1925년 개성본당 관할의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본격적인 지역복음화의 여정이 시작됐다. 현재는 동두천 성당 관할 공소이다.
◆ 신암리 공소 약사
개성 본당 관할 공소 :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의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었다. 이 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빠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루도비꼬, 제2대, 1866~1928년) 신부였고, 공소회장은 박성로(朴聖老, 프란치스코) 형제였으며, 공소 신자수는 3백명 정도 되었다. 최창근 신부는 1년에 두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플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1919년에는 최창근 신부의 후임으로 충남 서산에서 사목하던 안학만(安學滿, 루가, 1889-1944) 신부가 제3대 주임신부로 부임해 왔으며, 이때 제2대 공소회장에는 박원문(朴元文, 마르코) 형제가 임명되었다. 안학만 신부는 6년간 개성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1924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1881-1948) 신부가 평북 의주 본당에서 부임해 왔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사제가 개성 본당에서 신암리로 오려면 짐꾼 두 사람과 어른 복사 한 사람을 대동하여 기차를 타고 문산까지 와서는 그곳으로 마중을 나간 공소회장과 합류하여 신암리까지 60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러한 형편에 1년에 두 차례씩 사제를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하여 240리나 되는 길을 도보로 오간 신암리 공소 회장들의 노고는 나태한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신암리 준본당 : 제2대 공소 회장이던 박원문 형제는 거리상의 불편함 등을 이유로 들어서 서병익 신부의 동의서를 첨부하여 민덕효(閔德孝, Mutel, Gustave-Charles-Marie) 대주교에게 신암리 본당의 설립을 간청하였다. 마침내 이 청이 받아들여져서 1925년 3월에 신암리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1881-1952, 1910년 서품 20번째 한국사제) 신부를 초대 주임신부로 맞이하였다.
신암리 본당에서 관할한 구역은 연천군, 양주군, 파주군, 포천군, 가평군, 고양군 일대였다. 신암리 본당 신자수는 공소 시절보다 조금 늘어 370명 정도였다. 너무 영세한 지역인지라 자선회를 조직하여 절미운동도 하였으나 신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궁핍은 날로 더해 갔다. 결국 1930년 4월에 최 신부는 경기도 안성군 미리내 본당의 주임신부로 떠나고 신암리 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되는 비운을 맞았다.
행주 본당 관할 공소 : 1931년 신암리는 행주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이 시절 행주 본당의 주임신부는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와 그 뒤를 이을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였고, 이재현(李載縣, 베네딕도) 형제가 신암리 공소의 회장으로서 1931년부터 1944년까지 봉사하였다.
덕정리 본당 관할 공소 :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고, 프랑스에서 온 송세흥(宋世興, 레오) 신부가 주임신부로 오랫동안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신암리 공소에도 매주 와서 성사를 집전하는 등 교우들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송 신부는 1944년 3월 갈곡리(葛谷里)로 열병 환자에게 병자 성사를 주러 갔다가 그만 열병에 전염되어 서울에서 치료 받다가 한달 후 선종하였다.
의정부 본당 관할 공소 : 1946년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이 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 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동두천 본당 관할 공소 : 우여곡절 속에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곤 하는 끈기있는 신앙을 간직해온 공소는 마침내 1959년에 동두천 본당 소속의 공소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조 : 동두천본당 30년사, 1990, 천주교 동두천 교회]
현재 신암리 공소 관할 구역은 남면과 은현면이며, 신자수는 54세대 약 140명이다. 공소회장은 이정규 베네딕또 형제가 맡고 있다.
자료 수집에 공소회장과 동두천 본당 김 비오 사무장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용,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