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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의 십이(12)신조 채택에 대한 고찰
서론
한국장로교회의 설립과 함께 세워지고 고백되어진 십이(12)신조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이 신조에 대한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있지 못하다. 십이신조의 채택은 한국장로교회가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단점도 발견된다. 본 글을 통해서 이와 같은 십이신조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발견하여 한국장로교회의 선조채택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본론
1.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의 설립
1884년 9월 20일에 미국북장로회의 알렌(Horace N. Allen)의사 부부가 조선에 왔고, 이듬해 4월 5일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같은 해 6월에 헤론(John W. Heron)의사 부부가 입국해서 이들이 조선에 미국북장로회 선교교회를 창설했다.1)
선교회는 교인을 문답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선교회가 속한 자국 교회의 회원으로 받았다.2) 그러나 188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의 데이비스(H. Davies)가 입국하므로3) 그 해에 두 선교회는 “조선에서 정교 신경을 믿는 일반신자는 연합하여 일개 독립 장로회를 설립하는 것이 가타하고 그 목적으로 연합공의회를 조직코져” 하여 미국북장로회 선교회와 빅토리아 선교 연합공의회를 조직하였다.4) 그러나 이 연합공의회는 1890년 데이비스가 사망함으로 중지되었다가, 남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입국(1892)하므로 그 이듬해인 1893년에 남.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원 목적대로 공의회를 완전히 조직하여 이후 입국하는 선교회는 그 공의회에 들어오도록 하고 그 이름을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공회’라 했다.5)
공의회는 바로 그 해에 곧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사들을 포섭했고, 1898년에 카나다 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이에 가입하므로 네 장로교단 선교부를 대표하는 공의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공의회에선 친목하며 의논만 할 뿐으로 각기 설립한 교회에 대한 치리권은 각 선교회 모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공의회가 교회 치리권 즉 노회로서의 권한을 가지려면 각 선교회 모교회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래서 각 모교회에 요청한 결과 1900년엔 공의회가 치리권이 있는 회가 되었고 그 해 그 회의에서 이듬해부터는 조선인총대를 첨가토록 결의하여 조선어를 사용하는 회를6) 따로 갖기로 했다. 그러나 입교인은 여전히 선교 모교회에 속하게 되어 있었다.
1901 공의회는 조선자유장로회 설립방침의 정위원을 선정하고 다음 해에 그 위원 보고를 토대로 최고등회로서의 전국노회의 조직을 결의하고 그 노회에서 쓸 헌법과 각양 세칙을 준비토록 하는 한편, 각 모교회 총회에 노회 설립에의 허락을 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보고를 받은 1903년 공의회에서 카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위원의 회답은 ‘가’였으나 미국의 두 장로회의 답은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에 결국 두 장로회 전도국이 답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일에 여차히 타교회와 연합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가하나 지금은 유안하는 것이 좋으니 차는 엇짐니뇨 하면 조선 전국에 당회는 몇 곳에 불과하고 조선목사는 아직 없은즉 차등 유약한 교회 중에 선교사 등이 너무 큰 권세를 장악 하여 저 유약한 교회의 장성하는 것을 방해할 듯한 소이라7)
이와 같은 부정적인 답변으로 인해서 공의회는 다시 편지하면서 실제적으로 준비된 상황과 자유교회 설립의 시급성을 언급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조선 목사를 장립코자하면 이개 도리 외에 없나니 조선노회를 설립하든지 본국 노회에 속한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라 제이자에 의하여 진행하면 자연히 조선에 장로교회가 일파뿐 아니라 사파에 분하여 성립한 사가 많을지니라. 이제는 한 교파되기를 원하였느니라8)
선교공의회 조직 초기부터 가장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던 단일 한국장로교회 설립에의 염원과 조선목사의 장립이라는 목전의 문제9)를 결부시킨 지혜로운 요청이었다. 1905년 마침내 각 선교회 본국 교회들의 허락을 다 받은 가운데 공의회는 1907년에 조선야소교장로회를 조직할 것과 그때에 조선목사를 전도목사로 장립할 일들을 결의하고 새로이 세워지는 조선교회를 위해 교회신경을 채용했다.10) 그리하여 1907년 공의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모이던 달인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전일에 준비한 대로 조선전국독노회가 조직되었다.11) 그 후 이 독노회는 다섯 해가 지난1912년에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대한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산하에 일곱 노회를 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그 최종적 조직을 마쳤다.12)
2. 12신조 채택의 의의와 배경
독노회를 위한 신경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1905년의 공의회에서 이 신경 채용을 결의할 때 행한 위원 보고는 새로운 신경을 작성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경과 선교 각 지방에서 쓰고 있는 신경을 비교해 보고 그 중에서 조선교회의 형편에 맞는 것을 택해서 채용하려 했다고 하며 그래서 우리처럼 바로 그 얼마 전에 새로이 조직한 선교지 교회인 인도자유장로교회가 채용한 신경을 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신경이 이 두 나라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모든 선교지 교회들의 신경이 되어 이것을 통해 각 교회들이 연결케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13) 그리고 곽안련은 이 신경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주고 있다.
조선교회를 설립한 본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찬성함 이니라.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성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 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의당히 교수할 것으로 알며
이 부분을 두고 그는 이 신경 채택이 고대 장로회 모든 신경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히 증거하는 것이요, 미국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경을 페지한 것이 아니라 그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을 참고 건으로 둔다고 확대 해석하고 있다.14) 그리고 그 당시(이 글은 1919년에 쓰여진 것이다) 신경과 헌법의 개정을 묻는 이들을 의식하면서 이 십이신조의 우수성을 변론하고 있다.15)
먼저 그는 이 십이신조가 간단하고 명백하여 알기가 용이한 점에서 만국장로회 신경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하며,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기타 유명한 일곱 신경 보다 낫다고 한다. 전통적 신경이 유아의 택하심과 예정에 대한 것과 같은 명백치 못한 교리로 논쟁을 야기시킴에 비해 십이신조는 그런 꼬투리 잡힐 내용은 아예 없다는 것이다.16) 다음으로 동서양 형편의 차를 언급하며 이 십이신조가 그러한 상황에 적절하면서도 성경에 부합한 신조임을 말한다.17)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신경채택이 엄격한 칼빈주의를 지향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그것이 장감연합의 단일한 한국교회를 의식한 에큐메니칼한 동기에서 되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김양선이 이 신경이 “오늘날까지 한국 장로교의 신조로 준수되어 왔으므로 한국 장로교인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근본주의(Fundamentalism)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 십이개조의 신경은 ....일련의 엄격한 칼빈주의적 신앙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18)고 지적하는 것처럼 칼빈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선교초기의 선교지 교회를 위한 선교사들의 배려에서 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 대해서 김영재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본국 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교백을 한국 장로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으로 인정하도록 했으나 특정한 문화와 시대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나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도록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십이신조를 택하게 한 것은 선교지의 문화적인 상황을 감안하고 선교지 교회의 신앙적인 자율성을 배려한 데서 온 고마운 조처였다고 본다.
그러나 십이신조의 채택과 관련하여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신조나 교리중심으로 세워진 한국장로교회의 초기모습을 매우 비판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우선 백낙준은19)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규범을 제정하여 주었으므로 신자들은 자기의 신앙체험의 표현을 기다릴 것도 없이, 다 제정하여 준 신앙고백을 받게 되었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한국인의 손으로 쓰여진 신앙고백은 아직없다.
이 비판은 민경배에 오면 그 강도가 훨씬 높아진다. 그는 1905년 공의회시에 행한 신경 준비위원의 보고를 언급하면 서,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의 부재를 야기시킨 선교사들의 처사를 비판한다. 즉 ‘조선야소교 장로회 형편에 적합한 신앙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하면서도, 우리의 정서가 배인 우리 한국인의 것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던 점을 지적하며 “그때 마침 충천하듯 솟고 거기다 맑기까지 한 한국인의 신앙의 결정을 다듬지 않고 하필 인도의 신경을 차용한 까닭과 명분을 알 수 없다”고 어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20)
그는 또 다른 글에서 그 보고의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 언급하며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이 신경이 장차 아시아의 모든 장로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면 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희망이었다.” “인도와 한국 그 신경이 같을 수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인도의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경보다 ‘간단하여도 요긴한 것은 개유’하기 때문에만 그대로 적용하였다면, 문제는 커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여기 심각한 문제는 토착 고백 신도의 형성에 대한 관심과 의의의 부재를 먼저 탓하지 않을 수 없다21)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에 비해 남북감리교회가 합해서 단일한 조선 감리교회가 되던 1930년 12월에 감리교회는 조선적 교리 형성에 관심을 갖고 토착적 고백 성립에 거보를 내딛었다고 언급한다.22) 더 나아가 서정민은 “선교부의 결정에 따라 채용한 신경은 한국인의 고백이 부재한 사실만으로써도 창립 노회의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고 개탄한다.23)
이런 비판들은 신조를 싫어하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점이다. 물론 우리는 신조의 채택 뿐 아니라 교회의 조직과 정치에 관한 문제 등 교회의 제반 사항에 관한 것을 선교사들의 지도를 따라 결정해야 했던24) 한국교회 초기의 모습에는 많은 부분에서 미흡함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선교초기 모든 것이 부족했던 현실을 감안하면 진보적 입장의 비판은 지나치다. 또한 장로교회는 모(母)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선교지에 동일한 신앙고백과 장로정치를 세워가며 보편적인 공교회를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원리로 생각한다. 따라서 모교회와 같은 신앙고백과 정치를 표방하려고 노력한 선교초기의 12신조 채택은 신조중심의 장로교회 모습을 잘 계승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결국 간명하게 쓰였으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포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십이신조는 선교 초창기였던 한국교회에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장점이 정작 교회가 자라면서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에 대해 어떤 성숙한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을 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되어버린 것도 지적해야 한다.25) 십이신조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보다는 선교초기에 우리에게 맞는 한국교회의 것이지만, 장로교회를 표방하는 장로교인의 것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26)
3. 12신조의 채택
앞에서 밝혔듯이 선교공의회는 조선자유장로교회 설립 준비하면서 그 설립에서 쓸 신경을 미리 마련했다. 그것은 노회 조직에 필요한 법제적 준비의 일환이었다. 공의회는 그것을 위해 1910년에 만국장로회헌법 번역위원을 택하여 번역케 하고 이듬해에 조선자유장로교회 설립방침의정위원의 보고를 따라 헌법준비위원을 선택하여 공의회에서 먼저 채용했다가 노회 때 제의할 헌법을 준비토록 한 것이다.29) 그에 따라 각국 모교회로부터 노회설립의 허락을 다 받은 1905년에 공의회는 조선노회를 위한 교회신경을 의정 채용했던 것이다.30) 이 때에 행한 위원보고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새로이 신경을 제정하지 아니하고 만국장로회에서 전부터 사용하는 신경과 신경에 대하여 개정한 것과 해석한 것과 신경도리에 대한 광고와 또 선교 각 지방에서 통용하는 신경을 비교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형편에 적합한 신경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 이 신경은 몇 개월 전에 새로 조직한 인도국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하니 우리가 이 신경을 보고한 때에 소망하는 바는 이 신경이 조선, 인도 두 나라 장로회의 신경만 될 뿐 아니라 아세아 각 나라 장로회의 신경이 되어 각 교회가 서로 연결하는 기관이 되기를 응망한다.31)
이처럼 인도자유장로회의 신경을 우리나라 교회의 신경으로 택한다는 것이다. 이 신경이 십이신조이다. 인도에서는 장로교선교교회연맹이 이 십이신조에 근거해서 형성되었는데, 남부만은 1901년에, 인도 전지역은 1904년에 되어졌다. 영국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작성한 이 십이신조는 1904년 12월 앨라하뱃에서 채택되고 1905년 앨라하뱃 선교출판사에서 인쇄되었는데, 그것은 ‘십이신조, 수락 형식, 선언문, 교회 헌장, 27개 교칙, 지역 조직’등의 내용 중 일부로서,32) 우리나라 독노회에서 채택할 때 십이신조와 수락 형식만을 받아들여 서문을 첨부한 것이다.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그 창립노회는 앞서 공의회에서 선택한 신경위원과 정치위원이 제정보고한 신경과 정치를 1년만 시험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33) 다음날 회의에서 대한장로교회 신경과 정치를 조사할 위원 7인을 선정해서 다음 노회 때 보고하도록 결정했다.34) 그런데 우리가 이 결정의 결과를 명확히 결론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1908년 독노회록에 있는 정치조사위원의 보고에는 그 전해에 선정한 7인 조사 위원을 1년 더 연장해서 조사케 할 것과 조사 위원 중 마포삼열, 한석진 양씨를 특별 위원으로 선정했다는35) 내용만 있을 뿐, 신경과 정치 채택에 관한 내용은 노회록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듬해인 1909년 회록에도 그에 대한 사항은 보이지 않고 다만 직원명부록36) 의 ‘정치위원’항에 기록되어 있는 7인의 위원들이37) 1907년 창립노회시에 선정한 ‘신경과 정치 조사 위원’과 일치하고 있음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그 다음 해인 1910년 회록에서는 그에 대한 토의가 그 본회록 중에는 전혀 나타난 것이 없음에도 하편 부록에 ‘신경. 정치규칙’이 기록되어 있다.
십이신조 채택에서 끝으로 살펴야 할 것은 조선교회가 그 신경을 채택하면서 첨가한 그 신경의 서문이다. “...그 중에 성경 요리 문답 적은 책을 더욱 교회 문답으로 삼나니라”38)는 문구는 한글로만 보아서는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즉 ‘적은 책’이란 것인데 그 본 의미인 ‘小冊’이라는 말로도 볼 수 있으나 ‘기록한 책’이란 말로 이해할 소지도 있는 것이다. 이장식의 기독교신조사II집은 이 부분을 소책이란 말이 없이 성경요리문답이라고만 하여 원문과 다르다.39) 그러나 전휘집을 보면 확실해진다. “ ....기중에 성경요리문답소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40) 곽안련은 신경(십이신조)과 성경소요리문답 두 가지를 조선 장로회 ‘신앙의 표준’이라 한다.41) 다시 말하면 성경 소요리 문답을 십이신조와 같은 수준에서 조선교회의 헌법의 한 부분으로 받은 것이다.
4. 십이신조의 교리적 특징
십이신조의 중요한 교리적 특징은 먼저 개혁파 신학의 중요한 교리들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경관에 대한 고백, 신론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론, 인간론에 있어서 죄론에 대한 정확한 정의, 기독론에 있어서 이성일인격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구원론에서 성령의 역사와 선택에 대한 내용이 고백되고 있다. 교회론과 관련해서는 성례론을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종말론에 있어서는 심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고백, 부활 등이 고백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전통적으로 개혁파 교회가 고백해 온 중요한 신앙적 내용들이다. 이런 내용들이 고백되었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전통적인 개혁파 신앙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경건한 청교도적 삶의 모습도 보수주의적인 신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중요한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이신조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리적 내용들이 포함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발견되는 많은 문제점들도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제일 중요하게 지적될 수 있는 몇 가지의 교리적 문제점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성경관
제1조는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신앙고백의 초두에 성경에 관해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42) 또한 초대 한국교회의 성경중심의 신앙과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형룡은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라는 어구의 삽입을 이유로 이 조문을 성경의 제한적 무오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은 성경의 근본목적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지 그 무오성에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그 주장의 근거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의 내용이 십이신조 제1조의 원형이라고 하며 성경유오설의 요소가 없다고 하였다.43)
그러나 이장식은 십이신조의 제11조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의 성경관과 충돌되거나 상반되는 것이 없다고 하는 데는 동의하나, 십이신조의 성경에 대한 고백에는 성경 영감의 방법이나 문자적 오류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에 성경영감론을 가지고 한국 장로교안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신조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다른 주장을 한다.
이와 더불어 김영재는 십이신조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한 시대와 환경에서 성경의 진리를 간단한 한 문장으로 진술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44)고 평한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는 고백이 아쉬운 것이다. 성령의 영감에 대한 고백은 권위를 손상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물론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성령파에 대하여서도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는 데 필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2) 예정론
제9조는 하나님의 예정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처럼 유기를 포함한 이중예정에 대한 말은 없고 하나님의 예정과 함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씀을 조화시키고 있다. 이장식은 이 신조의 예정론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예정을 고백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 십이신조의 제7조와 제9조를 연결하여 볼 때 드러나며, 이러한 구원론은 1903년에 되어진 미국북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재해석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45) 1903년 미국북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이중예정을 제거하고 선택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런 변경은 같은 시기에 나온 12신조에도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다. 12신조의 제9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사랑하므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저희를 미리작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삼으셨으니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저희에게 두렵게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로되, 오직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는 온전한 구원을 값없이 주시려고 하여 명하시기를 너희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여 본받으며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복종하여 겸손하고 거룩하게 행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지라
이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선교지 교회에서 예정론을 신조에 담아준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하지만 유기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복음전도로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오직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는 온전한 구원을 값없이 주시려고 하여”라는 표현은 앞 문장의 예정과 어떤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 표현은 자칫 보편구원을 언급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물론 전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지만 예정과 전도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앞의 예정이 세상 모든 자들에 대한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김영재는 십이신조의 예정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그것에 비할 때 상당히 온건한 것은 사실이며, 이중 예정에 대한 말은 피하고, 하나님의 예정과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 얻는다는 말씀을 조화시킨 것은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고백과 같으며, 선교지 교회를 위하여 적절한 진술로 보고 있다.47)
이 외에도 12신조의 예정론 특징에 대해서 이장식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선택과 예정을 제3장에서, 즉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앞서서 고백하고 그리고 ‘실효적인 부르심’을 제8장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제9장의 ‘자유의지’에 관한 고백 다음의 제10장에서 고백한 데 비해 십이신조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고백에 이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곧 선택과 예정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것은 그 정신이 그리스도론적 구원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예정은 ‘그리스도 안의 것’으로 진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48)
12신조에서 예정론의 순서가 바뀌었다. 이처럼 12신조는 도르트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전통적인 신조들이 신론중심에서 다뤘던 것을 구원론에 두는 변화를 시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론에서 예정론을 다루던 전통적인 형식을 그대로 보존해 주었더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교회론
십이신조에는 교회에 관한 고백이 빠져 있다. 이에 관하여 김영재는 제10조에 성례를, 제11조에는 성도의 교재생활을 다루고 있는 십이신조가 교회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은 그 구성면에서나 내용면에서 크며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49) 즉 교회에 관한 고백은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속하는 것인데 이것이 빠져 있으니, 한국장로교회에 큰 손상을 준 장본이 바로 이 십이신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한국 장로교회가 반성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무분별한 교회분열의 현실인데, 교회분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의 결핍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 교회론의 혼란으로 겪게 되는 많은 폐해들을 볼 때 매우 중요한 지적이 할 수 있다.
결론
한국장로교회의 십이신조 채택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는 신앙생활과 교회 정치의 중요한 규범적 원리를 세워주었고 이런 작업은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전통과 정통을 그대로 계승한 매우 중요한 신학적 특징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신조의 채택을 통해서 한국장로교회는 개혁파 교회로 발전해 갈 수 있는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이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장로교 표준신앙고백에 비해 어려가지 아쉬운 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약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첫댓글 십이신조는 첨 들어보는 것 같네요^^;
참 많을걸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