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무등산 편백나무 숲
일 시 : 2024.08.01(목)
참 가 :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장휘부 등 5명
불 참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윤정남 이용환등 5명
회 비 : 40,000원(점심 식사는 4명만, 나종만은 먼저 감)
식 대 : 36,000원(김치찌개 1, 애호박찌개 3)
금일 잔액 : 4,000원
이월 잔액 : 540,000원
총 잔 액 : 544,000원
은행 일이 끝나고 9시 15분쯤 어디서 기다릴 수 없어서 바로 시내버스를 탔다. 부곡정에 갔더니 아직 9시 반이 못되었다.우리 회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식당 주인이 닭발을 굽느라 연기가 온 식당을 퍼지고 있어서 냇가로 가서 선풍기를 틀어 달라고 부탁하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윤상윤과 박남용 그리고 나종만이 들어왔다. 그렇게 4명이 모여서 10시가 넘도록 기다렸어도 더 이상 회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4사람이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 산행 코스는 지난 주처럼, 증심사 버스 종점이 있는 광륵사에서 제1수원지를 지나 편백나무 숲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광륵사로 내려가다가 우리 15야 동창생들을 만났다. 이름하여 <24회>이다. 2004년 퇴직자들이 만든 산악회라 그렇게 이름은 붙인 것이다. 24회 산악회원인 김량 노양환 임동수 제두봉 등 4명을 만났다. 모두 건강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서울에 사는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막 사범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나의 큰댁이 임동에 있었는데, 임동에서 사범학교까지 등하교를 같이 했던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북성중 앞, 임동에 사는 박연길 서영규 정영권 이태호 등이었다. 특히 이태호는 나와 같은 반이어서 참 많이 어울렸었다. 이태호는 한 마디로 다재다능하였다. 기계체조부에 들어가서 운동도 잘할뿐더러 말도 잘하였다. 그런데 그가 직업도 바꾸고 생활권도 달라지니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런 그가 약 1년 동안을 병원 생활을 하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나와 같은 중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고, 지근거리에서 살면서 나를 많이 지지해 주었던 김제복 친구가 홀연히 아내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하더니, 역시 낙상사고로 건강의 상징이었던 이태호처럼 병원 신세를 졌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군! 제복군! 빨리 회복하여 이 세상 좁다하고 사방팔방 다녔으면 좋겠네.
오늘도 지난 주처럼 광륵사 입구에서 제1수원지를 경유하여, 편백나무 숲으로 가는데, 박남용과 나종만은 힘이 부족하다고 하여, 제1수원지의 쉬운 길을 지나 편백나무 숲으로 가도록 하고, 나와 윤상윤은 좀 더 산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삼나무 숲 골짜기로 들어갔다.
삼나무 숲 골짜기는 피톤치드가 막 뿜어져 나오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삼나무가 울창하여 기온도 조금 서늘하였다. 그 골짜기의 평평한 곳에 어떤 4~50대 여인 2사람이 자리를 펴 놓고 호화스런 피서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대화에 열중하여 지나가는 우리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평탄한 골짜기가 끝나고 오른쪽 언덕바지의 가파른 길로 올라가야 하였다. 우리가 중 산간 길에 도착하였을 때는 등에도 이마에도 흥건히 땀이 배어 있었다. 산들바람이 배어 난 땀을 스치면서 지나가니 그 시원함은 여기에 올라 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지 어찌 말로 그 시원함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잠시 쉬었다가 편백나무 숲으로 내려오는 길로 접어들었다. 역시 경사가 급한 내리막이 나의 체중을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잔 발 딛기를 하지 않으면 거꾸러질 판이었다. 역시 다리 근육은 올라 갈 때나, 내려 올 때나, 중요한 가속기요 브레이크 구실을 해야 하니까, 잘 발달시켜야 할 근육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늙으면 이 다리 근육이 쇠퇴하니까 평소에 <발꿈치 들기>와 <스쿼트 운동>, 그리고 <페달 딛고 서서 자전거타기>로 하체 근육을 강화시켜 놓아야 함을 느끼게 하였다.
편백나무 숲에 도착하여 박남용과 나종만을 찾았다. 그들을 그냥 찾아낸 것은 나종만이 서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종만은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가족들의 점심 모임이 있다면서 일찍 돌아갔다.
대신 장휘부가 합류하여 4명이 점심을 먹었다.
회원들이 <목요산우회> 카톡을 보지 않고 오늘 불참자가 많았다.
8월은 여름방학을 하고 9월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박남용은 심히 아쉬워하였다.
다음은 지난 7월 27일 토요일 박기홍 친구 부부와 박남용 그리고 나 등 4사람이 만나 회포를 풀었던 이야기를 여기에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본다.
어제 박남용이, 박기홍 부부가 오늘 광주에 올 것인데, 같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부산 힘내라병원 최대정원장에게 척추수술을 받게 해 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로 자기 부인과 함께 점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부인과 대동하기 싫어서 대신 나에게 같이 나가자고 청한 것이다. 흔쾌히 동의하였기 때문에 맨발 걷기를 하지 않고, 그를 만나려고 집에서 나왔다.
박기홍이 10시에 보성 시외터미널에서 출발하면 광주에는 11시쯤 도착할 것 같았다. 나도 그 시간에 맞추어 10시 20분쯤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다. 농성역에서 내려 터미널로 걸어갔다. 광천터미널로 들어가서 시외버스 도착 홈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걸어 나오는데, 그에게서 박기홍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홍이!” 하고 불렀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나, 양수랑이야!” 악수를 하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옆에 서 있었다. “아! 혹시 부인이신가요?”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얼른 박남용에게 전화를 걸어 박기홍 부부를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지금 승용차로 오고 있는데 잠시 후에 터미널에 도착할 것이라 하였다. 터미널에 도착하면 다시 내게 전화 해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박기홍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여 도착홈 화장실로 안내하고 나는 그들의 짐을 지키고 있었다.
부부가 다 환자들이라 그런지 용변시간이 조금 길었다. 박기홍이 어제는 밤에 장흥에서 고향친구 윤일출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하면서 회포를 풀었다고 하였다.
박남용과 통화하여 시내버스 승강장으로 나갈 터이니 그곳으로 오라고 말하고 걸어서 박기홍부부를 안내하여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박남용이 우리를 지나쳐 우리가 있는 곳에서 더 앞으로 가 있다고 하여 유턴하여 다시 돌아오도록 하고 기다려서 박남용의 승용차에 오를 수 있었다. 박남용도 박기홍과 처음으로 대면 인사를 나누면서 오늘 점심 매뉴와 식당을 골랐다. 매뉴는 초밥으로 정하고 식당을 검색하였더니 <상무(上無)초밥> 체인점이 있었다. 네비게이션을 쳐서 그곳으로 갔다.
식당 안은 초만원이었다. 홀은 좁은데 손님이 많이 오니까 대기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가 식사를 하고 있는 손님만큼 많았다. 우선 번호표를 뽑기 위해 전자판에 등록을 하였다. 성인 4명을 입력하였더니 23번 순서였다. 20분~30분을 기다려서 식사를 할 좌석을 배정받았다.
메뉴를 정하기 위해 종업원의 설명을 들은 박남용이 점심특선 중 제일 비싼 것으로 14,000원짜리가 있어서 그것을 시켰다. 계란탕 한 종지, 된장국 한 종지, 각종 생선과 김을 얹은 초밥이 10개 정도 나왔다. 메밀도 한 젓가락쯤을 말아 먹을 수 있도록 컵에 육수를 담아 나왔다. 이정도면 넉넉히 한 끼의 식사로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박기홍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부인이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지금 대기실에 많은 고객들이 대기하고 있다하여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과연 대기실에는 우리가 대기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을 꽉 매우고 있었다.
옆에 있는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한 잔에 4,500원이었다. 박기홍이 커피 4잔을 시키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초등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예쁜 여선생님(부산출신 서울교대 졸업생)에게 꽂혀서 몇 년 동안 쫓아 다녀서 겨우 승낙을 받아 결혼에 골인하였는데, 60년대 후반부터 이민을 목표로 알아보다가 결국 70년대 중반 결혼하지 마자 76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던 것에서 방향을 바꿔 케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행기 표만 사서 간 캐나다 이민이었으니, 고생을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다고 하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호텔업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5개의 호텔을 지었는데, 맨 먼저 싸고 입지가 좋은 땅을 매입한 다음, 믿을만한 건축업자를 선정하여, 그에게 호텔건축을 맡겨서 완공되면 건물을 등록하고 세계적인 호텔의 체인과 계약을 하여 경영을 시작하였다. 선택한 상호는 <홀리데인 인>이었다. 경영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하여 <라스베가스>를 가장 많이 방문하였고, 기본적인 것은 쾌적한 환경(청결 편리 신용) 합리적이고 양질의 좋은 식사를 제공하는 것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호텔에 가서 배워 온 것 중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좋은 쇼’를 고객들에게 보여주어야만 고객들의 호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경영하다가 자기의 호텔을 고가에 넘기고, 또 다른 땅을 구입하여 호텔을 지어서 경영하다가 넘기기를 반복하였는데 그것이 다섯 번째라고 하였다. 호텔 하나를 짓는데 보통 2~3년이 걸리는데 그 3동안은 할 일이 없으니까 아내와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87개국의 곳곳을 탐험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페루의 마추픽추☼, ☼이집트의 고대 유적들☼, ‘쿠라쿠프’를 거쳐 들어간 유대인 수용소가 있었던 ☼아우슈비츠☼ 였다 하면서 우리들에게 꼭 가보라고 당부하였다. 듣고 있던 박남용이 우리도 꼭 가보자고 나를 부추겼다.
자식이 남매가 있는데, 아들은 호텔업에 대한 후계에 마음이 없고, 자기의 전공인 IT(지식 기술)와 미국인 며느리는 상담역에 충실하고 있다고 하였다. 딸은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켈거리에 있는 객실 200개가 넘는 <하이야트 호텔>을 3개나 경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호텔 경영은 보유한 객실에 입실한 손님이 평균 80% 이상만 되면 크게 성공한 업종이라 하면서, 지난 ‘코로나 펜대믹 3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고, 이제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하였다.
같은 장흥출신 유정균을 만나게 해 주려고 그에게 어제부터 전화를 하였지만 받지 않았다. 그가 이 상무지구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오늘도 전화를 하였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기홍이 제두봉은 어디에서 사느냐고 물어서, 내가 제두봉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반갑게 받았다. 지금 박기홍이 귀국하여 여기 상무지구에서 아주 공교롭게 나와 만나고 있는데, 지금 이곳으로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집이 용봉동이고 막 병원에서 귀가하였기 때문에 만나러 나오기가 힘들다 하여, 두 사람이 통화할 수 있게 전화기를 박기홍에게 넘겨주면서 서로 목소리나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박기홍에게 다음 일정을 물었더니, 인천공항의 KT 지점에서 로밍하면서 스마트 폰에 칩을 끼어 넣었는데, 일정이 확실하지 않아 일단 단기 계약을 하였더니, 계약한 기간이 초과되어 한 번 계약기간을 연장하였고, 또 기간을 연장하려고 상무지구에 있는 KT지점 두 곳을 방문하였지만,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인천공항 KT 지점’도 업무를 보지 않아서 기간 연장에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 상경하여야 하기 때문에 광주 송정역으로 갔다. 오늘 운전하느라 고생한 박남용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차에서 내린 나는 지하철을 타야 하니까 박기홍 부부와 함께 광주 송정역 역사 안으로 갔다. 박기홍이 서울 용산역으로 가는 열차표 매입을 끝내는 것을 보고, 나도 63년 만의 깜짝 해후(邂逅)를 끝내고, 박기홍부부와 헤어져서 서운한 발걸음을 돌려 학동행 지하철을 타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