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회] 사상계 헌장
장준하 평전/[10장] <사상계> 정론지로 자리잡아 2008/12/13 08:00 김삼웅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속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말살의 역사요, 자기 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
다행히 제2차 대전의 결과로 이 참담한 이민족의 겸제(箝制)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자기광정(自己匡正)의 여유를 가질 겨를도 없이 태동하는 현대의 진통을 자신의 피로써 감당하게 된 것은 진실로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적을 쳐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累)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至誠一貫) 그 완수에 용약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 민족사생관두(民族死生關頭)에서 우리는 과연 유신 창업의 기백과 실천이 있었던가? 사(私)를 위하여 공(公)을 희생한 일은 없었던가? 정치인은 과연 구국대업에 헌신하고 발분망식하였던가? 민(民)은 과연 대(大)를 위하여 소(小)를 버릴 용의가 있었던가?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을 지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지중(至重)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棟樑)은 탁고기명(託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은 동시에 종(縱)으로 5천 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橫)으로 만방의 지적소산(知的所産)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주석 5)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는 내용이었다. ‘선언’은 일개잡지 발행 취지의 정신을 초월하여 곧 시대정신이고 지침이었다. 대학생과 젊은 지성들은 이 글에 매료되었다. 뒷날 4.19혁명 당시 대학의 학생선언문은 여기서 영향받은 바 적지 않았다.
8천 부 발간에 힘을 얻은 장준하는 1만 부 돌파라는 야심찬 계획에 들어갔다. 직원들을 지방도시로 보내 <사상계>를 소개하는 선전 전단을 뿌리고, 각 일간 신문에 광고를 통해 <사상계>를 홍보했다. 또 11월부터는 '사상계 월보'를 제작하여 각급 학교와 기관에 보냈다. 4ㆍ6배판 4면짜리의 월보는 <사상계>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간단한 논설과 시, 꽁뜨 같은 것을 실어서 그것 자체가 읽을 거리로 만들었다.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런 결과 1955년 12월호는 1만 부를 발행하여 2, 3일 사이에 매진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 충실한 내용과 판매 전략, 홍보가 주효한 것이다.
1956년 새해를 맞아 독자 3배가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각계 각층에서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용이 알차고 다양해져야 하며 필자도 각계를 망라하는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이북 출신과 연세대학 교수들이 필자의 주종을 이루었다. 여기에 200쪽 내외이던 지면을 대폭 증면하여 매호 3백쪽 안팎을 유지했다. 이렇게 되니 제법 볼륨이 있는 잡지가 되었다.
주석
5) <사상계>, 1955년 8월호.
다행히 제2차 대전의 결과로 이 참담한 이민족의 겸제(箝制)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자기광정(自己匡正)의 여유를 가질 겨를도 없이 태동하는 현대의 진통을 자신의 피로써 감당하게 된 것은 진실로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적을 쳐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累)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至誠一貫) 그 완수에 용약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 민족사생관두(民族死生關頭)에서 우리는 과연 유신 창업의 기백과 실천이 있었던가? 사(私)를 위하여 공(公)을 희생한 일은 없었던가? 정치인은 과연 구국대업에 헌신하고 발분망식하였던가? 민(民)은 과연 대(大)를 위하여 소(小)를 버릴 용의가 있었던가?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을 지극히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지중(至重)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棟樑)은 탁고기명(託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은 동시에 종(縱)으로 5천 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橫)으로 만방의 지적소산(知的所産)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ㆍ평등ㆍ번영의 민주사회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주석 5)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는 내용이었다. ‘선언’은 일개잡지 발행 취지의 정신을 초월하여 곧 시대정신이고 지침이었다. 대학생과 젊은 지성들은 이 글에 매료되었다. 뒷날 4.19혁명 당시 대학의 학생선언문은 여기서 영향받은 바 적지 않았다.
8천 부 발간에 힘을 얻은 장준하는 1만 부 돌파라는 야심찬 계획에 들어갔다. 직원들을 지방도시로 보내 <사상계>를 소개하는 선전 전단을 뿌리고, 각 일간 신문에 광고를 통해 <사상계>를 홍보했다. 또 11월부터는 '사상계 월보'를 제작하여 각급 학교와 기관에 보냈다. 4ㆍ6배판 4면짜리의 월보는 <사상계>의 내용 뿐만 아니라 간단한 논설과 시, 꽁뜨 같은 것을 실어서 그것 자체가 읽을 거리로 만들었다.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런 결과 1955년 12월호는 1만 부를 발행하여 2, 3일 사이에 매진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 충실한 내용과 판매 전략, 홍보가 주효한 것이다.
1956년 새해를 맞아 독자 3배가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각계 각층에서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용이 알차고 다양해져야 하며 필자도 각계를 망라하는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에는 이북 출신과 연세대학 교수들이 필자의 주종을 이루었다. 여기에 200쪽 내외이던 지면을 대폭 증면하여 매호 3백쪽 안팎을 유지했다. 이렇게 되니 제법 볼륨이 있는 잡지가 되었다.
주석
5) <사상계>, 195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