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리산 화가가족 은별이네 식구. 가족 4명이 모두 지리산 관련 그림을 그리는 유일무이한 가족이다. 왼쪽부터 부인 박나리씨, 남편 오치근씨, 큰딸 (오)은별, 작은딸 (오)은솔.
-
아름다운 ‘화가 가족’이 지리산에 살고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상신마을과 노전마을 사이 외딴집에 지리산 운봉 출신의 화가 오치근(42)씨와 그의 아내 박나리(36)씨, 그리고 다섯 살 터울의 어여쁜 딸인 은별(10)·은솔(5)이네가 살고 있다.
소설가 공지영씨의 베스트셀러인 <지리산 행복학교>에도 잠깐 등장하는 연인이다. 물론 이 책은 팩트와 픽션의 혼합인 ‘팩션’이기에 실명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로 나오는데, 결혼승낙을 받지 못한 연애시절의 에피소드가 작가의 상상력과 더불어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는 10여 년 전 이들의 ‘지리산 동거시절’을 다루고 있다. ‘스발녀의 정모’ 편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스발녀’는 ‘스스로 발등을 찍은 여자들’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굳이 풀이하자면 ‘가난한 남자에게 푹 빠져 스스로 지리산까지 와서 사는 여자들’을 상징한다. 나의 아내 ‘고알피엠(RPM) 여사’ 신희지씨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지리산으로 ‘사라진’ 딸을 찾으러 달려온 한 어머니(예비 장모)가 화개동천의 계곡에서 사위와 마주친 얘기(126쪽)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젊은이의 안내로 산속 좁은 길로 들어서 한참을 올라가는데 모퉁이를 돌자 선녀들이 목욕을 했을 것 같은 푸르고 깊은 소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듯 수영을 하던 젊은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아싸! 어머니는 짧은 탄성을 내지르더니 옷을 훌훌 벗고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뭐 어떻게 보면 비키니 차림이라고 해야 할까 쩝!) 뛰어들었다. 그리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물속에서 솟구쳐 오른 어머니는 그제서야 두리번거리며 딸을 찾았다. 팔다리가 긴 게 게을러빠지게 생긴 녀석 뒤에 딸이 숨어 있는 게 보였다. 어머니는 조각가 등 뒤에 숨어 있는 딸을 향해 말했다.
“시원하니 살 만하네…. 이만하면 괜찮다.”
그리고 그날 처음 물속에서 대면한 사위는 한나절 내내 민망한 차림의 장모와 멱을 감다가 시원하게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 나도 10여 년 전 여름날의 이 현장에 함께 있었다. 쌍계사에서 칠불사로 가는 길가 동정산장 아래의 계곡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치근·박나리씨 부부가 사랑의 도피처(?)로 악양면의 빈집을 구해 동거를 시작할 무렵의 얘기다. 조금 과장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이미 몇 번 안면이 있었던 우리는 처음 만난 장모님과 더불어 팬티바람으로 물놀이를 하는 진기한 풍경이 연출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장모님 또한 꽉 막힌 어른이 아니라 열린 분이었으니 더불어 시원한 맥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뒷부분은 사실 오치근씨 부부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의 연애담으로 이어진다.
-
- ▲ 아빠 오치근씨와 은별이가 지리산둘레길 곳곳을 둘러보고 담아낸 <지리산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
-
‘사랑의 도피처’로 지리산에서 동거 시작
화가 오치근·박나리씨는 조선대 미대를 졸업했다. 군대를 다녀온 오치근씨가 복학했을 때 막 미대에 입학한 박나리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학생이 아직 어린 신입생을 다른 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전에 낚아챈 것(?)이다. 현역 등 주변 남학생들의 질시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박나리씨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회화과 선배에게 푹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같은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위 민중화를 그리는 운동권 미대생이었으니 취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졸업을 했지만 어차피 변변한 직장도 없으니 결혼이다 뭐다 할 형편도 못되었고, 처가의 허락도 받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의 도피처로 삼은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리하여 책 속의 얘기처럼 일단 수소문 끝에 딸을 찾아온 장모의 내락은 받았지만, 변변한 직장도 없는 화가 사위에 대한 장인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또다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결국 동거인 오치근·박나리씨는 오직 결혼을 하기 위해 잠시 지리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장인을 설득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사를 가 공공미술을 하는 어느 ‘조형연구소’에 위장취업(?)을 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도 있었지만 장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 더 중요했으므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연구소’라는 그럴 듯한 말에 넘어가 장인도 결혼 승낙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은 초창기였으니 고생만 될 뿐 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다 공공미술의 주제 등의 제약이 너무 많아 물고기나 구름 등 뻔한 벽화만을 그려야 하는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새롭게 관심을 가진 것이 바로 어린이 그림책이었다. 이동도서관인 ‘어린이 그림책 버스 뚜뚜’를 몰고 순천 기적의도서관과 서귀포 기적의도서관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전히 돈이 안 되는 일만 하다 보니 생계를 제대로 꾸릴 수 없었다. 그런데다 첫딸 은별이가 태어나자 도시생활이 더욱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에 다니던 친구가 “어린이 그림책을 그려보라”며 백석 시인의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건네주었다.
“민중미술을 하던 네가 자존심 상할까봐, 그래서 고민 끝에 백석 시인을 고른 거야. 이걸 한 번 그려봐. 앞으로는 어린이 그림책이 대세일 거야. 민중미술도 중요하지만 은별이도 태어났으니 애한테도 좋고 생활비도 좀 벌어야지.”
-
- ▲ 지리산학교 전체 수업 때 화가 박나리씨가 수강자들에게 보디페인팅을 그려주고 있다.
-
먹고 살기 위해 백석 동화시집 그려
처음 보는 백석 시인의 동화시 12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나같이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짧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바닷가 물웅덩이에 집게 네 형제가 살고 있다. 집게로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한 세 형은 다른 동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택한 막내 집게만이 살아남는다. 쉬우면서도 묵직한 교훈을 담고 있다.
곧바로 작업을 시작해 백석의 동화시 <산골총각>이라는 책을 펴냈다. 바로 이 무렵부터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막내 집게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거듭했다. 결론은 지리산행이었다. 삭막한 도시를 떠나 본격적으로 그림도 그리고, 어린 딸도 고향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어차피 가난했지만 결혼 이전의 꿈만 같던 지리산 동거시절이 더 그리워졌다. 그리하여 큰맘 먹고 다시 하동군 악양면으로 이사를 했다.
-
- ▲ 아빠 오치근씨가 그려준 딸 은별이와 은솔이의 모습.
-
사실 오치근 화가는 귀농자나 귀촌자가 아니다. 온전한 지리산 원주민이다. 지금도 전북 남원시 운봉읍 신기리에 본가가 있다. 널리 알려진 지리산둘레길이 바로 이 마을 앞 람천 둑길을 지나간다. 내가 2009년 <월간山> 6월호에 ‘미리 가보는 지리산둘레길 300km’를 연재할 때 이미 한 차례 소개한 적이 있다.
‘경남 함양과 도경계를 이루는 전북 남원은 한국 고전소설과 판소리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의 생가 및 이성계의 황산대첩비 등이 있는 곳이 바로 해발 400m의 고원분지형 운봉평야다. 지리산학교의 그림반 선생인 화가 오치근이 바로 지리산둘레길의 신기리 출신이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언젠가는 화가 오치근이 람천 둑길의 아렷한 봄밤의 정취를 명작의 그림으로 그릴 날도 있으리라. 이렇듯 어쩌면 역사에 남지 않을 일들도 소소하게 이 길은 그 모두를 기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길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허수룩한 집이라도 세상의 모든 집은 누군가의 첫사랑인 ‘옛 애인의 집’이요, 그 모든 마을 숲이나 다리 아래나 둑길은 그 첫사랑들의 밀회장소가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따지고 보면 마침내 세상도처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결국 화가 부부는 아직 어린 딸 은별이를 안고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악양면의 빈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고향 운봉도 좋지만 사랑의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는 섬진강과 평사리 무딤이들이 자꾸 발길을 잡아끌었다. 고향 운봉에는 농사철에 들러 부모님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어린이책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 빈집 하나를 두고 나와의 특별한 사연이 생기기도 했다.
-
- ▲ 지리산 화가가족들이 펴낸 책들을 한데 모았다.
-
빈집서 살다 집주인 나타나 집 부숴
당시 나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문수골에 살았는데, 내가 지리산에 와서 살아본 여섯 번째 집이었다. 이곳에서 한 3년 살았으니 다시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도 한철 살고 싶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니 몇 군데 빈집이 있었다. 지금이야 눈을 씻고 봐도 빈집을 구하기 어려운데다 땅값이며 집값도 엄청나게 많이 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집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는데 동매리의 한 외딴집이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과도 적당히 떨어져 있고 주변 풍광 또한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막상 그 빈집에 가보니 식수로 사용할 수도도 끊겨 있고, 방안의 도배도 엉망이었다.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초배지를 바르는 등 애를 써도 잘 붙지 않았다. 그야말로 벽면이 너덜너덜했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좋았지만 막상 이사를 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결정적인 것은 이 집의 부엌과 마당 3분의 1 아래로 물길이 이어져 있었다. 예전의 아주 작은 계곡을 복개해서 집을 지었던 것이다. 여전히 땅속에는 큰 돌과 자갈들이 박혀 있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마당과 부엌의 한쪽은 늘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아내와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오치근씨 가족도 빈집을 구하다 이 집을 보게 된 것이다. 화가의 눈으로 보기에 이 빈집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바로 이곳이다’ 결정하고는 계곡에 호스를 이어 식수를 끌어오고 방안의 벽면도 어렵게 도배한 뒤 이사를 했다. 전형적인 시골의 서민집인 이 낡은 집에 살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보람도 있었다. 아직 어린 딸 은별이가 자연에 익숙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오치근씨의 작품집도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백석 시인의 동화시를 수묵담채화로 그린 <오징어와 검복>이었다. 바로 이 책을 시작으로 왕성한 어린이 그림책 작가로 발을 내딛게 됐으니 더욱 의미 있는 집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 뻔했던 바로 이 집에서 그는 새로운 화가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겨우 8개월도 못 채우고 하루아침에 이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어느 날 승용차가 한 대 오더니 대뜸 집주인이라고 했다. 물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싼 집세로 살기로 하고 들어왔으니 따로 집주인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대개는 빈집에 사는 관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연히 구두로 계약을 했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집주인은 “1가구2주택 문제에 걸려 그러니 당장 이사를 가라. 이 집을 부숴야 한다”고 했다. 집 없는 서러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며칠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
- ▲ 작은딸 은솔이가 그린 그림들.
-
그런데 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이른 아침부터 포클레인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방문을 여니 이미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려고 막 달려들고 있었다. 소리치며 맨발로 뛰어나가니 그제서야 깜짝 놀란 포클레인 기사가 내려왔다. “아니, 사람이 살고 있었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집을 밀어버리라는 말만 듣고 왔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어린 딸과 아내는 우는데, 차마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기만 했다.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오치근 화가의 가족들은 지금도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면 몸서리 쳐진다고 했다. 집 없는 설움을 지리산에서도 당하고 보니 아무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마을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죽어라 그림을 그렸다. 반드시 내 집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동읍내에서 미술학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다 보니 마침내 노전마을과 상신마을 사이의 조그만 땅을 사게 됐다. 돈이 마련되는 대로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둘째 딸인 은솔이가 태어나고, 가난한 살림살이로 집을 지으려니 도대체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일단 대충 집을 지은 뒤에 이사부터 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의 집도 아직 미완성이다. 하지만 주변 전망이 좋은 데다, 내 집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었다.
다행히 <오징어와 검복>을 낸 뒤부터 출판사 등에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김규항씨가 펴내는 어린이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도 연재하고, 원화 전시회와 강연 요청도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악양면에 지역주민과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 ‘책보따리’를 만드는 데도 앞장서 초대관장을 맡았다.
2011년 여름에는 인터넷서점인 예스24와 공지영의 독자 200명이 뜻을 모아 도서 1,000여 권을 기증했다. 하지만 ‘책보따리’가 널리 알려지는 등 자리를 잡다 보니 여러 가지 오해나 시샘 어린 말들도 생기고, 문화관광부 지원의 도서관 건립문제 등으로 지역주민들과 마찰도 일어나는 등 소란스러워지자 미련 없이 관장직을 내려놓았다.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알게 모르게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어린이책 그림에 더욱 더 몰두했다. 백석의 동화시를 그린 <집게네 네 형제>(개구리네 한솥밥) 등을 연이어 출간했다. “한국적 정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백석 시인의 시 세계를 각각 다른 기법을 통해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12년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승’, ‘고향’ 등의 시로 널리 알려진 백석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
- ▲ 새 작품 <도깨비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
-
가족 네 명 모두 그림 그리는 유일무이
또 은별이와 함께 시작한 연재를 마치자마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섬진강 구석구석 17곳을 여행하며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아름다운 풍경을 아름다운 그림과 딸 은별이의 동심 가득한 그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또한 사단법인 숲길과 계약해 <지리산둘레길 가이드북>의 그림 작업도 하고, <고양이가 왜?>, <꿈이 자라는 나무> 등도 펴냈다.
이에 화답하듯 아내 박나리씨도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자 다시 붓을 잡기 시작했다. 계간 <차와 문화>에 2011년부터 ‘차 그림여행’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부부가 함께 그린 <소금밭 딱새>를 펴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편과 아내, 아빠와 딸이 함께 책을 펴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다섯 살 은솔이도 언니를 따라 그림을 그린다. 이름하여 지리산의 유일무이한 ‘화가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최근에도 엄마는 딸들과 함께 ‘차 그림여행’을 다니고, 아빠와 은별이도 지리산둘레길과 곳곳을 <지리산 이야기>로 담아내기 위해 부지런히 다니고 있다. 최근에는 보리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은별·은솔의 이름에서 따온 ‘별과 솔이의 그림이야기’를 온가족이 함께 그리기 시작했다.
오치근·박나리 부부와 어린 두 딸 은별·은솔이는 말 그대로 스타가 되었다. ‘지리산학교&지리산행복학교’의 전체수업 때도 단연 인기가 높다. 이미 초창기 지리산학교에서 그림반의 선생을 맡았던 오치근씨는 네 개의 지리산학교로 분화 확장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학교인 이곳에서 미술관 여행을 담당하기도 하고, 박나리씨는 전체수업 때마다 얼굴과 팔에 보디페인팅을 해주고 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단연 인기 만점이다.
더구나 은별이는 장기자랑 때마다 초등학교 3학년답지 않게 판소리의 단가인 ‘사철가’를 유창하게 불러 전국에서 온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알고 보면 판소리 동편제의 김소현·박정선 명창에게 배우는 제자다. 술을 한 잔 걸치면 이따금씩 소리 한 자락을 하는 그 아비에 그 딸이요, 과연 동편제의 고장인 운봉의 손녀딸답다.
지난 겨울에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아빠랑 은별이랑 섬진강 그림여행>이 선정된 것이다. 한국아동문학인협회에서 2011년 5차 우수추천도서로 선정된 <산골 총각>에 이어 그 성과가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국 도서관에서의 강연과 원화전시, 그리고 파주출판단지 책잔치 등에 참가하는 등 바빠졌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은별이네 화가가족은 날마다 행복한 날들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막내딸 은솔이가 한눈에 반해버린 우리집 ‘얼씨구’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갔는데, 그 이름을 복실이라 지었다. 언젠가는 이 강아지도 이들의 그림책에 등장할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운 네 가족이 지리산과 섬진강을 누비며 하나하나 그 풍경을 그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이들에게 지리산과 섬진강은 그 누구에게보다 더 많은 비경을 보여 주고, 이들의 그림 속에 행복의 기운을 선사해 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는 나의 졸시와 이들의 그림이 함께하는 시화전을 열고 싶다.
첫댓글 헐, 스발녀 에피소드 주인공이 나리샘과 오치근샘이라니.
오치근샘 그림책은 여느 그림책과는 차별성이 있어요.
그림이 사진보다 더 생동감을 줄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미술을 전공한 조카딸의 애 돌선물로 오치근샘 그림책 보냈더니
엄청 좋아했어요. 이모 격이 높다는 말을 곁들이면서.
가까이 지내면서도 몰랐던 얘기들입니다.
감동의 쓰나미.....
오치근, 박나리, 은별, 은솔네 가정에 항상 행운과 행복이 같이하시길...그리고 모두들 건강하소서~~~ ^^*
큰소리 함 쳐봅니다.
난, 오치근 선배의 중학교 고등학교 후배야!!!~~~~~~
왜 내어깨에 괜시리 힘이 들어가지...ㅋㅋㅋ
그러고 보니 울 학우님들에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그분이 바로 그분이네요...와~~멋진 은별이네 가족 정말 화이팅요!!!
뵐때마다
두분의 아름다운 사랑과 아이들의 해맑음을 느낄수 있었는데
이제는 알것같습니다....*^^*
아름다운 한 가족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지네요.
저도 잊고 있었던 그때 그 이야기들. 맞아 그때 그랬지.
참 그러고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계속 이렇게 악양에서의 우정과 사랑을 함께 나누며
쭉 ~ 행복하기를 빌어봅니다
앗 초고를 읽었을때 못봤던 오타가 ㅋㅋㅋ
저는 강발녀죠...
강제로 발목이 잡힌...
언젠가 제가 지리산 마고실 감금사건을 이시인 육십환갑때 생생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인이 왜그리 동네방네 이불사건을 떠드는 지도...
ㅋㅋ
하지만 육십전에는 발표하기가 쉿!
꼭 다시 한번 보고싶은 아줌마.
신 희 지 ...
항상 조용히 그림을 그려 주시는 박나리쌤...아이들도 항시 밝고 행복해 보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아이들...
다 이유가 있었네요...열정적인 부모님들의 사랑이 있었으니...더욱 좋아 보입니다..
저희 아들도 밝게 자랐음 좋겠네요...
즐거운 날들 되세요...
잠들기 전 읽었더니..밤새..꿈 도 아름답습니다.
예뻐요..나리님 댁..쉼없이 꿈꾸는 나무들..
이웃 해 넘실대는..사철 푸른 나무들..!
참 좋은....*^^*
이제사 저두 글 올라온것 자세히 훓어봤습니다.
저희가족을 이원규 시인님이 어찌나 재미지고 아름답게 표현해 주셨는지 저두 감동 받았습니다~ㅎ
지리산에 살게된것, 아름다운 분들을 만나게 된것 모두가 행운인것만 같아 가슴벅차고 모든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가족도 더 열씸히 살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새기며 새해를 맞이하겠습니다.~~^^
지리산 행복학교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말 봐온 그대로 행복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은솔은별이네 가족 화이팅.
그리구 시화전.....
꼭 성사 될겁니다.
우리가 꿈꿀테니까요.
너무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가족이네요^^
오샘가족? 아니죠...나리샘가족? 아니죠....은별이가족? 아니죠...
어느 한 사람으로 대표 될 수 없는 유명 가족 화이팅입니다.
어쩜 은솔이 대화법이 젤 출중 할지도 ㅎㅎㅎ
조각가가 오작가 였다니? ㅋㅋ 팩션도 괘않네.,
이리 저리 정신없다가 이제야 이 시인님의 글과 사진을 보게 됩니다!
생각 해보니 참 많은 일들이 지나갔네요~^ ^!
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살면서 복 짓고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듯 한데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좋은 복을 나누며 산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을 이렇게 이뻐 해 주시고 좋게 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 항상 고맙고 고맙습니다.
더욱 더 사랑하고 복 지으며 살라는 힘 주시는 것으로 알고 노력 하겠습니다!
모두들 행복 하시고 건강하시길 마음모아 빕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