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지난 5월에 세 차례에 걸쳐 세종특별자치시를 돌아다녔다.
정권이 바뀌자 전 정부에서 해놓았던 4대 강 사업 중의 하나인 세종보는 물이 빠져 모래부리가 드러나있고, 휑한 강변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모처럼 나들이길에 만나는 금강따라 걷는 길., 편한 걸음으로 봄 기분을 즐긴다.
금강종주 자전거길은 강변 수로 정비와 함께 만들어진 길이다. 자전거 라이더(Rider) 동호회가 즐겨 애용한다는 말을 청주 정북동토성에서도, 공주보와 백제보에서도 들었다. 군산, 장항 금강하구언까지 갈 수 있다고....
우리는 자전거 대신에 두 다리로 걸어본다. 도로망 지도를 이용하여.
(대전)' 반석역 근처에 있는 세종시에서 운영하는 BRT버스(이전에 990번, 현재는 B2) 함께 타고 첫마을' 아파트 단지에서
내려 금강변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국도 1번 도로인 옛 금남교쪽으로 향해서.. 상전벽해(桑田碧海 )라는 말을 실감한다.
대평리라는 지명이 '큰 들'이라는 뜻이라면, 일제시대 때 일본인 들이 강뚝을 축조해서 물길을 잡고 강변에 있던 습지들을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는 지기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그 친구가 당직 근무중이었는데 웬 일본인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외국인이 흔하게 국내여행을 하던 시절이 아니라서, 낯선 일본인이 (금남)면사무소에 와서 말을 물어보니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인근 학교로 가보라고 안내했던 모양이다. 마침 근무 중이던 이 친구가 어느 정도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찾아온 이유인즉슨.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시대때 이곳 금강변에서 제방축조사업을 했었다고 해서 현장을 보러 왔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헸던 사업을 직접 보러 찾아온 일본인 아들.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런 일은 심심찮게 마주친다. 충북 보은 오장환 문학관에 들렸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강변 들에서, 문화재 발굴 유적지 안내판이 눈에 띈다.
'초기 삼국시대 유적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백제시대 얼음창고' 유적지도 발굴되었단다.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서울의 동빙고동, 빙고동,이라는 지명 속에도 남아있다. )
예나 지금이나 더우면 시원한 것을 찾는 법. 추운 겨울에 얼음을 떠다 굴속에 저장했다가 더운 여름에 먹을 줄 알던 피서법이 옛날에도 있었네. 어렸을 적 1950년대 만해도 공주 금강변에서 얼음을 톱으로 썰어서 마차에 실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왕겨와 함께 토굴 속에 묻었단다...
-일찌기 한 번 찾아왔던 곳, 나성리 토성안에 있는 석불. 토성의 흔적은 찾기 힘들고, 토성이 강쪽으로 휘어져 도는 끝자락을 뚝 잘라서 독락정을 지었다.
정자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멀리는 우산봉 너머로 계룡산 장군봉을 포함한 계룡산 전경이 보인다.
토성의 조건과 정자의 조건이 잘 맞아 덜어진 곳에 지은 독락정.
물과 산, 그래서 독락정을 이름있게 만드는가 보다. 현재는 금남교 바로 옆에 있다.
강변 뽕나무에는 오디가 한참 익어가고 있다.
나성에 관한 성 안내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나리재'라는 땅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 독락정 현판 보기 -
부안 임씨들이 관리하는 곳,,,
-서거정이 쓴 독락정시 현판 -
-남수문이 쓴 독락정기-
-글씨체를 보려고 좀 크게 잡아본다. -
<독락정 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충청도 공주목 편
누정조 편에서:
독락정(獨樂亭) 주 동쪽 30리 삼기촌(三岐村)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전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임후(林侯)는 일찍이 정사로써 안팎에 이름을 날렸다. 전일에 선군(先君)이 함주 목사(咸州牧使)로 계실 적에 임후가 통판(通判)으로 있어 두 분의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나는 이런 연유로 임후를 아버지같이 섬긴 것이 이미 여러 해 되었다.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집이 여러 대를 두고 공주 금강 상류에서 살아왔는데,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이곳을 삼기(三岐)라 이른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 5리에 산이 끊어진 곳이 있다.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나간 것이 2리쯤 가서 솟아 작은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긴 대와 무성한 솔이 우거져서 사랑스럽고, 세 강물이 꿈틀거리며 동쪽으로부터 그 아래를 감싸 흐른다. 내가 일찍이 그곳을 지나다가 기이하게 여겨 한 번 올라가 본즉 북쪽으로 원수산(元帥山)을 쳐다보니 성곽같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하늘에 드높이 솟아 있는데, 동서의 여러 산들이 혹은 조회하는 듯 혹은 읍(揖)하는 듯 기이한 형상을 바치는 것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며, 마을과 논밭의 이랑들이 멀고 가까이 바둑판처럼 펼쳐 있었다. 나는 이 기이한 경치를 즐거워하고, 앞 사람들이 내버려둔 것이 애석하여 드디어 그 봉우리 왼편에 별장을 짓고 그 위쪽에 정자를 세웠다.
강은 질펀한 모래밭에 넓게 흐르니, 하늘과 물은 한 빛이요, 바람불면 푸른 주름살 같고, 달 비치면 은빛 물결이었다. 저 돛과 노, 물고기와 새들이 가고 오고 떴다가 잠겼다 하는 것들이 다 내 발 밑에 있고, 산의 층층이 솟은 봉우리, 겹겹이 둘러싼 석벽, 큰 산기슭, 긴 숲이 가까이는 들판의 푸른 데에 접하고, 멀리는 하늘이 푸른 데에 혼연해 있다. 또 구름 연기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들도 다 궤석(几席) 위에서 대하게 되며, 심지어 밭가는 자, 소치는 자, 고기잡이, 나무꾼들의 노래하고 화답하는 것들과 놀이하는 사람 길가는 나그네들이 사방 들판에서 꾸불거리며 연달아 끊이지 않는 것도 또한 앉아서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복건(幅巾)과 명아주 지팡이로 날마다 이 정자에 오르니, 마음이 한가로워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고, 혼자 강 위에서 낚시질하고 혼자 산에서 나물 캐면서 봄날 아침의 꽃과 가을밤의 달을 내 혼자 읊어 즐기고, 구름 낀 봉우리의 기이한 것과 눈 덮인 소나무의 맑음을 내 혼자 보고 즐겨, 무릇 경치의 즐길 수 있는 것을 나 혼자만이 점유하고 있는 듯, 그 상쾌한 기분이란 마치 매미가 더러운 데에서 벗어난 것같이 높은 세상 밖에서 논다. 사철의 경치는 같지 않으나 나의 즐거움은 홀로 무궁한 것이다.
이에 감히 송(宋) 나라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 선생의 원명(園名)인 독락(獨樂) 두 글자를 취하여 내 정자에 편액(扁額)하고 보니 참람한 것도 같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이(理)요, 내가 즐기는 것은 물(物)이니, 그 이름이 같다고 혐의쩍을 것은 없다. 자네에게 기문을 지어 주기를 청한다.’ 하니, 나는 임후에게 글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다.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하였고, 또 안자(顔子)를 칭찬하여, ‘누추한 마을에서 한 그릇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마시고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다.’ 하였다.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지 않았으며, 송(宋) 나라 정명도(程明道) 형제도 학자로 하여금,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라.’고 발단만 하고 설명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임후가 홀로 그 정자를 즐기면서 나의 말을 구한다. 이미 혼자서 즐긴다고 하였으니 더욱이 남이 알 바 아니거든 하물며 내 비록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나, 이른바 즐거움이란 것에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니, 감히 임후의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겠는가.
그러나 임후의 말씀이. ‘저 속수 선생의 즐거워한 바는 이(理)요,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물(物)이다.’ 하였는데, 내가 듣기로는 이 밖에 물이 없고 물 밖에 이가 없는 것이니,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이나,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것이며,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나는 것이며, 풀과 나무가 무성하였다가 시들고 떨어지는 등, 이 눈과 귀에 들어오는 모든 만물이 그 어느 하나도 지극한 이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이러한즉, 후가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성현의 즐거워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한갓 그 경치만을 완상할 뿐이겠는가.
가만히 요새 세상의 사대부(士大夫)들을 보건대 비록 스스로 편히 할 만한 전원(田園)이 있는 자도 모두 명리(名利)의 고삐에 얽매여서 동서로 분주하여 쉴 때가 없고, 심지어는 종신토록 그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자도 있으며, 간혹 고향에 돌아오는 자가 있다 해도 또한 산대[籌]를 잡고 전곡(錢穀)이나 계산하는 데 불과하니, 이는 그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후는 작위(爵位)가 그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도 아직 그리 늙지도 않은 터에 영화로운 벼슬을 사양하고 세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산수 사이에 한가롭게 소요하기를 이같이 하니, ‘독락’이란 편액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정자가 속수(涑水)의 독락원과 함께 아름다움을 짝하여 길이 전할 것은 의심이 없다.
사마공(司馬公)이 천하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끝내 낙양(洛陽)에서 한가롭게 살지 못하였던 것인데, 지금 후도 일시의 명망을 지고 있으니,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은 조정의 벼슬만을 헛되게 차지하였을 뿐 세상에 보익이 없는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분주하며 그칠 줄을 모르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어찌하면 관을 걸고[掛冠] 이 정자에서 후를 따라 속수(涑水)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외고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읊으면서 한 번 그 즐기는 바의 고상한 지취(志趣)를 엿볼 수 있을까.”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년의 성가(聲價)를 누가 그대에 비기리.
그 다리[脚] 아래 만리의 청운(靑雲) 길이 평평히 보였네.
잠깐 조정에 나왔다가 옛 고장 다시 찾고,
또다시 영화로운 벼슬에 높은 공훈 이루었다.
공명(功名)이란 참으로 조물주의 작희(作戲)런가.
남아의 출처(出處)를 어찌 쉽사리 논하리오.
말방울 울리며[鳴騶] 길을 재촉하니,
북산(北山)의 원학(猿鶴)이 다시 이문(移文)할까 두렵도다.” 하였다.
(*병서는 시에 앞서서 대상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함께 써 놓은 것)
○ 이름난 동산[園]이 저 금강을 눌러 나직하게 있는데, 옛날에 내가 찾으려다 길을 몰랐네. 하씨(何氏)의 임정(林亭)이 가장 좋은 줄 알았어도, 두릉(杜陵)이 오동잎에 시를 쓰지 못하였네. 수레에 기름칠해 반곡(盤谷)에 따르지 못하니, 눈 속에 배를 저어 마침내 섬계(剡溪)를 찾으리. 여울 물 감추고 안개 걷지 말라. 도리(桃李) 나무 밑에 이미 길이 났다고 들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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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獨樂亭。在州東三十里三岐村。
○南秀文記:
“前襄陽都護林侯早以政事蜚英中外。昔先君牧咸州,侯爲通判,先禊甚密。余故父事侯有年。一日語余曰:‘吾家世居公之錦江上游,慶尙、全羅、忠淸之江,至此合流,故名其地曰三岐。所居南五里許,有斷山自北而南行,可二里許,峙爲小峯。脩篁茂松,蔥蒨可愛,三江蜿蜒,自東蛇繞其下。吾嘗過而異之,試一登焉。北瞻元帥山,環如城郭;南望鷄龍山,拔出霄漢。其東西諸山或朝或揖,賈奇獻異者不一狀,而村墟野壟,棋布遐邇。吾樂其奇勝,悼前之遺,遂於峯之左,築別業亭其上。於是江之平沙漫流,天水一色,風而綠皺,月而銀波,以至檣帆魚鳥之往來浮沈,皆出屐舃之下;山之層巒疊嶂,巨麓長林,邇延野綠,遠混天碧,與夫雲煙之變于朝暮者,皆對几席之上。至若耕牧漁樵歌謳相答,遊人行旅傴僂絡繹於四野者,亦可坐而觀也。吾今休官而歸,幅巾藜杖,日登斯亭,心意俱閑,身世兩忘,獨釣于江,獨採于山。春朝之花,秋宵之月,吾獨詠之以爲樂;雲峯之奇,松雪之淸,吾獨觀之以爲樂。凡物化之可樂者,吾獨而專之,洋洋乎若蟬蛻汚濁,遊於物外。四時之景不同,而吾之樂獨無變焉;絲竹之歡有時,而吾之樂獨無窮焉。敢竊涑水園名「獨樂」二字,以扁吾亭,似爲僭矣。然彼之所樂者,理也;吾之所樂者,物也。無嫌於同,請子記之。’ 余於侯不可以文拙辭。昔吾夫子嘗曰:‘飮水枕肱,樂在其中。’ 又稱顔子簞瓢陋巷不改其樂。其所以樂,則未嘗言,而二程乃令學者尋孔、顔所樂何事,亦引而不發。今侯乃獨樂其亭,而徵余言,夫旣曰獨樂,則尤非他人之所得知。矧余雖讀聖賢之書,其所謂樂者,謾不知何說,敢記侯之亭哉?雖然,其言曰:‘彼所樂者理,吾所樂者物。’ 余聞理外無物,物外無理。天地之所以高深,山川之所以流峙,魚鳶之所以飛躍,草木之所以榮悴,與物乎耳目者,何莫非至理之所著者也?是則由侯之樂可以尋聖賢之樂,豈徒玩其景槪哉?且余竊觀今世士大夫,雖有田園可以自適者,然皆爲名繮所係着,馳東騖西無已時,至有終身不歸其鄕者。間有歸者,亦不過執牙籌、計錢穀,得不勞苦其形者乎?惟侯位不滿德,年未至暮,乃能謝榮宦、脫世累,自逍遙於山水間者如此,獨樂之扁,不亦宜乎?之亭也,直與涑水之園儷美於不朽也,無疑矣。司馬公負天下之望,故竟不得優游洛中。今侯亦負一時之望,則得以久擅斯樂乎?未也。若余竊位于朝,無補於世,奔走夙夜,而猶不知止,能無愧乎?安得掛冠從侯於玆亭,誦涑水之記,詠坡仙之詩,而一窺其所樂之高趣乎?”
〔新增〕 徐居正詩:
“少年聲價孰如君?脚底平看萬里雲。
暫屈朝班還舊隱,更從榮宦策高勳。
功名造物眞如戲,出處男兒未易論。
却恐鳴騶催上道,北山猿鶴更移文。”
○“名園竝壓錦江低,我昔相尋路自迷。何氏林亭知最勝,杜陵桐葉不曾題。膏車恨未從盤谷,雪艇終須訪剡溪。莫遣藏湍仍斂霧,似聞桃李已成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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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화요일인 5월 25일에는 국립세종수목원을 찾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