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원게시판) 2020학년도 6평 생윤 15번 문항 오류(추가)

[힉스]

이 선지의 오류는 이의제기 기간에 이미 지적했으나, 혹시나 이해력 떨어지는 평가원 출제자들이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알기 쉽게 부연설명을 합니다. 매우 귀찮은 데다가 내 입장에서는 학문적으로 하찮은 작업이긴 하나, 오류인 내용을 평가원이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학교 현장 전체가 그냥 ‘바보들의 행진’을 하는 사태를 방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설명을 해주는 것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게 현직 윤리교사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는 점도 감안하시고요.

생윤 15번 문항의 ㄷ 선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ㄷ. C : 분배 절차의 공정성으로 분배 결과의 정의가 보장되는가?(C는 롤스의 입장)

평가원은 이 선지가 ‘옳은 내용’이자 정답이라고 발표했지만,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오류입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1. 롤스 원문과 롤스의 용법

롤스는 ‘(분배) 절차의 공정성으로 분배 결과의 정의가 보장된다’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수절차적 정의를 언급하면서 ‘그 어디에서도’ 절차의 정의가 결과의 정의(공정성)를 “보장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 가지 형태의 절차적 정의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ⅰ) 완전 절차(케이크 나누기) (“정의론”, 황경식 역, p.135, 1999년판, 2003년 번역, 이학사)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정의로운지를 결정하는 독립적인 기준과 그러한 결과를 보장하는 절차가 있다는 점이다.”there is an independent standard for deciding which outcome is just and a procedure guaranteed to lead to it.

ⅱ) 불완전 절차(형사재판) (같은 책, p.136)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은 있으나 그것을 보장할 절차가 없다는 것이다.”The characteristic mark of imperfect procedural justice is that while there is an independent criterion for the correct outcome, there is no feasible procedure which is sure to lead to it.

ⅲ) 순수 절차(노름) (같은 책, p.137)

“이와 대조적으로 순수 절차적 정의가 성립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이 없으며 그 대신에 바르고 공정한 절차가 있어서 그 절차만 제대로 따르면 내용에 상관없이 그 결과도 마찬가지로 바르고 공정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노름(도박)에서 볼 수 있다. 몇 사람이 일련의 공정한 내기에 가담했다면 마지막 판이 끝난 후의 현금 분배는 내용에 상관없이 공정하거나 적어도 불공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정된 공정한 내기란 이득에 대한 零의 기대치를 갖는 내기이며, 그 내기가 자발적으로 성립되고 아무도 속이지 않는 것 등이다. 그래서 배경적 여건들이 공정한 결과를 규정한다.”

문장들을 잘 살펴보면, 롤스는 ‘보장한다’는 표현을 완전절차(guarantee)와 불완전절차(sure)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전자는 ‘그것(it)’이 보장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것(it)’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여기서 목적어에 해당하는 ‘그것(it)’은 주지하다시피 ‘(공정한 결과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입니다.

롤스는 아주 명확하게, 목적어(it)가 있는 경우에만 ‘보장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순수절차에는 이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좀 더 부연하면, 롤스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독립적인 기준’을 먼저 규정한 후, 이 기준을 ‘보장할 절차’가 있는지 또는 없는지를 검토합니다. 순수절차는 이 독립적인 기준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 기준을 ‘보장할 절차’가 있는지 또는 없는지를 검토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지요. 즉, ‘보장하는가 또는 보장하지 않는가’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국어 용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보장한다’는 반드시 목적어를 필요로 합니다. 순수절차에는 이 목적어가 없잖아요?

2. 순수절차는 도출된 내용(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는가?

롤스가 든 순수절차의 사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박’이고, 다른 하나는 ‘원초적 입장’입니다. 롤스는 도박의 절차가 공정하기 위한 조건으로 ‘자발성, 속임수 없는 것’ 등을 듭니다. 가담자(구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속임수가 없다면(절차가 공정하다면) 그 어떤 도박이든 결과도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명한 도박 중 하나가 ‘러시안 룰렛’입니다. 가담자들(예컨대 갑, 을)이 자발적이고, 당연히 서로 속이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그 결과는 갑, 을 중 1명이 죽거나, 총알이 불발되어서 아무도 안 죽거나, 아니면 최소한 부상을 당하는 결과를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는 이 결과가 공정하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러시안 룰렛은 불법입니다.

러시안 룰렛이 설령 절차가 공정하더라도 그 결과(내용) 역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는 판단은 누가 할까요? 우리의 이성적 직관이 그렇게 판단합니다. 이것을 롤스는 ‘숙고된 판단’이라고 했고, (순수절차에서) 절차가 됐든, 그 절차에서 도출된 결과(내용)가 됐든 양자 모두 이 ‘숙고된 판단과 일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음을 봅시다.

“그런데 원초적 입장에 대한 특정한 규정을 하는 데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는 선택될 원칙이 정의에 대한 우리의 숙고된 신념과 합치하는 것인지, 혹은 그것을 제대로 확대한 것인지의 여부를 살피는 일이다.…어떤 식으로든 대답되어야 한다고 확신되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교적인 편견이나 인종 차별 등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검토함으로써, 자신의 이해관계에 골몰한 나머지 왜곡되어서는 안 될 공평한 판단이라고 믿는 바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신념은 어떤 정의관도 그것에 부합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되는 잠정적인 고정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나 권력의 올바른 분배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만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심을 제거할 방도를 찾을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을 찾는 데 있어 우리는 양쪽 끝에서부터 작업을 하게 된다.…(그러나) 만일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원칙들이 정의에 관한 우리의 숙고된 신념에 합치한다면, 그 정도로써 충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서로 어긋나는 점들도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 경우에는 선택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최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변경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해왔던 지금까지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잠정적인 고정점이라고 생각해온 판단일지라도 수정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쪽저쪽을 맞추면서…, 결국 우리는 합당한 조건들을 표현해주면서도 정리되고 조정된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도 부합하는 최초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나는 ‘반성적 평형’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형 상태가 반드시 안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판단을 수정해줄 특수한 경우들에 의해 뒤집히기 쉽다. 그러나 당분간은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정당화하고 일관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된다.”(같은 책, pp.55-57)

(다소 길게 인용했습니다만) ‘반성적 평형’에 대한 롤스 자신의 설명입니다. 반성적 평형은 (순수절차에서) 절차가 됐든, 그 절차로부터 도출된 결과(내용)가 됐든, 우리의 ‘숙고된 판단과 일치’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는 뜻이에요. 우리의 숙고된 판단은, 러시안 룰렛(도박의 일종)의 절차가 공정하거나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고, 설령 절차가 공정하다고 판단하더라도 이로부터 도출된 결과(내용)를 결코 공정하다고 판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더욱이 이 판단은 고정된 것도 아니에요. 러시안 룰렛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러시아 사회에서 그 절차든 결과든 공정하다고 판단되었더라도, 지금 이것을 공정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심지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개념마저도 ‘당분간은 (정당하다)’이라는 말을 집어넣음으로써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죠.

그러니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롤스가 그 어디에서 순수절차의 경우에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한다’고 말했나요? 그리고 그렇게 해석될 만한 말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나요? 러시안 룰렛은 어찌 보면 절차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절차의 공정성이 그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하나요?

반성적 평형에 대한 롤스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란 원초적 입장에서 선택될 원칙들과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 부합하는 원칙들이 일치하며, 따라서 이러한 원칙들은 우리의 정의감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p.90)

“그 최초의 상황은 우리에게 원칙의 선택을 부과하는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조건들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동시에 반성적 평형 상태에 있어서의 우리의 숙고된 판단을 설명해줄 관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가장 유력하고 대표적인 해석을 나는 원초적 입장이라 부르고자 한다.”(같은 책, p.176)

롤스는 반복적으로, 그것이 설령 ‘원초적 입장’일지라도, 거기에서 선택될 원칙과 우리의 ‘숙고된 판단’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순수절차에서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해준다면(사실 이런 경우에는 ‘보장’이 아니라, ‘보증’이라고 해야 합니다만, 일단 이 문제는 논외로 합니다.), 이 ‘숙고된 판단’이라든가 ‘반성적 평형’ 개념은 완전히 불필요해지겠죠? 롤스가 바보인가요?

그래서 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겁니다(이것은 지난번 이의제기 글에서도 제시함).

“(순수 절차적 정의에서) 우리는 분명히 어떤 특정한 사태가 공정한 절차를 따름으로써 도달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절차는 너무나 많은 여지를 허용할 수 있으므로 (터무니없이 부정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한 내기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면 어떤 식의 재화 분배도 거의 모두 정의롭거나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노름의 최종 결과가 공정한지 아니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일련의 공정한 판들을 벌인 끝에 생긴 결과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공정한 절차는 그것이 실제로 진실되게 수행되었을 경우에만 그 결과에 공정성을 부여하게 된다.”(같은 책, p.137) Clearly we cannot say that a particular state of affairs is just because it could have been reached by following a fair procedure. This would permit far too much. It would allow one to say that almost any distribution of goods is just, or fair, since it could have come about as a result of fair gambles.

‘어떤 특정한 사태(결과=내용)가 공정한 절차를 따름으로써 도달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내기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면 어떤 식의 재화 분배도 “거의 모두(almost any)” 정의롭거나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죠. 만일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한다면’ “거의 모두”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반성적 평형’을 염두에 두고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분배 절차의 공정성으로 분배 결과의 정의가 보장되는가?

“그러나 우리는 부나 권력의 올바른 분배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만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부나 권력의 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숙고된 판단으로도 확신을 갖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결국 지속적으로 반성적 평형을 해나갈 수밖에 없죠. 그런데 평가원의 선지는 다음과 같았고, 이것을 정답으로 발표했습니다.

‘분배 절차의 공정성으로 분배 결과의 정의가 보장되는가?’(롤스의 입장)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배 절차’는 원초적 입장인가요? 선지의 어디에서도 그게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분배 절차든 “모두” 분배 결과(내용)의 공정성(정의)을 보장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롤스는 아주 명확하게 ‘거의 모두’라고 말하고 있네요? 예외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바로 이 예외가 있기 때문에 ‘반성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거고요. 더욱이 롤스는 여기에서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도 않죠.

4. 보장한다, 간주한다

지금까지 평가원 기출은 롤스의 순수절차적 정의를 다룰 때, ‘간주한다’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2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일부 학생들이 ‘보장한다’는 선지가 있다고 저에게 말하더군요. 제 기억에 그 선지는 교육청 모의고사였을 겁니다. 평가원 출제자들도 띨띨하지만, 교육청 모의고사는 더 그렇기 때문에(다만, 최근에는 평가원 문제나 교육청 모의고사나 수준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적어도 윤리 과목에서는 그렇습니다. 평가원 출제자들 수준이 교육청 출제자들 수준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죠. 이 사실을 평가원 관계자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교육청 모의고사이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해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평가원에서는 이 오류를 거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평가원 수준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없긴 하지만, 그래도 교육청 인력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는 있었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요즘 평가원 인력의 찌질스러움을(교육청과 다를 바 없어진 수준을) 감안할 때, 평가원도 언젠가는 같은 오류를 범할지 모른다는 예측도 하고 있었어요. 아,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6평에서 평가원은 자신들의 수준을 아주 유감없이 보여주네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대목에서 욕지기가 느껴지지만, 억지로 참습니다.

이제 ‘보장한다’와 ‘간주한다’의 국어적인 의미를 설명해주겠습니다.

‘보장한다’는 예외가 없다는 뜻이에요.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저항권이든 탄핵이든 그 대상이 되는 것이고, 타인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는 개인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저항권’, ‘탄핵’, ‘처벌’ 등이 모두 ‘보장해줄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장한다’는 것은 ‘예외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간주한다’는 것은 ‘(그렇게)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증이 허용됩니다. 간주하지만 확실한 반증이 제시된다면 ‘예외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롤스의 순수절차에서 ‘절차가 공정하다면 결과도 공정하다고 간주한다’는 것이 모든 사회철학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순수절차적 정의라고 하더라도 결과의 공정성을 인정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예컨대, 노직이 말하는 ‘취득, 양도, 교정’ 절차도 순수절차적 정의입니다. 하지만 롤스는 이것이 순수절차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결과(내용)의 공정성(정의)은 인정하지 않죠. 이것은 평가원 기출에서도 확인된 것입니다(2016학년도 생활과 윤리 6평 5번의 ②번 선지). 만일 ‘분배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노직의 순수절차의 경우에는 그 결과의 공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할까요? ‘예외가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예외가 되는 이유는 적어도 롤스가 보기에 노직의 순수절차는 우리의 ‘숙고된 판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번 윤사 6평 문제의 선지가 ‘옳은 내용’이라면 2016학년도 생윤 6평 선지가 오류가 되어야 하죠. 서로 충돌하죠? 그래요, 안 그래요? 돌탱이가 아니라면 뭔 말인지 알아들으리라고 봅니다.

5. 이종은 교수와 황경식 교수

다음은 지난번 이의제기 글에서도 인용했던 이종은 교수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롤스는 순수한 절차상의 정의에서 연유하는 배분은 그 배분이 ‘어떠한 한계(range)’에 있는 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정의로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달리 말하면, 그의 정의의 원칙을 따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중략) 순수한 절차적 정의가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롤스는 만약 정의로운 절차에서 연유하는 사회적 선(가치)의 배분이 독립적으로 확립된 한계를 벗어나면 정의롭지 않다는 조건을 덧붙이는 것이다.”(“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이종은 지음, 책세상, 2015, p.253)

이종은 교수는 위 내용뿐만 아니라 무려 3쪽에 걸쳐서 ‘순수한 절차적 정의가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당연히 외국학자의 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은 황경식 교수의 글입니다.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의 정의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는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의 핵심이 된다 할 것이다.”(황경식 지음, “개방사회의 사회윤리”, p.95, 철학과현실사, 2003)

황경식 교수의 위 책은 말 그대로 ‘개론서’이고, 임용시험 필독서죠(지금도 필독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임용시험을 치른 사람이라면 다들 이 책을 읽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보장한다’는 표현을 봤을 겁니다. 짐작건대, 2년 전 교육청 모의고사 선지에서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사람도 아마 이 책을 보고 만들었을 거예요.

황 교수는 다른 데서도 습관적으로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절차의 공정성이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한다’고 하면서도) 예외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다음을 봅시다.

“롤스는 그의 정의론이 공정한 기회균등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절차적 정의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데 있어서는 갖가지 장애와 한계가 있음을 그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또한 다른 측면에서 롤스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 보완적인 각종 장치를 마련하고 있으며 비록 시장이 글자 그대로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운용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정의의 실패(justice failure)를 인정하는 한에 있어서 롤스는 순수 절차적 정의관을 끝까지 견지하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황경식 외 지음, “정의론과 사회윤리”, pp.27-28, 철학과 현실사, 2012)

황 교수는 롤스가 ‘순수절차의 공정성이 반드시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정의의 실패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롤스 이론을 과연 순수절차적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이후 내용도 그것에 관한 설명인데, 인용 생략함).

황 교수는 롤스가 순수절차적 정의를 설명할 때에는 ‘보장한다’는 표현을 결코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보장하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장한다’고 했다가, 부연설명에서는 실제로는 롤스 자신이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순수절차적 정의관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황 교수가 ‘보장한다’는 표현의 학문적 의미를 제대로 천착하지 못했다고 봅니다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황 교수 자신이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롤스 자신이 인정한다’고 하고 있는 점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결론은 무엇일까요? ‘보장한다’는 표현을 황 교수 입장에서 이해하더라도, 순수절차적 정의에서 ‘절차의 공정성이 결과(내용)의 공정성을 “대체로”는 보장하지만, 완전히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 교수의 이런 언급은, 내가 위에서 소개한 롤스 입장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평가원이, ‘보장한다’는 개념은 ‘예외를 인정한다’는 뜻이라거나, ‘보장한다=간주한다’라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억지를 부리게 되면, 학교 현장은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윤리 교사들과 윤리 과목을 배우는 학생들을 개돼지로 생각지 않는다면, 제발 그런 식의 더러운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6. 롤스가 사용한 ‘보장한다’는 표현

롤스는 절차적 정의의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서 완전절차와 불완전절차의 경우에만 ‘보장한다(완전절차), 보장하지 못한다(불완전절차)’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롤스는 불완전절차의 사례인 ‘헌법’을 설명하면서 ‘절차가 (결과의 공정성에 관한) 독립된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불완전절차는 결과의 공정성에 관한 독립된 기준이 있으니, 절차가 이 기준을 보장하지는 못할지라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고요. 근데, 롤스는 이 밖에도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사례가 있습니다. 다음을 봅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초적 입장이란 거기서 도달된 기본적 합의가 공정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최초의 원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같은 책, p.52)I have said that the original position is the appropriate initial status quo which insures that the fundamental agreements reached in it are fair. This fact yields the name “justice as fairness.”

‘원초적 입장은 기본적 합의의 공정성을 보장한다(insures)’고 하고 있죠? 롤스에 있어서 원초적 입장은 ‘절차’를 뜻하고, 이 절차는 절차 자체의 공정성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원초적 입장이라는 절차가 그로부터 도출되는 원칙들의 공정성을 보장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혹시나 찌질한 평가원 관계자가 이 대목을 찾아내고는 “봐라, 롤스도 ‘보장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아아아아~”라면서 무식을 뽀록낼까봐, 그리고 남 보기 창피해서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취지로 이런 것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겁니다.

혹시나 해서 첨언해 두는데, (백보를 양보해서) 설령 저기서 말하는 '합의'가 결과(내용)를 지칭한다고 하더라도(또는 평가원이 그렇게 우긴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롤스가 '원초적 입장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라는 점도 지적해둡니다. 모든 순수절차적 정의가 '원초적 입장'이라는 절차를 두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초적 입장'은 순수절차적 정의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평가원의 위 선지는 단순히 '분배 절차의 공정성'이라고만 하고 있지, '원초적 입장의 공정성'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죠. 이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

7. 평가원 관계자에게

내가 이의제기 기간에 오류 3개(2020학년도 6평 생윤 15번, 윤사 3번, 윤사 6번)를 지적했습니다. 다 확인해보았나요? 오류인 줄 알게 됐겠지만 또 답변서에는 ‘이상 없음’이라고 써놓았겠죠? 물론 당연히 당신이 장악하고 있는 찌질한 교수, 교사 동원해서 ‘이상 없음’이라는 문서에 서명하게 했을 거고요?

이게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나는 이제 곧 생윤, 윤사 관련 교재를 출판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일단 평가원 오류 문제들에 대한 언급을 당연히 하게 될 거고요(연계교재의 그 말도 안 되는 오류들, 교육과정 이탈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될 겁니다.). 언론사 기자들에게도 책자를 보내려고 합니다. 만일 한 언론사만이라도 관심을 갖고 보도한다면 어떤 사태가 오게 될까요? 실은 나 자신도 이게 두렵습니다. 당장 윤리 과목을 수능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나는 타격을 받지 않을까요? 당연히 타격을 받을 겁니다. 그래서 두렵다는 겁니다.

두려운 한편, 우리 학생들이 이 말도 안 되는 오류들을 오류인 줄도 모르고 배우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저 심연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딜레마입니다.

우리에게 길은 없을까요? 나는 근 3년간, 우리 모두 모여서 오류 문제들을 정리하고 공개하자, 고 제안해 왔지만, 당신은 외면해왔지요. 이제 당신은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혹시 이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퇴임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됩니다. 당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상처는 우리 윤리교육과 전체가 입게 되는 것이니까요. 지금이라도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지, 정말 양심적으로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8. 마치며

앞에서 설명한 문항 외에도, 이의제기 기간에 오류라고 지적한 문항들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지금 학교 일이 너무나 바빠서 짬을 못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은 6평 생윤 문제도 자세히 못 봤어요. 이제 곧 방학이니 자세히 볼 거고, 혹시 15번 문항 외에도 오류가 발견되면 평가원 게시판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의제기 기간에 올린 오류 지적 사항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생윤 15번 오류 : http://cafe.daum.net/moraltc/MS9O/704

윤사 3번 오류 : http://cafe.daum.net/moraltc/MS9O/707

윤사 6번 오류 : http://cafe.daum.net/moraltc/MS9O/708

그리고 최근에 평가원에서는 수능문제에 대한 학교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흉내를 냈는데(예컨대, 교육과정 근거 제시 등이 도움이 되는지 같은 것이 설문 문항이었음. 근데 교육과정 근거를 언제 제시한 적 있나요? 윤리는 아마 절대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겁니다.ㅎㅎㅎ), 아무튼 이와 관련해서도 평가원 게시판에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힉스]

지금은 하루 35만원일 거예요. 호텔은 아니고, 그냥 모텔 수준...

[힉스]

본문에도 썼지만, 딜레마입니다. 실제 어떤 기자나 언론사가 관심 갖고 보도하게 된다면...어쨌든 제가 쓰게 되는 교재에는 당연히 평가원 오류를 다 다루게 될 겁니다.

[힉스]

보통 연계교재 집필하는 사람들이 평가원 검토진으로 들어가는데, 선지가 안 나오면 다(출제진+검토진) 모여서 선지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검토진이 제시한 선지가 그럴 듯하면 채택되는 거죠. 연계교재 선지가 그런 경로로 들어갔을 수 있긴 합니다.

근데 문제는, 설령 그런 경로로 선지로 들어왔더라도, 거를 수 있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