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엔 길이 없어/박태일
그리움엔 길이 없어
온 하루 재갈매기 하늘 너비를 제는 날
그대 돌아오라 자란자란
물소리 감고
홀로 주저앉은 둑길 한끝.
<시 읽기> 그리움엔 길이 없어/박태일
1.
시와 산문의 장르적 특성이나 차이는 다양한 항목으로 제시될 수 있다. 디이터 람핑Dieter Lamping은 그중에서도 행갈이를 시의 주요 특성으로 보았다. 행갈이와 관련된 시어, 시행, 연의 분할과 조합은 작시법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런 분할과 조합의 기법 중에 시인들이 많이 애용하는 행간 걸침enjambement이 있다. 행간 걸침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시구가 의미상 한 행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행간 걸침의 빼어난 예로 자주 인용되는 황진의 작품을 보자.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다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야
보내고 그리는 정을 나도 몰라하노라
중장의 끝에 있는 ‘제 구타야’는 ‘자기가 구태여’라는 뜻이다. 바른 통사 구조라면 중장은 ‘제 구타야 가랴마는’이어야 한다. 그럴 때 중장은 구태여 님이 떠났겠냐는 단일한 의미한 지닌다. 그런데 ‘제 구탸야’와 ‘가랴마는’ 이 자리바꿈을 함으로써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자기가 구태여’의 ‘자기’가 떠난 님과 시적 화자 모두를 지칭하거나 어느 하나를 가리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행간 걸침은 통사 구조는 물론 운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잘 쓰인 생간 걸침은 무엇보다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다중 의미를 낳는다. 의미의 확장이 없는 행간 걸침은 시어와 행갈이에 대한 단순하고 거친 실험일 뿐 무의미하다.
2.
좋은 시가 그렇듯이 「그리움엔 길이 없어」 역시 잘 읽히고 잘 기억된다. 익숙한 음수율을 활용하고 모음과 자음이 조화도 뛰어난 덕택이다. 예를 들어 2행은 ‘하루, 재갈매기, 하늘, 재는 날’의 시어가 3, 4, 5, 3의 음수율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시의 기막힘은 ‘자란자란’이라는 시어에 있다. 소리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이 단어 하나로 빛나는 효과가 창출된다.
자라자란은 ①그릇에 가득한 액체가 잔에서 넘칠 듯 말 듯 한 모양이나 ②물체의 한끝이 다른 물체에 가볍게 스칠락 말락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란자란’은 넘칠 말 듯, 요란하지 않은 그리움에 맞게 조용히, 알 듯 모를 듯, 스칠락 말락, 소리 없이 거기에 그렇게 그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잘 표현한다. ‘자란자란’의 뛰어난 쓰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란자란’은 의미상 3, 4행과 관련된 행간 걸침이 되고 그로 인해 다음 행인 ‘물소리 감고’도 행간 걸침이 된다. 이처럼 3, 4, 5행에 영향을 미치는 연쇄적인 이중의 행간 걸침이 다중 의미를 낳는다. 앞서 행간 거침이 효과적으로 쓰이려면 문장이나 단어의 단순한 분할을 넘어 반드시 의미의 확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시에서는 먼저 ‘자란자란’이 앞뒤 행에 걸쳐지고, 이어서 ‘물소리 감고’의 시행 전체가 앞뒤 행에 걸쳐지면서 총체적으로 의미가 확충된다.
그렇다면 두 번의 행간 걸침은 얼마나 많은 의미의 확장에 기여했을까. 행간 걸침이 없게 시를 임의로 고쳐 써보면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대 자란자란 돌아오라
홀로 물소리 감고
주저앉은 둑길 한끝.
위의 예문에서 통사적 혼란이나 그에 따른 다중 의미는 볼 수 없다. ‘자라자란’은 오직 ‘그대’에게 걸리고 ‘물소리 감고’ 역시 화자에게만 걸릴 뿐이다. 하지만 ‘자란자란’과 ‘물소리 감고’가 본래의 시에서처럼 자리를 옮겨 행간 걸침이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행간 걸침의 복잡한 연쇄 효과로 얻어진 의미망 한가운데 그대와 물소리와 시적 화자가 있다. ‘자란자란’은 그대와 물소리 모두 혹은 어느 하나와 결합할 수 있다. ‘물소리 감고’는 역시 그대와 화자 모두 혹은 어느 하나와 연결될 수 있다. 시어 자체의 변화 없이 단지 적절한 자리 옮김만으로 새롭고 풍성한 의미망이 형성된다.
이 시에서 다중 의미는 행간 걸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감다’는 또 어떤가. ‘물소리 감고’에서의 ‘감다’는 ‘목도리를 감다’처럼 감싸다. 둘러싸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감다’에서 ‘멱을 감다’, ‘머리를 감다’처럼 물에 몸을 담가 씻는다는 의미를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3.
「그리움엔 길이 없어」는 1, 2행과 3, 4, 5행의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둑길 한 끝에 주저앉은 화자가 눈에 들어온 재갈매기를 1, 2행에서 그리고 있다. 재갈매기는 화자,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품은 그리운 마음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화자는 재갈매기가 하늘을 나는 강둑길 한 끝에 하루 종일 앉아 있다. 그는 왜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 있는가. 그대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런 화자의 눈에 하늘을 나는 재갈매기가 보이고 그 순간 그는 재갈매기가 된다.
일정한 목표나 방향 없이 강 주변의 하늘을 나는 재갈매기는 마치 하늘이 얼마나 큰지 알아보려고 온종일 그렇게 하늘을 이쪽저쪽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재갈매기가 하늘 너비만 재고 있는 것은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길은 그대에게 닿는 길이다. 그리움을 따라 나 있는 그 길을 가다 보면 그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처음부터 아예 없다. 길이 없으니 화자는 노력해도 갈 수 없다. 종일 이렇게 그대를 기다릴 수밖에. ‘홀로’와 ‘한끝’이 화자의 외로움을 배가시킨다. 또한 ‘한끝’ 다음의 마침표는 그가 앉아 있는 그곳이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길의 끝이라는 분명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 이제 방법은 하나다. 세상 한끝에서 둑길을 따라 그대가 도랑오라. 나 홀로 주저앉아 있는 다른 한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