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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의 걷기길로 꼽히는 문경새재 과거길을 걸으시면서 TV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접하는
드라마 세트장,맨발로 황톳길을 걷는 마음 건강 트레킹으로 때이른 더위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떨쳐버리고 힐링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트레킹 내내 그늘진 숲길을 걷기 때문에 더위 걱정은 안하셔도 되구요
중간의 중간의 주막집에 들러 막걸리도 마시면서 많은 분들 참석하시어
좋은 분들과 행복한 시간들 되셨으면 합니다
▶일정 : 2016년 9월 25일 - 네째 일요일
▶장소 : 경북 문경 새재 과거길
▶출발 : 6시 20 분,염주체육관.
(구)대동고-남광주농협-산수교회-교대-문예후문-7시.비엔주차장)
***아침빠른 출발로 맛난 조식제공합니다***
▶분담금 : 35.000원(먼거리)
▶준비물 :점심,생수,개인상비약,기타
▶코스 : 조령산 휴양림 - 조령관(조령3관문) - 조곡관(조령2관문)-교귀정-KBS드라마세트장
주흘관(조령3관문)-새재박물관-주차장
(트레킹시간 약 6.5km 3시간 ....넉넉히)
☞ 위 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88-1 일원
문경(聞慶)새재는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 조령산(鳥嶺山/1017m) 마루를 넘는 재로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점(草岾)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도로에서 충청도 한강유역권과 경상도 낙동강유역권을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조령(鳥嶺)이란 말처럼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뜻으로 새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개통된 관도(官道/벼슬길)로 영남지방과 충청도, 경기도 지방을 잇는 영남대로로 한양에서 영남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의 행차가 이 길을 넘었고,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봇짐을 메고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다니던 과거길 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경상도를 지나 한양 까지 가는 방법으로는 문경새재 길을 넘거나 추풍령 고개길(경북~충남) 또는 죽령고개(영주 풍기읍~단양)를 넘어야 했다. 과거길에 오르는 선비들이 문경새재 길을 이용하면 보름 정도 걸리는 반면에 추풍령과 죽령은 넘는 길은 이보다 하루 이틀 더 걸리는 정도 였다고 한다.
하지만 선비들이 유독 문경새재 길을 고집 한것은 추풍령고개를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 시험에 떨어진다고 믿고 있었으며, 죽령고개를 넘으면 대나무 처럼 미끄러진다는 미신이 있어 문경새재를 택했다고 한다.
또한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 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 상의 요충지로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을 향해 진격할 때 당시의 명장 신립장군이 이곳에서 대적하자는 부하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 부적으로 패한 이후 제 1관문 주흘관(主屹關))과 2관문 조곡관(鳥谷關), 3관문 조령관(鳥嶺關)을 설치 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조령관에서 주흘관까지 이어진 문경새재 과거길
위 지도상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오늘 도보로 이동한 구간이다.
<등산지도>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인 이곳의 해발고도는 450m이다.
커다란 돌에 씌어진 글귀는 '어사또가 걷던길'이며 진행방향이 아닌
뒤쪽 방향으로 화살표가 새겨져 있고 300m 라는 표시도 보인다.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모르겠으되
과거 응시를 위해 상경했던 대다수의 선비들이 쓰디쓴 낙향을
경험했을 것을 생각하면 '어사또'라는 표현은 현실과 괴리감이 있음을 느낀다.
산림청 충청북도 괴산군이라는 글귀가 선명한 표지석 앞을 가로막은
저 흉물스런 개인업체 안내 간판이 눈에 무척 거슬린다.
관계 공무원들은 눈을 감고 다니는지?
제발 금품수수,향응 제공 등 불미스런 일이 없었기를 바라며
저 꼴불견 간판이 조속히 철거되기를 바란다.
'조령(鳥嶺)'은 순 우리말로는 '새재'라고 부른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間)의 고개',
새(新)로 만든 고개'라는 등 여러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한다.
이곳을 지나면서 충북 괴산군에서 경북 문경시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조령관 문을 지나자 눈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
넓은 초원에 잠시 주저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제3관문인 이곳에서 2관문을 거쳐 3관문까지 이어지는 새재길은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嶺南)이란 명칭도 이곳 조령의 남쪽 지방이란 뜻이다.
이곳 3관문인 조령관에서 2관문인 조곡관까지 거리는 3.5km 이다.
내가 앉아 쉬는 풀밭 바로 옆에서는 잠자리 한 마리도 휴식을 취한다.
여름까지는 암수 구분이 되지 않던 고추잠자리가 9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수컷의 경우 진한 빨간색으로 수컷의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수컷의 성징이 강해질수록 색깔은 점점 진해진다.
그런 연유로 초여름에는 우리 주위에서 고추잠자리를 볼 수가 없다.
그 이유인즉슨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 해서
또 '죽령'은 과거 시험에서 "죽쭉 미끄러진다' 고해서
그 두곳을 피해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지는 곳이 바로 문경새재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오솔길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물양지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들의 날개짓이 분주하다.
반바지에 아쿠아 등산화를 착용한 복장인지라
이처럼 물을 만나면 더 즐거워지는 오늘이다.
땀이 무척 많이 나는 더운 날씨이지만 물속에 발만 담구어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밤에 잠 잘때 멍멍 짖는 개들은 코가 따뜻해야하고
사람은 발이 따뜻해야 잘 잔다는 옛말이 실감난다.
습기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산수국이 한창이다.
이날 문경새재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띈 꽃 또한 이 산수국이다.
중앙부의 작은 꽃들이 수술,암술을 가진 번식을 위한 꽃이며
가장 자리의 흰꽃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무성화'이다.
삼각대를 지참하지 않았지만 마침 "ND 필터(Neutral Density Filter:
빛의 양을 조절해주는 필터)" 8번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낭에 의지해서 렌즈의 흔들림 보정장치를 활용하여
2.5초의 셔터속도로 물 흐름을 한 장 찍는다.
물 흐름이 부드러운 비단결처럼 느껴진다. 마음 속이 편안해진다.
비단결처럼 보이는 맑은 물이 흐르는 길가 도랑에 내려서서
시원한 물에 발목까지 잠근 채 걸음을 옮긴다.
비록 땀이 줄줄 흐르는 더운 날씨이지만 높은 산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가슴속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차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보니
더위를 조금이라도 느끼게되면 시원한 물 속에 들어가 더위를 식힌다.
이미 반바지 끝단까지 물에 여러번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다.
이곳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이르는 대략 6.5km정도의 흙길을 걷는 이들중
많은 이들이 이처럼 맨발로 걷기를 즐긴다.
발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
색시폭포로 향하는 급경사 오르막길에서 금년 산행중 처음으로
여름 야생화인 '비비추'를 만난다.
아직 꽃이 활짝 피지 않은 상태이지만 물기를 잔뜩 머금은 꽃봉오리가 가냘프면서도 예쁜 모습이다.
어린잎은 식용으로 쓰이는데,
어린잎을 먹을 때 잎에서 거품이 나올 때까지 손으로 비벼서 먹는다 하여
“비비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 진다.
동쪽 방향으로는 시야가 트이며 암반으로된 봉우리가 하나 보인다.
확실치는 않으나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부봉(釜峰) 중
가장 서쪽에 자리한 제6봉이 아닐까 싶다.
낮 12시56분
색시폭포 조금 아래 색시폭포보다 수량이 더욱 많은
이름 모를 작은 폭포 가까운 바위 위에서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새재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 이후 사람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폭포를 이루는 물소리뿐이다.
앞의 사진은 셔터속도 1/6초의 장노출 사진이다.
그러나 같은 폭포인데도 이 사진처럼 셔터속도 1/400 초로 찍으면
느낌이 다르다. 흰 포말이 큰 소리를 내며 맑은물을 떨어뜨린다.
오후 1시15분
마음 내키는대로 하자면 저 맑은 물이 비단결같은 폭포를 이루는 이곳에서
언제까지고 휴식을 취하며 쉬고 싶다.
물소리만이 크게 들리는 곳.
인적이 전혀없어 으시시하기 까지한 이곳이 좋다.
오후 1시24분
인적없는 색시폭포 계곡을 벗어나 다시 탐방객들이 조금씩 눈에 띄는
새재길로 돌아왔다.
길가 맑은물 속에 잠시 들어가 물장난을 한다.
여름 더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더위를 식히는 물장난만은 마음에 든다.
큰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귀틀집'을 잠시 둘러본다.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을 삼은 집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두 개의 방만 귀틀로 짜고 정지나 외양 등의 부속 공간은 널벽으로 마감하는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문화재로 지정된 몇 채가 남아 있다 한다.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미대륙의 원주민 거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에 나온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동이전 변진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라는 귀절이 나온다.
귀틀집 맞은편 작은 개울 건너에 있는 '바위굴'의 모습이다.
옛날 이곳 새재를 지나다 갑작스런 소나기(새재우:雨)를 만난 남녀가
저 굴속으로 몸을 피했다가 처녀가 아이를 낳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 바위굴의 경우는 해피 엔딩이다.
청춘남녀가 이곳에는 들러가도 괜찮을듯 싶다.
바위굴을 벗어나니 또 더워진다.
다시 물속에 발을 담근다.
이곳 문경새재길을 여름에 탐방하는 분들에게는 반바지와 물에들어갈 수 있는
신발을 착용하기를 권한다.
더위를 식히며 편안한 탐방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복장이기 때문이다.
제2관을 지나 조곡교를 건너 새재길을 따라 계속 남으로 걸음을 이어 간다.
문루 남쪽에 붙은 현판에는 '조곡관(鳥谷關)'이라 표기되어 있다.
제1관이나 제3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계곡이 좁고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
숙종 때에 성을 개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서 주흘관과 조령관에만 관방을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을 설치하였으나 그 후 불에 타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8년에 복원하면서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380m이며,제1관인 주흘관까지의 남은 거리는 이제 3km이다.
대부분 지역의 폭포들은 지나는 길 또는 등산로에서 조금 들어가야 볼 수 있는데 반해
이곳 조곡폭포는 특이하게도 바로 길가에 있어 사람이 붐비는 편이다.
다만 흘러 내리는 물의 양이 너무 적은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선채로 셔터속도 1/2초로 이 사진을 찍는다.
오전보다 사진찍기가 좀 편해진듯하다.
무슨 일이든 연습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길 옆 도랑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모아 이처럼 물레방아를 돌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물레방아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경남 함양이다.
조선말기 실학자이자 안의(현재 함양군 안의면)현감(1792년 부임)을 지냈던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문물을 둘러보고 온 후 조선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든곳이 함양이다.
물레방아의 이용은 이용후생 [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라는 현실개혁의 실학사상이 깃들어 있는
조선시대 농경문화 변혁의 시발점이기도하다.
소원성취탑' 앞을 지난다.
오랜 기간 수많은 길손들이 작은 돌 하나하나를 올려 만든 정성이 깃든 탑이다.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선비는 장원급제를, 몸이 아픈 이는 쾌차를,
상인은 장사가 잘 되기를, 아이를 낳고 싶은 여인은 수태를 빌었으리라.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큰 내를 이룬다.
어찌보면 물 색깔만으로는 더욱 맑은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1994년 마지막 탄광이 문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문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석탄 생산지로,
도시는 늘 검은 석탄 가루에 뒤덮여 있었다. 이 물도 당시에는 검은 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4년 이후 광산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며 생업을 잃게 된 이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오늘과 같은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을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이곳 문경새재 과거길에만 1년에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특히 나무의 뿌리는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게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전체적인 나무의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는듯한 멋진 자태이다.
주막집 앞을 지난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이곳 문경새재 길목에는 관원이 머물던 ‘조령원터’가 있는가하면
이처럼 민간이 숙식하는 숙촌가(宿村家)도 있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손두부와 좁쌀 토종 동동주'로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길손들을 반긴다.
아마도 옛날 과거길에서도 이곳 주모의 미모에 혹해 주색으로 소일하다 과거를 망친
못난 선비들도 간혹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길가에서 10여m 떨어진 곳의 작은 타원형 바위.
한쪽 길이 4~5m 정도의 작은 바위에도 '마당바위'라는 이름과함께
큰 안내판을 붙여놓은 문경시 당국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도적들이 숨어있다가 길손들을 덮치곤 했던 곳이라 한다.
마당바위 건너편 숲속에는 마당바위보다 월씬 큰 바위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바위의 이름은 '무주암'이다.
누구든지 올라가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라서 얻은 이름이다.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주점이 있어 길손들은 누구나 바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며
한 잔 술과 안주로 갈증과 허기를 메운 후 술값을 함에 넣고 갔다한다.
새재골의 넉넉한 인심을 요량할 수 있는 부분이다.
원(院)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시설이다.
조령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길손이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령원터 외에도 동화원, 신혜원의 원터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을 했으며 물물 교환 등 시장의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사진에서처럼 서쪽 돌담 중간에 이처럼 문지가 남아있다.
돌담을 성벽의 육축 모양으로 마무리하고 그 사이에 2매의 방형 석주를 문설주로 세웠다.
이제 제1관까지 남은 거리는 1.2km이고, 해발고도는 이제 280m까지 내려왔다.
기름틀은 받침틀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깨를 올려 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 내리게 된다.
기름틀의 누름틀을 닮았다하여 얻은 이름이다.
촬영장 내부 방문은 이번에는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이 사진은 지난 2008년 9월20일 낮 12시30분 방문시 찍은 내부 모습 중 한 장면이다.
제1관의 높이 3.6m, 너비 3.4m 홍예문을 지나면 지금까지의 우거진 나무숲들이 아닌
넓은 평지가 펼쳐지는 다른 경치가 눈 앞에 다가온다.
멀리 보이는 산 봉우리들은 아마도 황학산이나 백화산쯤 될듯 싶다.
1708년(숙종 34년)에 석성과 함께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 구조인
주흘관(主屹關)을 뒤로하고 걸음을 이어 간다.
좌우에 협문이 각각 1개씩 있다.
또한 좌우에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의 석성을 축조했고,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까지 있는 이 주흘관은
문경새재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관문을 지나 문경쪽에서 뒷쪽인 북쪽을 바라다 본다.
예전 과거시험을 위해 짚신을 매단 괴나리봇짐을 매고
한양으로 떠나던 선비들의 불안한 심정을 가늠해본다.
경상북도 문경시인 이곳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곳' 이라는 뜻의 한자어인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유래하여 얻은 이름이다.
첫댓글 회장님 ! 수고 하셨습니다 ..
전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