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호는 1942년 2월
25일 전남 고흥 녹동,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과수원집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가끔 태풍이 휘몰아 오곤하던 그곳에서 자랐다.
과수원집에서 겪은 그때의 폭풍우와 해일, 바다 위로 떠가던 돛단배들의 기억, 울타리 주변에 작은 둥우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던 뱁새며, 오목눈이, 때까치, 종달새에 대한 추억들은 의식 밑바닥에 침전되어 늘 원형적인 향수로 작용하곤 한다.
고향을 떠난
것이 열두 살.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다니는 동안 하숙집 바로 앞에 있던 헌 책방에서 눈에 뜨이는 문학 책은 가리지 않고, 거의
빌려서 읽어치웠다.
이 시기의 지독한 남독이 그 후 생애의 독서양보다 많았으리라는 느낌이고, 뒷날 문학에 대한 열망과
관계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염원에 이과 공부를 하면서, 소설에 대한 꿈으로, 한 동안 방황과
갈등을 겪다가, 졸업 직전 방향을 선회,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였다.
글만 써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하는 계산으로, 수업료가
면제되고, 졸업 즉시 고교 교사로 발령이 되던 국립 공주사대 국문과를 선택하였다.
그 젊은 날의 선택이 훗날 선생 노릇도, 쓰는
일에도 치열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많이 하게 했다.
그곳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소쩍새가 밤 새워 우는소리를 들으며, 대학 내의
수요문학회 회장 일을 맡아 동인들과 밤 새워 글쓰기에 매달렸다.
대학 1학년 때 4.19 와 2학년 때의 5.16.
거기에 손아래 남동생의 죽음, 어머니의 발병, 가까운 친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그 젊은 날, 살아남은
자의 쓸쓸함, 죽음,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에 대하여,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근원적 허무가 의식 한쪽에
침전되어 갔다.
이를 갈며 썼지만 낙선의 계속, 절망과 자학, 그러다가 졸업하던 1964년 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늘을 색칠하라'가 당선되었다.
교편을 잡으면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를, 그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교 교사, 동서울대 교수, 경희대, 강남대 강사 등을 지내며, 나름대로 쓴다고
썼지만, 한 순간 완전히 펜을 던져버리기도 했다.
5.18, 강의실로 되돌아오지 못한 제자들의 빈자리를 확인하면서, 바로 눈앞에서
온 몸에 석유를 붓고 산화해 가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무력감 앞에, 문학이라는 것에 심한 회의와 자책의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발표되던 글이 강제 중단되기도 했고, 원초적으로 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쓰는 사람
자신에게마저 진정으로 구원을 줄 수 있는가의 번민의 기간이었다.
때로 쓰지 않는 자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85년부터는 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많은 시간 포구의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러면서 떠올린 것이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가버린 폐허의 과수원에서 꿈쩍 않고, 바다를 쏘아보던 아버지의 입모습의 기억이었다.
- 봐라. 나무가 뿌리까지 뽑히진
않았다.
한 해 농사가 하루 밤 태풍으로 끝나버린 아침, 아버지는 어린 그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또한 일찍
죽은 동생의 무덤 앞에서 네가 다 못 살고 간 삶, 글을 쓰는 것으로 형이 더 살아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젊은 날의 서러웠던 새벽도 떠 올렸다.
그리고 결론이었다.
글을 쓸 수밖에 없다라고.
지금은 목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주중에는 학생들과 소설
이야기를 나누고, 주말에는 서울에 올라 와 컴퓨터 앞에 앉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첫댓글 두 집에 따로 산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