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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1-8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히스기야 왕은 선하고 훌륭한 왕이지만, 그도 죄인이며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산헤립의 1차 공격에서 건져주시고 심지어 그의 죽을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지만,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주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을 드러내며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자랑하며 자기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은혜를 망각한 히스기야를 보고 그로 인해 남유다가 결국 바벨론 제국의 손에 넘어갈 것을 이사야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자랑한 보물이 전부 바벨론에게 빼앗길 뿐만 아니라 다윗 왕조의 몇몇 왕들과 방백들은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유다 백성 전체가 포로로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히스기야 왕 때에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이 예언은 대략 115년 후에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감으로 성취됩니다. 그때가 주전 586년입니다. 이는 히스기야 왕 이후에 가장 악한 왕 므낫세가 즉위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유다 백성의 패역함은 도를 넘어서고 그럼에도 지은 죄악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남유다의 패역함에 대해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며 누차 경고했지만 그들은 주의 말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주의 말씀이 알려주시는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때에 남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남유다는 모세 언약에 따라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유다는 70년 동안 이방 땅에서 포로로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있는 상태는 가장 큰 비극이며 수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남은 자들은 이러한 비참과 비극을 지나면서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에 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주의 백성을 다시 그들의 본향인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레스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죄와 사탄과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사야는 40장부터 66장의 신탁을 통해 고레스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및 그분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과 구원의 성취를 알려줍니다.
특이한 것은 이사야 40장의 구조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주 여호와 하나님을 뵈며 직접 선지 사명을 받던 이사야 6장과 대칭이 되고 있습니다.
[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
](사 6:1, 8)
그리고 이때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은, “이 백성”은 주의 말씀을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은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참조, 사 6:9-12).
놀라운 사실은 남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성전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고 또한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6장의 예언은 산헤립이 죽은 후에도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성취는 언제 이루어집니까? 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시험을 합격하지 못한 직후에 주어진 예언대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 주의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면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은 이사야 6장의 예언이 성취된 상황을 전제로 주어졌고, 이때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은 놀랍게도 주의 백성이 메시야를 통해 세상과 마귀와 죄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하권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재미난 것은 이사야 6장은 남유다 백성을 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없는 백성인 것처럼 “이 백성”이라고 부른 반면 이사야 40장은 그들을 다시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6장의 ‘이 백성’은 예루살렘에 아직 머물러 있는 반면, 이사야 40장의 ‘내 백성’은 멀리 옮겨져서 바벨론 땅에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심판을 받은 상태에서 회개하고 주를 의지하는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내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이유는 “황폐하여진 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죄 사함을 언급하며 메시야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의 땅 가나안이 70년 동안 황폐하여진 사실은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는 사건을 예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바벨론에서 ‘내 백성’이 구원을 받는 근거는 메시야 예수의 십자가 속량인 것을 알려줍니다.
남유다 백성은 히스기야의 교만 죄 및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한 죄로 인해 마침내 주전 586년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메소보다미아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벨론의 포로 된 삶의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이 어느새 70년 동안 안식년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희년이 벌써 10번을 지났습니다. 이는 무한한 희년을 상징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을 상징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기간이 다 되어감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자비는 오직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속량하실, 창세 때부터 준비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짓는 죄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 때문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따른 형량인 지옥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 가운데 지은 죄악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평생 따라다닙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저질렀던 사람이 먼 훗날 자기보다 훨씬 더 덩치도 커지고 사회에서 큰 힘을 갖게 된 상대에게 보복을 당하는 사건 같은 것들입니다. 이는 그가 비록 어린 소년이었을 때 지은 죄악이라도 평생 그 죄가 그를 따라다니는 것을 입증합니다.
신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그것이 어떤 죄이든 직접 간접으로 우리의 삶에 평생 영향을 끼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녀들에게도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가 전달됩니다. 히스기야의 죄 때문에 결국 그의 후손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팔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또한 우리의 후손에게 복과 평안을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특히 남유다 백성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버림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통해 모든 열방이 복을 받도록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기 때문에 반드시 유다 백성은 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유다 백성을 통해 그 역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이 70년의 안식년을 거의 다 채웠기 때문에, 남유다 백성이 지은 죄값으로 바벨론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통 당한 주의 백성이 위로 받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직 그들은 바벨론 땅에 있지만 그들 중 남은 자들은 주 앞에서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소유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 위로는 대략 150년 후에 바벨론에 있게 될 주의 백성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죄와 고생으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전에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며 언약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혼합주의가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더 무서운 패역이요 반란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주의 백성이지만, 주 하나님은 70년의 안식년을 지내는 약속의 땅을 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이제 이사야서의 하권은 위로로 시작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이 말은 이사야가 하는 말이고, 이 신탁을 직접 듣는 대상은 이사야의 제자들, 즉 선지 훈련을 받는 자들 및 주 앞에서 회개하고 참으로 주를 의지하는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내 백성’은 누구입니까? 1절로서는 알 수가 없고 2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노역의 때를 마친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서 “노역”은 히브리어로 (차바)인데 전쟁이라는 뜻도 있고, 전쟁에 져서 포로 및 노예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을 뜻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노역의 삶은 예루살렘 성전이 없는 삶으로서 영적으로 기갈을 느끼는 삶이며 본향을 떠난 나그네의 삶입니다. 즉, 노역의 삶은 양들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주의 성전이 없는 삶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이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데,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육신뿐이기에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만일 육신으로 행하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머물 수 있습니다. 불신자든, 신자든 하나님과의 원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희생 제물이며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과 그분의 부활 후의 대제사장 역할은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사 제도 및 약속의 땅 가나안의 70년 안식이 상징하는 실재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로 70년이 되기 전까지의 주의 백성의 삶은 노역입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에서의 포로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시 137:1-9)
그러므로 그들에게 많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에 이사야 40장은 “위로하라”는 명령을 두 번에 걸쳐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연약한 자기 백성을 이제 한없이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
사실 1절의 시작 자체가 놀라운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너희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3절에서는 이사야를 비롯한 남은 자들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 하나님”이라 부르고, 8절에서도 “우리 하나님”, 그리고 9절에서 다시 먼 훗날의 남은 자들을 기준으로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고, 소망을 갖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참된 백성이요, 그들은 주 하나님의 “내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사야의 제자들로서 남은 자들이고, 또한 이사야가 바라본 먼 훗날의 남은 자들로서 그들 역시 동일한 정신,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오직 주를 믿는 마음을 회복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 그들은 “내 백성”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주의 백성의 언약 관계가 원만하게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주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는 주를 경외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참된 회개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속량, 즉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믿음으로 회복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었던 언약에 따라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또한 다윗의 언약에 따라 그들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1-14)
이제 주의 백성은 죄에서 돌아서서 주를 믿고 의지함으로 바른 생각과 바른 행실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그들에게 주님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죄인이요, 계속 패역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 및 여러 모양으로 알려주신 메시야와 그분의 속량을 믿는다면 다시 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원만하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주의 형벌 외에 공의가 이루어질 다른 길이 없는데 하나님의 어린양의 속량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고 주와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게 되니, 이는 메시야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그를 율법의 의로운 요구의 속량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절을 다 함께 봉독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루살렘”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마음에 닿도록”은 원어로 (알-레브)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그 의미는 “상냥하게”, “따뜻하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올 주의 백성에게 무엇을 외칩니까? 외쳐야 할 내용은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패역은 노역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하고 메시야를 믿을 때 그들은 죄사함을 얻게 됨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속량으로 인해 주의 백성이 누리게 될 죄 사함 및 하나님과의 화목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위로입니다. 회개하고 메시야를 믿는 신자들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따스한 위로를 보장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예 된 삶은 끝나게 됩니다. 무엇에 대한 노예입니까? 이사야 배경은 바벨론 왕에게 종 노릇 하는 노예의 삶이지만, 영적 실재에 있어서는 죄와 마귀와 세상의 노예 된 삶입니다. 따라서 죄와 세상에 종 노릇하며 살던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됨을 말합니다.
이제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노역의 때가 끝나는 것과 죄 사함이 함께 묶여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어기는 것입니다. 즉, 불법이 죄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어떤 상태라도 죄를 짓고 나면 그 사람은 곧바로 죄와 사탄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적으로 죄를 범할 때 그 공동체는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마귀가 뛰노는 놀이터가 됩니다. 따라서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사탄의 놀이터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끔찍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즉, 거듭남의 역사도 없을 것이고, 그 거짓 교회 안의 신자들은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지적하는 죄를 회개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만이 우리 개인의 그릇된 성품과 삶, 그리고 잘못된 공동체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길입니다.
[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5)
[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고후 6:17-18)
[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계 18:4-5)
더 늦기 전에 내 멋대로 살던 죄의 삶을 회개하고 돌아서기 바랍니다. 죄악의 공동체에서 빠져 나오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때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무한한 죗값이 주의 보혈의 공로로 치러질 것입니다.
또한 2절은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죗값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한 죗값은 무한한 형량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죗값은 피조물은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 만이 우리의 죗값을 갚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죗값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무한한 저주를 감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는 뜻은 죗값을 치렀다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뜻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징계로 주의 자녀가 회개와 믿음을 바르게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백성과 자기 자녀를 향한 주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순종하는 죄를 회개하고 주께서 보내 주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즉, 주의 백성이 화목 제물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징계의 목적입니다. 만일 주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원래부터 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처럼 처음부터 버림 받은 가짜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는 죄를 범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그리고 주의 징계는 반드시 주의 자녀를 주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의 혹독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노예 생활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공동체적으로 70년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께서는 그들이 충분히 징계를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징계를 받음으로 주께로 온전히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진짜 주의 자녀이고 백성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신자들은 주의 징계를 받은 후에 반드시 커다란 영적 유익을 얻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징계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회개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합니다.
이제 포로 생활은 끝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곧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이어질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은 원위치가 되었습니다. 남유다 백성 중에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될 것이고, 그 이후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죄 사함과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 열방에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징계를 충분히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되는 남은 자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을 때 임하는 하나님의 매서운 징계를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삶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는 에녹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징계로 거룩하여진 주의 백성을 신속히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인생 가운데 지은 죄악으로 인해 주의 징계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주의 징계가 가벼웠습니까? 아니면 혹독했습니까? 가벼웠다고 느끼고 또 다시 범죄한다면 다음 번의 징계는 대단히 혹독할 것입니다. 혹시 혹독한 징계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는 과거의 죄로 돌아가지 않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 있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신자로 구별되어 영원한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주를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 삶에 영광과 복이 있습니다. 그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셔서라도 다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상냥하시고 부드러우시며’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위로 하시되 한없이 위로 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는 주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잠시 연약함 때문에 실수는 할 수 있더라도 다시는 죄의 늪에 허덕이는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아버지, 제 남은 삶을 주께만 의탁합니다. 친히 인도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제 3절부터 5절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시는 것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환영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은 특히 말씀 하나님이시며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도록 하나님은 사신을 준비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언약의 사자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실 때 주의 사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 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의 사자로 오시는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 즉 사신입니다.
3절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례 요한인데 그의 소리를 이사야가 대략 700년 전에 신탁으로 듣습니다. 어쩌면 이사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환상으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23; 참조, 눅 3:3-6; 막 1:1-5; 마 3:1-3).
지금 이사야 40장 3절과 신약에서 그 구절을 인용한 내용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이 그 길을 곧게 한 대상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새언약 시대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6개월 후에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은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외치는 소리와 물 세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가르쳤습니다. 이제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상징하는 구약 선지자 세례 요한은 회개를 전합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세례 요한의 외침과 물 세례를 통해 자신들을 낮추고 죄를 인정했습니다. 즉,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등장하시면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믿는 자들은 그가 가리키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나의 왕, 나의 대제사장, 나의 마지막 선지자로 영접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회개가 믿음보다 먼저 앞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 5:31-32)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주의 백성에게 이사야의 글로 회개를 전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있는 주의 백성은 무엇보다 과거의 어리석음과 패역한 죄악을 회개하고 여호와께서 약속으로 보증하신 메시야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 예루살렘 성전이 의미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따라서 회개한 남은 자들은 예루살렘 도성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성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동물의 희생 제사가 있고, 그 제사를 통해 언약 백성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후 화목 제물을 드릴 때 주 앞에서 뛰놀며 감사하며 찬양하면서 한없는 기쁨과 평안과 사랑과 만족과 보람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누리던 이 지복이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상징하던 실재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 우리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전인 예수님을 통해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드리며 얼마든지 주를 만나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이제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합니다. 죽음 이후 곧바로 그 영혼은 음부라고 하는 죽음의 지옥 세계로 떨어집니다. 그곳에서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재림 때에 썩은 육체를 입고 다시 판결을 받고 불못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함께 영원히 무한한 고통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의로운 율법의 죗값을 그분이 치러 주십니다. 나아가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고 그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생명과 주의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내 안의 죄성, 즉 육신이라고 불리는 옛사람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신자가 된 성도들은 매일 작은 죄라도 철저하게 회개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신자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는 죄를 싫어하고 혐오하도록 되어 있고, 또한 죄를 죽일 수 있는 거룩한 하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25).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죄 많은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서 땅의 지체를 죽여야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샤론의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죄와 마귀와 세상에 왕노릇하는 주의 자녀가 삶과 성품으로 거룩함을 나타낼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매일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기 바랍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싸우기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가 우리의 삶에 항상 나타날 것입니다. 승리의 열매가 우리의 삶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과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시편을 보면 시온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노래합니다.
[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시 126:1-4)
구약 시대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속량과 부활로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과 사역 안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지금 우리는 주께서 보내신 성령 안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6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은 이사야를 ‘말하는 자의 소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외치라고 합니다. 이에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하라”(사 40:6-8)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시 90:4-6)
죄의 상태로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잠시 누리고 있던 모든 영광은 순식 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빨리 알고 우리는 주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것이 영원한 보람을 갖는 유일한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 103;15-18)
이에 새언약 시대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사랑하는 여러분!
죄로 인한 죽음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죽음을 향하는 이 세상의 삶에서 위를 바라보며 하늘을 위해 살아갑니다.
[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1-6)
사도 베드로는 오늘 이사야 40장의 7-8절을 인용하면서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내용을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의해 거듭나는 것은 영원한 의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15).
죄로 물든 이 세상 및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옛사람의 생애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되는, 복음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은 결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땅의 영광과는 다른 영원한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생명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세토록 보존되는 유일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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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