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16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할아버지의 수염 》
슥 12:10~14
<손녀의 민감성>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손녀는 할아버지의 목회에 관심이 매우 많습니다.
설교 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한 날은 “왜 했어요?”라고 따지기도 합니다.
따지기는 따지는데 싫은 기색은 별로 없어요. 나름 재밌기도 한가봅니다.
그 녀석이 이번 주 주보에 나온 오늘 수요설교 제목을 봤습니다.
“‘할아버지의 수염’이에요? 또 내 얘기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 할아버지가 유채 얘기하는 것 싫어?”
“아니요, 싫은 건 아니지만, 제목이 할아버지의 수염이잖아요!”
손녀는 할아버지가 목양실을 비우면, 할아버지 노트북에서 하고싶은 것을 합니다.
유튜브도 보고, 포탈에서 검색하여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사진을 출력하기도 합니다.
목양실에 있는 ‘코팅기’를 다룰 줄도 압니다. 코팅을 하다가 기계를 고장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노트북에서 작업하고 있는 파일들을 제멋대로 닫아서 곤란을 주기도 합니다.
요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주를 귀여워하면 수염을 잡힌다”는 우리속담이 있습니다.
귀엽다고 오냐오냐 하다보면 손주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는다는 뜻입니다.
“할아버지의 수염”
할아버지의 수염은 할아버지의 인격입니다. 할아버지의 프라이버시입니다.
할아버지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자랑이기도 하며, 부끄러움이기도 합니다.
할아버지 수염은 손주가 맨 나중까지 우러러 보아야 하는, 할아버지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귀엽고 예쁜 손주라도, 수염은 “허락할 수 없는 마지노선”입니다.
손주를 한없이 귀애하던 중, 손주가 수염을 잡았습니다.
사실, 손주를 귀애하는 할아버지치고, 수염을 잡히지 않은 경우는 드뭅니다.
물리적으로 수염을 잡기도 하지만, 수염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손주는 건드립니다.
☞ 할아버지는 이때 어떻게 합니까? ~ “허허 이 녀석이…” 하면서 용인합니다.
☞ 그러나, 금기를 넘어서는 손주를 위한 가르침은 꼭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손주 이스라엘>
오늘 본문 앞부분, 스가랴 12장 1절로 9절을 본문으로 지난 주 설교했습니다.
설교 제목은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만유의 주재이시며, 전쟁을 주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많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도 고대 모든 부족이 섬겼던 전쟁의 신들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매양 승리만을 안겨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다스리시기도 합니다.
고대 각 부족이 섬기던 ‘전쟁의 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으로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일 중에 전쟁을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지만 때로는 채찍으로 다스립니다.
멸망으로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그 예가 바벨론 제국에 멸망케 하신 일입니다.
주전 586년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제국에 의해 철저히 망합니다.
백성은 흩어지고, 조금 똑똑하다싶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영원히 멸망케 하시지 않습니다.
한때 회초리를 들었지만, 한때는 한없는 사랑으로 품으십니다.
슥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하나님은 포로 생활 70년만에 포로귀환으로 섭리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루살렘을 최고의 사랑으로 안아주십니다.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여 세계 열강 그 어떤 나라도 범접치 못 하게 합니다.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게 하심이 회초리였다면, “무거운 돌”은 무한한 자애로움입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시라면, 지금 예루살렘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입니다.
불면 날아갈까, 꼭 쥐면 깨질까, 한없는 자애로움을 품어주는 손주입니다.
하나님은 손주에게 최고의 사랑 “무거운 돌”이 되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한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간구하는 심령>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이 포로에서 귀환한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신(3절) 일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할아버지로서 손주를 사랑하듯, 예루살렘을 귀애하신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예루살렘을 귀애하시는데,
여기서 자칫 예루살렘은 도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금도를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마냥 귀애해 주시는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는 손주처럼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손주를 귀애하다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손주가 금도를 넘어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손주들은 할아버지의 수염을 덮썩덮썩 잡습니다.
물리적으로 수염을 잡는 것을 넘어서, 할아버지의 인격과 성품과 프라이버시를 건드립니다.
현명한 할아버지는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경계하는 한편, 막상 손주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거머쥐었을 때도 대비해야 합니다.
손주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경우 손주는 할아버지앞에서 금도를 넘어서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 귀애하듯 하고, 수염을 잡았을 때를 대비합니다.
그에 대한 대비가 10절에서 말하는 간구하는 심령 입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의당 간구해야 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손주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간구할 때는 이미 할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과 예루살렘과의 관계는 이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분입니다. 단지 예루살렘 사람들, 세대가 바뀝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루살렘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예루살렘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을까요?
☞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수염을 거머쥐는 일이 일어날 것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을까요?
<금도를 넘어서는 예루살렘>
10절을 다시 읽습니다.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번에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이 대목에 주목합니다.
예루살렘이 누군가를 찔렀습니다.
이는 비유로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수염을 거머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자기들을 그토록 귀애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할아버지 앞에서 온갖 사랑과 은총을 누리다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이렇게 하실 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은총과 함께 간구하는 심령을 아울러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너희여~
애통하기를 간구하여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애통할 줄 알아야 한다. 애통하여라~
①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해라~ (10절)
②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라~ (10절)
___외아들을 잃은 부모가 애통하듯 하라, 맏아들을 잃은 어미가 통곡하듯 하라!
(11절)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애통이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전쟁하다가 죽은 곳입니다. 그때 온 나라가 애통했습니다.
(12~14절)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오늘 본문은 애통의 극치를 이룹니다.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신 중에서 “애통하는 복이 있느니라”하셨는데 그 대목이 생각납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 예수님의 8복 강해 중에서 두 번째 복이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우리가 애통해야 하는 일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부모님의 일찍 돌아가심도 애통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도 관계가 비틀어져 화목하지 못하는 현실에도 애통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으로 모두가 힘들어진 일도 애통해야 합니다.
“너 왜 그렇게 해? 그렇게 밖에 못해? 그 따위로 할 거야?” 하기보다는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 조국 한국이 분단되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일도 애통해야 합니다.
지역갈등으로 반목하는 현실도 애통해야 합니다.
서로 의견이 나뉘어 돌아서는 일에도 애통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 앞에서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홀로 삭히는 것입니다.
맞서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대놓고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질 하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 주님!!” 하면서 깊이 기도하는 일이 애통입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위로를 주십니다. 할렐루야~
<애통하는 은혜로 살자>
오늘 설교 제목을 “할아버지의 수염”이라 정했습니다.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
할아버지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 그 기름이 수염으로 흘러내립니다.
시 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본디 할아버지의 수염에는 하나님이 머리에 부어주신 향기로운 기름이 흘러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차게 해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러나 그 수염을 손주에게 내 줍니다. 기꺼이~
손주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우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모든 것을 내어주듯이,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내어주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함께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간구하는 심령”이 있습니다.
간구하는 심령으로 “애통”을 간구해야 합니다.
아~ 내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았습니다. 애통합니다. 통곡합니다. 할아버지!
아~ 우리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애통합니다. 통곡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나 아직까지 유대인들, 애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아직도 뉘우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간구하는 심령”을 주셨지만, 그들은 아직 간구하지 않습니다.
때가 덜 찼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간구하는 심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간구하는 심령”으로 애통을 간구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 수염을 잡았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못 박았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