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대구 매일신문사에
서 기자로 일했다.
1980년 《시조문학》지 천료.
시조집으로 『빈 들의 집 서역 가는 길』
『저 혼자 꽃 필때에 달집 태우기』
『명창 엎드려 별을 보다』
『꽃벼랑』
『아프지 않다 외롭지 않다』
『너와 보낸 봄날 세상의 모든 딸들』
『ALL THE DAUGHTERS OF THE EARTH』
『깨끗한 절정』
『먼 사랑』 이 있고,
동화집으로 『하늘 발자국』 이 있다.
한국시조작품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한국단시조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회 운영위원,
국제시조협회 이사,
《시조튜브》 대표.
◆ilyeon2003@hanmail.net
책 소개
단시조가 지닌 미학과 의미, 방향성을 감성적 분석과 이성적 논리로 풀어주는 150편의 단시조 읽기
자유시의 도입과 함께 태동한 현대시조, 그 100년의 가장 큰 변화는 시조를 창사唱詞라는 음악적 범주에서 본격 문학의 장르로 정착시킨 성과라 할 것이다. 양적으로도 연간 고시조 전체의 창작 성과를 넘어서고 질적으로도 다양한 결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가히 시조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외형 성장에 비하여 시조가 현대문학이 요구하는 독자적인 가수요를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적 물음 앞에서는 확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같은 물음의 중심에는 단연 시조만의 질서, 즉 정형성이 갖는 정체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데는 시조의 원형에 대한 장르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이 우선 조건이 되겠는데 그 단초가 단시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김일연 시인의 『시조의 향연』은 계간 《시조21》 기획으로 25(2013년 여름호)부터 시작하여 60호(2022년 봄)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내가 읽은 단시조」란 이름 아래 연재한 글 모음으로, 오늘의 작품을 통해 단시조가 지닌 미학과 의미,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감성적 분석과 이성적 논리로 풀어주고 있다. 여기에는 단시조가 품어야 할 호흡과 정제미를 중심으로 시대 미의식이 조명되어 현대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창조적 계승의 가늠자가 다각도로 제시되어 있다.
책 내용 일부
생각은 환한 유등 속에서
한껏 부풀다, 흐른다
조안 「잠실철교를 지나며」
최영효 「개살구」
서정화 「염소와 나」
고은희 「철학하는 강」
잠실대교, 영동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마포대교······ 늦은 밤 서울의 올림픽대로를 운전해 가다 보면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에 밝혀놓은 색색의 불빛들이 강물에 어리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울긋불긋한 물감이 물속에 번져 어리는 이 풍경들은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어설프게 복제한 그림 같기도 한데요. 이런 풍경이 주는 느낌은 다소 가볍고도 무겁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빛이 넘치는 그 조야한 표면 아래에는 검은 물처럼 어두운 현실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런 것일까요.
뻐꾸기 울음 속에
풍경처럼 잠겼다가
서울로 와 전철에 간신히 끼어 탔다
물살에
떴다. 가라앉았다. 쓸려가는 나뭇가지
- 조안 「잠실철교를 지나며」
밤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불빛이 어룽대는 한강인데 낮에는 이런 나뭇가지들이 부침하며 쓸려 가고 있네요. "뻐꾸기 울음 속에/ 풍경처럼 잠겼"던 "나뭇가지"가 "서울로 와 전철에 간신히 끼어 타"고 대처라는 "물살에/ 떴다, 가라앉았다. 쓸려가"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와서 서울에 간신히 발붙이고 살고 있는, 피로에 절어 눈을 감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고 토끼 눈이 되어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 입니다. 저의 집은 잠실 너머에 있어서 오다가다 잠실철교를 지나는 초록색의 2호선 전동차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한강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며 "쓸려가는 나뭇가지"들을 태운 전동차는 "서울로 와 전철에 간신히 끼어" 탄 사람들로 만원
이겠지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삶에 지친 주인공이 피리새의 울음을 찾아 오래전 떠났던 고향을 찾아가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나뭇가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뻐꾸기 울음 속에 풍경처럼 다시 잠겨볼 날이 오겠지요. 현실은 많이 달라지지 않겠지만 인생 '후반부'를 살아낼 새로운 힘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니까요.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이 문득 생각납니다. 작은 중절모, 꽉 끼는 저고리에 대비되는 헐렁한 낡은 바지, 커다란 구두를 신었어요. 지팡이와 콧수염으로 그 시절에 유행하던 댄디 스타일의 멋을 내었었지요.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와 과장된 몸짓, 무심한 표정, 애수 어린 눈빛으로 떠돌이 부랑자가 되어 무성영화 속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던 그였고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 그런 소외의 문제들을 말이 아닌 몸으로 열연해 주던 그였습니다. 그리고 배삼룡(1926~2010)이라는 한국의 코미디언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
스꽝스럽고 못나고 어눌한 바보를 연기했습니다. 답답하리만큼 눌변이었던 모습으로 그만큼 답답하고 서러운 심정을 억누르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던 코미디언이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바짓가랑이를 두 팔에 끼고 두 다리는 윗도리 소매에 밀어 넣은 마네킹을 세운 한 현대 외국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을 보았었는데 꼭 그런 모습으로 그가 칠삭둥이 바보 연기를 했었다고 하던 한 작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잎 먼저 꽃이 피는 칠삭둥이 개살구야
피어봤자 눈시울 젖지 익어봤자 개꿈만 꾸지
쓰다 만 이력서 뒤에 발목 부은 여름만 가지
-최영효 「개살구」
"칠삭둥이 개살구도 필경 한 "나뭇가지처럼 그렇게 고향을 떠나 취직을 하려고 성공의 꿈을 품고 대처로 나왔을 겁니다. "잎 먼저 꽃이 피는" 마음이 급하군요. 그런데 어쩌지요. 열심히 "피어봤자", 눈물 나게 노력하여 "익어봤자" 되는 일이 없네요. "눈시울 젖"는 일이 다반사, 성공의 꿈은 "개꿈"이 되고 "쓰다만 이력서"만 쌓여갑니다. 이력서 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발목이 부었네요. 취직의 계절인 봄이 가고 "발목 부은" 채 또 여름이 가고…………. 고향의 부모님께 부쳐드려야할 생활비며 그동안 진 빚은 언제나 다 갚게 될까요.
큰따옴표를 해야 할 시어가 엄청 많이 나와 있네요. 보통은 한 작품에서 이처럼 많은 시어가 나오면 혼란스럽고 산만해지기가 쉬운데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이 읽힌다는 것은 이질감이 없는 시어들의 이음새가 부드럽다는 것, 그들이 한곳으로 잘 집중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겠지요.
가는 길이
무너지며
주르륵 쏟아졌다
시원始原의
좁다란 벽
문득, 뒤돌아보니
아득한
수직 절벽이
한 몸인 게 보인다
- 서정화 「염소와 나」
그러나 누군들 가는 길을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꽃길만이 겠습니까. 살면서 "가는 길이/ 무너지며/ 주르륵 쏟아지"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걸어온 길 "문득, 뒤돌아보니// 아득한/ 수직 절벽"과 "한 몸"이 되어 위태롭게 붙어 있는 염소 같은 내가 보이는군요. 차마고도의 옥룡설산 절벽에 가파르게 붙어 있던 염소들이 생각납니다. 이 작품 속에 염소로 표현된 나의 모습이 해발 4~5천 미터의 험준한 설산과 가파른 협곡 사이를 다니는 마방의 모습처럼 아찔하네요.
반반한
수면을 믿고
온몸을
확, 맡길까
깊이도 모른 채
건너가는 비정규직
생각은
환한 유등 속에서
한껏 부풀다.
흐른다
-고은희 「 철학하는 강」
제목이 독특한 이 작품은 종장 "생각은/ 환한 유등 속에서/ 한껏 부풀다,/ 흐른다"에서 희극적인 모습의 일단을 보여주네요. 한껏 부풀다 흐르는 것은 비정규직의 몽상과도 같고요, '철학하는 강'이란 제목에서도 냉소적인 모습을 볼 수 있군요. "깊이도 모른 채/ 건너가는 비정규직"들의 생각들이 모여 흘러가는 「철학하는 강」은 서양철학에서도 동양 철학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페이소스가 흐르고 있네요.
오늘 읽어본 시조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의 불안, 뿌리를 잃고 사는 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시조의 리듬과 구성에 잘 실려 있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군요. 최영효 시인의 「개살구」에서는 시어가 어울려 빚어내는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네요. 무엇보다 시대의 아픔과 절망을 이만큼 승화된 시의 형태로 표현해 내는 현대시조의 역량이 믿음직합니다.
배면에 깔린 따뜻한 측은지심들과 그리고 투영된 대상인 나뭇가지, 개살구, 염소 등의 이미지가 부자연스럽지 않고, 종장의 운용에 있어서 모두 긴장미를 잃지 않고 있어 시조로서의 작품성도 지닌 것으로 읽었습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일도 "물살에/ 떴다, 가라앉았다. 쓸려가는 나뭇가지"와 같은 모습이거나 "칠삭둥이 개살구"의 일이거나 "아득한/ 수직 절벽"과"한 몸"이 되는 일이거나 "반반한/ 수면을 믿고/ 온몸을/ 확, 맡길까" 의심하며 "깊이도 모른 채/ 건너가는 비정규직"과 같은 처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채플린이나 배삼룡이라면 현대의 시인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요. 좀 웃고 싶어서 어디 우스운 코미디 영화가 없나 찾아보기도 하지만 저의 삶 자체가 희극이라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것, 오고야 말 것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 ...... 그런 슬픈 코미디 같은 나날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말이지요.
단시조가 지닌 미학과 의미, 방향성을
감성적 분석과 이성적 논리로 풀어주는
150편의 단시조 읽기
자유시의 도입과 함께 태동한 현대시조, 그 100년의 가장 큰 변화는 시조를 창사라는 음악적 범주에서 본격 문학의 장르로 정착시킨 성과라 할 것이다. 양적으로도 연간 고시조 전체의 창작 성과를 넘어서고 질적으로도 다양한 결을 보여주고 있으니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가히 시조의 르네상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러한 외형 성장에 비하여 시조가 현대문학이 요구하는 독자적인 가수요를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적 물음 앞에서는 확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같은 물음의 중심에는 단연 시조만의 질서, 즉 정형성이 갖는 정체성 훼손에 대한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데는 시조의 원형에 대한 장르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이 우선 조건이 되겠는데 그 단초가 단시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김일연 시인의 『시조의 향연』은 계간 《시조21》 기획으로 25호(2013년 여름호)부터 시작하여 60호(2022년 봄)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내가 읽은 단시조」란 이름 아래 연재한 글 모음으로, 오늘의 작품을 통해 단시조가 지닌 미학과 의미,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감성적 분석과 이성적 논리로 풀어주고 있다. 여기에는 단시조가 품어야 할 호흡과 정제미를 중심으로 시대 미의식이 조명되어 현대시조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창조적 계승의 가늠자가 다각도로 제시되어 있다.
-민병도 시인. 계간 <시조21>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