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궁정동에 도착할 시각이 다가오자 김재규와 김계원 은 만찬장인 나동으로 향했다. 윤병서 비서의 기억에 따르면 이 때가 저녁 5시40분경이었다. 김재규는 본관을 나서면서 따라 나 오는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에게 귀엣말로 "2 차장보가 오늘 손님을 모시고 올 텐데 저녁 7시까지 내가 나오지 못하면 손님들끼리 먼저 식사를 하도록 하게"라고 당부했다.
아담한 2층 양옥 건 물 나동 앞에는 정원이 있고 화강암을 깎아서 만든 경계석이 화 단과 마당을 가르고 있었다. 여기에 걸터앉은 김재규 정보부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은 계속해서 차지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었 다.
"사회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실장님도 모르실 것입니다. 부 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우선은 조용해졌지만 며칠이나 가겠습니 까." "김 부장, 대한민국 정부가 그렇게 약한 줄 아시오. 학생들이 비판한다고 오늘 내일 정부가 쓰러질 것 같소.".
"맑은 물에 무엇같은 놈 한 마리가 앉아서 자주 물을 흐려 놓 으니 일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만 있으면 각하에게 쪼르르 쫓아가서 고자질을 하니 야단이야. 그러니 각하는 자꾸 강경해지시고….".
"오늘 저놈을 해치워야 일이 올바르게 되지 저놈이 옆에서 각 하의 판단을 흐려 놓는 한 잘 되기는 글렀습니다. 저 놈을 오늘 해치울까요, 어떻게 하지요.".
김계원은 이때 김 부장이 또 과격한 불평을 하는구나 하고 생 각했다. 그래서 "차 실장의 월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일 이야기하게 되어 있어"라고 했다. 김재규는 "미지근하게 하 면 안 됩니다"고 다짐을 주듯 말했다.
정보부 안전국장 김근수가 10·26사건 뒤에 합수부에서 진술 한 내용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1979년 5월 중순 어느날 오전 에 신민당 전당대회에 관련된 보고를 부장에게 올리는 정보부 간 부회의가 있었다.
김재규는 "차 실장은 ○○○을 어떻게 조종했는지 모르겠어. ○○○이 무슨 보스인가. 이기택만도 못한 머저리 바보다"라고 했다. 이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을 조종하여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저지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그 책임을 정보부의 무능으 로 돌리는데 대한 신경질이었다.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에다가 정 보처를 신설하여 산하에 사설정보대를 운영하고 여야 양쪽에다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국회의원들을 조직하여 두고는 정보부가 해 오던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정치공작의 설계를 경호실장이 하고 정보부는 그 심부름을 하 는 형편이었다. 정치공작이 실패로 돌아가면 차지철은 책임을 정 보부로 돌려 버리곤 했다. 김재규는 수시로 경호실장에게 불려 가서 지시를 받고오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정보부 간부 들이 다 알고 있어 부장의 권위도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차지철 실장이 정치에 신경쓰느라고 본연의 임무인 경호는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오후 5시40분쯤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대통령을 모시러 가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부관 이석우가 떠나는 실장에게 권총을 건네 주었다. 실장은 "갖고 있으라"고 돌려 주는 것이었다. 이석 우 부관은 권총을 받아 도시락 상자같이 생긴 권총집에다가 넣었 다. 이석우는 그 전에도 차 실장이 궁정동으로 대통령을 수행하 러 나설 때는 권총을 건넸으나 매번 차지철은 되돌려주기만 하는 것이었다. 오기가 생긴 이 부관은 '그래도 대통령을 모시는 자 리인데 경호실장이 권총을 안차고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권총을 권했다. 차 실장이 권총을 차고 가지 않게 된 것은 서너 달 이전부터였다. 이석우는 차 실장이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오후 5시50분쯤 차지철은 부속실로 올라왔다. 대통령 부속실 이광형 부관은 그때 비로소 저녁 약속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 통령은 집무실을 나서면서 약간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 다.
"이군, 나 경호실장 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까 서재 문 잠그 고. 어… 그런데 인터폰하니까 근혜 없던데, 근혜 어딨나.".
그때 근혜는 응접실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근 혜의 방으로 인터폰을 건 모양이었다.
"근혜보고 먼저 밥먹으라고 이야기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던 것들은 위에 올려 놓고." "예.".
경호실장과 대통령이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이 부관은 밖으로 뒤따라 나와 대통령의 등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히 다녀 오십시오.".
본관 앞에는 비공식 행사때 쓰는 크라운 슈퍼살롱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본관 당직 책임자 함수용 경호과장이 승 용차의 문을 열고 있다가 대통령을 배웅하였다. 차 실장은 대통 령 옆자리에 탔다. 정인형 경호처장은 자신의 지정석이나 다름없 는 운전사 옆자리에 앉았다. 정인형 처장은 지도를 항상 준비해 있다가 뒷좌석에 앉은 대통령이 "저 공장은 뭐야"하고 물을 때마 다 즉답을 해야 했다. 요사이 그는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할 입장이었으나 대통령 앞에서 불경스럽게 보일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석에선 "이제 나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라 고 말하기도 했다. 안재송 부처장,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 호관은 뒷차에 탔다.
오후 6시5분, 대통령을 태운 슈퍼살롱이 궁정동 나동에 도착 했다. 이 슈퍼살롱은 대통령이 사적인 행차를 할 때 쓰는 차였고 운전사도 공용차 운전사 이타관이 아닌 김용태였다. 남효주 사무 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른쪽 뒷문을 열었다. 대통령이 내리자 왼쪽 문으로 차 실장이 내렸다. 대통령은 내리면서 남 사무관에 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효주는 '오늘은 각하께서 별로 기 분이 좋으신 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대통령을 모셔 본 남사무관은 대통령의 표정만 보면 그날 기분을 대충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꼭 "별일 없나"란 말을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남 사무관이 대통령 일행을 만찬장인 안방으로 안내했다. 주 방으로 돌아오니 정인형, 안재송, 김용태 세 사람이 주방 한가운 데에 있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방 바깥 에서는 김용섭 경호관이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과 함께 그가 원당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 통을 뉴 코티나 보닛 위에 올려 놓 고 마시고 있었다. 박상범은 속이 거북하여 김용태가 주는 가스 명수를 마셨다. 남효주는 요리사에게 안주를 빨리 준비하라고 시 킨 뒤에 정인형 처장에게 "그만 들고 나가시지요"라고 했다.
당시 경호 관례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들은 정보부가 관할하 는 궁정동 시설에 도착한 뒤에는 대통령 경호를 정보부에 넘기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궁정동에 도착한 청와대 경호원들은 한숨을 돌리고 식사를 하곤 했다. 이곳 궁정동을 관리하는 정보부 직원 들 하고는 워낙 얼굴이 익고 친구 사이인 경우도 있어 일단 긴장 을 푸는 것이었다.
김계원은 만찬장인 안방에 들어가자 안쪽으로 마주보고 앉게 된 대통령에게 "각하, 오늘 행사에 다녀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괜찮습니까"라고 했다. 대통령은 "아, 괜찮아요. 그 큰 공사를 잘 했던데"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삽교천을 다녀온 감상을 설명 하면서 "KBS에서는 준공식을 방영하지 않나"라고 했다. 차 실장 이 "시간이 되면 틀겠습니다"고 안심시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