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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인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 나갔다가 사자에게 쫓겨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도망치다가 실족해서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정신차려 보니 절벽에 있는 덩굴을 발견하고 얼떨결에 넝쿨을 잡아 추락사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사자는 아직도 올라오면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고 있었습니다. 절벽밑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덩굴을 잡은 손은 힘이 빠져가고 이젠 정말 극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달콤한 냄새가 나기에 쳐다보았더니 손이 닿을만한 곳에 꿀벌집이 있었고 꿀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꿀을 찍어 먹으니 꿀맛이 좋았습니다. 힘이 다시 솟아나니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살았다 싶었지만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쳐다보니 덩굴 끝부분에 흰 쥐와 검은 쥐가 덩굴을 깕아 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금 읽은 이야기처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결국은 멸망으로 달려가는 위기의 삶을 살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끝이나는 인생입니다. 이런 위기의 인생속에서 이제 우리는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절망가운데 살다가 인생이 끝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면 우리는 삶은 완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않고 어두움과 죽음의 삶을 살아가던 인생이 이젠 구원받고 완전히 탈바꿈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어려움이 생기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만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갈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벗어나고 죽음에서 벗어나고 아픔에서 벗어나고 절망에서 벗어나 참 인생의 존재가치를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학개서에 등장하는 선지자 학개의 네 편의 설교가운데 세 번째 설교라고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본문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왜소한 성전의 외형을 보며 낙담한 백성들을 격려한 두 번째 설교이고 그 이후 약 2개월이 지났을 때 주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 재건을 재개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 예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복된 인생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변화된 신앙인으로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 가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변화의 삶, 첫째는 완전히 탈바꿈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학개 2장 14절입니다.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신앙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 무너져 있는 상태를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완전히 거룩하게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상태를 진단하시고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참 치료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너무나 우리를 잘 아십니다. 자동차를 잘 고치는 카센터 사장님도 자동차의 세밀한 고장원인에 대해서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수 만개, 수십 만개의 부품중 조그마한 나사 하나의 실수까지 찾아내려면 어디를 찾아가야할까요? 카센터 사장님도 못 찾아내는 고장을 어쩌면 자동차 제조회사에서는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차를 설계하고 개발연구해서 제조하는 회사에서는 조그마한 나사 하나의 고장원인까지 찾아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소한 부분의 고장까지 발견해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인간의 설계자, 인간의 창조자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정확히 진단하시고 우리를 고칠 수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1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삶이 왜 문제가 생겼는 지 분명히 아시고 지적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문제, 생활적인 문제의 원인은 바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완전한 변화를 받아 하나님과 동행해야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앞에서도 사람앞에서도 거룩한 척, 실 수 없는 척, 완벽한 척 살아갑니다. 그러니 문제가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학개 2장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여기서 ‘옷자락’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옷자락’은 ‘천 조각’, 혹은 ‘보자기’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선지자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보자기에 거룩한 고기를 싸서 성전에 가져갔는데 그 보자기를 집으로 다시 가져가서 떡, 국, 포도주, 기름, 혹은 다른 음식물을 쌓다면 이 보자기는 거룩한 보자기냐? 거룩하지 않은 보자기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은 보자기 자체는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학개 선지자는 제사장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여기서 ‘보자기’는 율법에서 정한 ‘제사제도’를 가르킵니다. ‘제사의식 참여’라는 것이 자체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제사의식참여만으로 자동적으로 거룩해진다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생각하지만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인 감각없이 제사의식만 참석한다고 해서 거룩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분명한 교훈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또 수시로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의 시간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의식과 예배의 가치로서 거룩한 예배, 경건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고 우리가 자동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예배를 드렸다든지, 아니면 교회에 오면서 어떤 사람만 만나기 위해 온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났으니 교회에 온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교회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받지 못하고 예배시간에 신실한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높이지 못했다면 참 예배를 드렸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냐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냐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주의적인 신앙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학개 2장 13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는 반대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체를 만졌습니다. 그 시체를 만지면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아 성물을 먹지 못하고 가능한 사람과의 접촉을 자제하게 됩니다. 레위기의 법에 따르면 한 번 부정해진 손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만지면 그가 만진 모든 것들이 동일하게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그런데 왜 학개는 지금 이런 말씀을 전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형식주의 신앙으로 세상가운데 악하게 살아가면서 이미 하나님앞에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체를 만져 부정한 자로 취급받은 사람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앞에 범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성물을 만진다고 거룩해지냐?’는 것입니다. 더러운 손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성스러운 물건을 취급하게 된다고 해서 단 번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학개 2장 14절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정해지고 더렵혀진 인간이 어떻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거룩해지겠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학개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하면서 외치는 말씀이 꼭 이 시대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너무 씁쓸하고 안타깝습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외치고 거룩한 척, 고상한 척, 다 아는 척,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지만, 그리고 각종 봉사과 섬김에도 열심을 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진정 참 신앙, 내면의 순수한 영혼,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하나님만 따르겠다는 생각은 다 사라지지는 않았는 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돈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명예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다 하고, 나의 존재가 인정받고 나의 지식이 사람들에게 대접받기 때문에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지는 교회가 되면 이익과 권세를 나눠먹는 교회조직, 하나님을 위한 사업을 한다는 이름으로 편법과 비리가 빈번해지는 교회사역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면서 정말 이런 교회의 모습이라면 통곡해야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여나 저와 여러분, 우리도 삶가운데, 신앙생활가운데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 본문에서 학개 선지자가 외치는 것은 참 예배를 통해 변화된 영혼이 참 예배자로 서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젠 완전히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은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 예배 의식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의 삶은 예배회복을 통해 일어납니다. 예배형식의 회복이 아닌 참 예배자로서 삶의 회복입니다. 예배의 형식, 예배의식 자체가 삶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심령깊은 곳에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만드시며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전과는 다른 완전한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삶은 조금 변화된 삶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이라고 사도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전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벽히 새로운 삶, 거룩한 인생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변화의 삶, 둘째는 항상 첫 신앙을 돌아보며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학개 2장 15절 말씀입니다.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기억하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 지 우리 스스로 돌이켜보며 우리의 신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우리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자신을 제일 잘 아는 줄로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부패한 죄성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인식도 왜곡하기에 자기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 교만한 사람인데도 자신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분명 남들이 보기에 진짜 편협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로 살아가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나 가슴이 열려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성은 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분석하면서도 자신은 깨끗한 척 하며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비난합니다. 신앙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상태는 어떤 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지적하기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신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자신을 비판하는 안목을 가질 수 없습니다. 신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며 비난하기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비난하면서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된 신앙인이 아닙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해도 그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 합리화하면서 남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청난 비난을 합니다.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정도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내로남불”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42절입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세상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보다 덜 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더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적인 죄가 없는 척 살아가고 자신의 영적인 악함을 회개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큰 죄악의 영적 질병에 걸려도 그 질병이 가져다주는 영적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아무런 영적 감각없이 살아갑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도 영적인 죄, 영적인 악함이 있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인 죄, 영적 악이 있을 때 하나님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바로 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부터 말씀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보면서 자신에게 먼저 잣대를 대고 자신을 비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그리스도로 인해 변화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제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말씀속에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종교개혁자 요하네스 깔뱅은 “인간의 자기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에 의존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얼마나 정욕 덩어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진실된 기도를 할 때에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모습을 제대로 봐야지만 하나님앞에 진정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인생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학개가 ‘이전 그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 지, 우리의 상황이 어떠했는 지, 우리가 그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 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진정 감사의 회복, 은혜의 회복이 가능한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내게 주신 은혜를 추억하고 나의 힘든 형편속에서도 은혜로 인도하셨던 과거를 항상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거를 기억하며 지금 잘못된 것을 돌이킬 때 다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학개 2장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앞의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 즉,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위에 놓이지 아니하였던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는데 18절 말씀에서는 ‘9월 24일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현 상태가 어떤 지를 냉철하게 되돌아보면서 지금 어디쯤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 지, 과거에는 어떤 환경이었는데 이렇게 은혜가운데 일이 진척되고 있는 지를 분명히 깨달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건축을 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항상 돌아보며 반성해야할 것은 반성하고 잘하고 있는 것은 더 잘 할 수 있도록 매일 점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신앙의 성숙이고 참다운 변화된 인생이 하루하루 살아갈 방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속에서 그리스도로 변화된 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말씀가운데 돌아보며 첫 사랑의 그 때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은 때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신 간증의 제목들이 어떤 것이 있는 지를 깨닫고 항상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날마다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변화의 삶, 마지막 셋째는, 하나님의 복된 존재임을 깨닫는 삶입니다.
학개 2장 19절입니다.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선지자의 선포를 들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정말 암담했습니다. 현실을 보면 도무지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고 집도 새로 짓고 일을 열심히 해서 든든한 기반을 세워보려고 했는데 남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수고에 비해 삶이 나날이 궁핍해져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보니 ‘20고르를 심으면 10고르를 수확하고 포도즙틀에서 50고르를 거둘 것을 생각했는데 20고르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농작물을 심어 키우는데 각종 병충해가 찾아오고 깜뿌기 재앙이 생기고 우박이 내려 수확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실을 기대하며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모든 과정과 결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 삶의 모든 결실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았고 자신의 열심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삶이 고달팠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모든 삶의 수고에 대해 우리의 삶에 열매맺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앞에 맡기는 저와 여러분이 됫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3절도 같이 보시겠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우리의 삶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에 대해 선한 결과를 허락하시고 좋은 열매를 허락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입니다. 인본주의 세상적 가치관에서 하나님 절대주권의 가치관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이 된 변화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시고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안에서 은혜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과 접하여 세상속에서 살다보면 세상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나의 생각, 나의 지식, 나의 의지, 나의 노력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항상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식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의지가 내 삶속에서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매여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되면 우리는 나의 형편과 세상의 모든 상황을 보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복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과는 다른 가치의 인간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형편, 세상적인 부의 기준,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좌지우지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복된 존재로 부르셨고 이 복된 존재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인생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기뻐하며 정말 우리의 존재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혈로 값주고 사신 거룩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택함받은 거룩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백성이 변화된 모습에서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속적인 가치관속에서 인본주의적 사고로 살아가며 인간이 주인되는 삶을 살아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인간이 주인이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에게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우리의 존재, 우리의 가치를 잊어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큰 어려움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가치를 잃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현재의 어려움 또한 해결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인간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하나님중심의 신앙, 신본주의 삶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삶가운데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