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보리사 가래나무 - 옴 샨티 샨티 옴
Included in their critique of Edgar Bauer's "critical critique" is a small, but very important essay on love in which reference is made to the following statement by Bauer: "Love is a cruel goddess, who like all deities, wants to possess the whole man and who is not content until he has sacrificed to her not only his soul but also his physical self. Her cult is suffering; the peak of this cult is self-sacrifice, is suicide" (my translation).
[<비판적 비평>에 나오는 에드가 바우어의 말이다. “사랑은 잔인한 여신이다. 모든 신들처럼 이 여신도 모든 인간을 소유하려고 한다. 영혼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바쳐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러한 미친 사랑은 결국 자기를 없애는 자살까지 이르게 된다.”]
♧ 학명 : Juglans mandshurica Maxim. / 가래나무과 가래나무속
♧ 꽃말 : 지성(intellect)
“이 세상은 무(無)이고 환(幻)이고 공(空)이다.”
틈틈이 불교 공부를 하면서 자주 쓰는 나의 문장이다.
“옴 샨티 샨티 옴.”
글을 쓰다 딱히 마무리할 문장이 없으면 갈무리하는 나의 주문(呪文)이다.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김성동의 <만다라>를 읽고 나서다. 책장에 꽂혀 있는 빨간색 표지에 이끌려 손에 잡았다가 단숨에 해치웠는데, “남녀가 이층을 지었다”라는 문장과 그 뒤에 오는 허허로움에 대한 무상(無常)의 표현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성(性) 충동이 강하게 느껴지는 몸이지만 실제로 행할 수 없고, 그럴 용기도 없어 애만 태우는 사춘기에 행위의 끝이 허무하다는 말들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것을 확장해 인생까지 사유하는 장면에서는 뭔가를 이룬다는 것 또한 허무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나름 노력해도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는 성적이 주는 고통에서 잠시라도 해방되는 것 같았다.
그 뒤에도 불교 관심은 끊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불경을 보면서 내 생각을 진전시키고 있는 이유는 아마 목표대로 성취해내지 못하는 나를 방어하기 위한 방편이 아닐까 싶다.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권력이면 권력 등 크고 작은 계획들을 세우고 사는 이 세상의 삶에서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알고 난 뒤, 그 마음의 상처를 가장 잘 위무하는 게 부처님 말씀이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세상은 무(無)이고 환(幻)이고 공(空)이다”와 “옴 샨티 샨티 옴”이라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의 문장이 아닌 듯한 문장을 쓰고 있는 걸까? 불교 내공이 깊어서일까? 더군다나 불교식이라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해야 할 텐데, 자기만의 “옴 샨티 샨티 옴”은 또 무슨 조합어란 말인가? 간단히 말해 ‘자뻑’이다.
불교 책을 보면 반복의 말들이 많다. 그것을 헤아리다 보니 우주의 실체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있는 것은 현상이고 그 현상을 보는 우리 몸들이 일시적으로 생주이멸(生住異滅)하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시공간 개념으로 보면 그것도 역시 없는 것이 된다. 이를 인식시키기 위해 수많은 말들이 비유와 수식으로 등장하지만, 핵심은 무(無)와 환(幻)과 공(空)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내 몸에서 일치시키면 일치시킬수록 현실의 마음은 잠시라도 편안해진다. 그게 깨달음이고 열반이라고 일컬을 수 있지만, 결국은 현상에서 현존하는 순간의 내가 행복해지는 방편으로서의 인식 활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옴 샨티 샨티 옴”이라는 주문을 만든 것은 내가 절에 열심히 다니는 불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계사에서 신도교육을 통해 대원이라는 법명까지 수계식 때 받았지만, 지금 나는 대웅전에 들어가 절 한 번 하지 않는 일반인이기에 자뻑 차원으로 ‘옴 샨티 샨티 옴’을 만든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다 개수작인데, 이 모순의 인식과 행동은 아마 숨을 쉬는 동안 불변하지 않을 진리일 것이다. 그것을 그나마 없애려고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게 나무인데, 이도 그리 쉽지는 않다. 이 세상은 팩트를 누구에게나 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북한산 보리사 가래나무를 보면서 꽤나 절실히 느꼈다.
에리히 프롬이 직접 번역했다는 바우어의 말을 보자.
[<비판적 비평>에 나오는 에드가 바우어의 말이다. “사랑은 잔인한 여신이다. 모든 신들처럼 이 여신도 모든 인간을 소유하려고 한다. 영혼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바쳐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러한 미친 사랑은 결국 자기를 없애는 자살까지 이르게 된다.”]
이 글에 대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랑을 인간과 분리시켜 독립된 실체로 변모시켰기 때문에 비극이 빚어지게 된다고 언급했다. 즉 사랑은 인간이 행하는 인간의 감정일 뿐인데, 별도의 사랑을 설정해 놓는 순간 또 다른 종교 혹은 우상이 되어 소외된 숭배를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을 나눌 때는 한없이 즐겁고 행복하지만, 사랑이 깨지는 순간 섬기거나 기댈 그 무엇이 없어 스스로의 삶도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행위이든 다 실체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먼지보다 더 작고 번개보다 더 짧은 우리 삶이지만 눈앞에 어떤 실체를 놓고 갈구해야만 삶은 더 윤택해지고 강인해진다. 법당의 불상이나 교회의 예수상이나 무속신앙의 나무나 살아가는 현상의 원리는 다 같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 흐르고 있는 불교의 불생(不生)이냐, 기독교의 영생(永生)이냐, 무속신앙의 영원한 내재이냐, 그것은 각자의 선택일 것이다.
세상에 대해 도인 같은 깨달음을 모래 크기만큼 가지고 있다고 자뻑하며 사는 내가 나무 공부에서 신뢰하는 것은 거주자 우선이다. 적어도 사계절을 겪었다면 꽃, 열매, 나뭇잎을 모두 보았을 것이고, 그 나무가 우리에게 유익한 먹거리를 주는 유실수라면 나무 이름은 정확히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데 그것이 매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객들이 붐비도록 오고가는 북한산 보리사 옆에 심겨진 나무가 호두나무라는 스님의 말과 달리 나무공부 함께하는 선생님으로부터 가래나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스통으로 만든 상운사 택배함이 웃음을 머금게 하는 것을 뒤로 하고 고개를 들어 천천히 가래나무를 응시했다. 한 나무줄기로 치솟다 3미터쯤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 나무줄기 가운데 하나는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단 줄이 휘감고 돌아가 자연스레 시선을 양 옆으로 흩뿌리지만, 강아지풀처럼 늘어진 연둣빛 수꽃이삭들과 얼른 따서 나물로 무쳐 먹고 싶은 갓 나온 싹들이 발라먹은 뼈다귀 같은 우중충한 나뭇가지에서 기지개를 켜며 나오는 팔딱팔딱 튀는 풍경 때문에 얼굴은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순간 그 사이로 접혀 들어오는 대웅전 처마와 지붕들이, 그 한쪽 구석에 웅숭그리고 있는 산신각이, 원효봉 정상으로 치닫는 녹색 물결과 군데군데 등 넓은 물고기처럼 희번득한 바위들이, 북한산 햇살과 바람에 실리면서 돌풍 같은 전율을 일으키며 나를 가래나무 안으로 밀어넣는 것 같았지만, 다시 또 헷갈리기만 한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라는 이름 때문에 나무를 유심히 보려고 했다. 그러나 뻗어 있는 잎과 열매가 없는 이 헛헛한 현상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무공부를 열심히 시켜주시는 선생님들을 따라 느린 산행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매일 호두나무를 되뇌는 것과 가래나무를 되뇌는 것, 그 차이가 가져다주는 깨달음의 간극이 문득 궁금해졌지만, 수없이 틀린 팩트를 가지고 아니 우리가 지어낸 허상의 팩트를 가지고 이 현상을 산다는 것이 또 미치도록 허무해지기만 해 하산 후 술잔만 기울였다.
가래나무 학명은 Juglans mandshurica Maxim.이다. 속명Juglans는 고대 라틴어 Jovis(제우스)와 glans(견과)의 합성어로 열매의 맛이 좋아서 붙여졌거나 이 열매를 제우스에게 바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종소명 mandshurica는 만주 지방을 뜻한다고 하고, 명명자 Maxim는 러시아 식물학자를 일컫는다. 호두나무 학명은 Juglans regia Linnaeus인데, ‘regia'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일단 호두는 한자 호도(胡桃)의 우리말로, 호두의 열매가 오랑캐의 복숭아 열매를 닮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과 가래나무는 자생종이고, 호두나무는 재배종이라는 것만 기억해둔다.
가래나무의 꽃말은 ‘지성(intellect)’ 즉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자생종보다 더 많은 재배종이 만들어지는 이 시대에, 현상의 이면을 찾기보다 현상의 면면을 끊임없이 인간 위주로 개조하려는 이 시대에 개체들을 정확히 구분하는 안목과 지혜를 가진 분들이 지성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래나무와 호두나무를 분간하지 못하는 나는 어지간해서는 그 어리석음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나무교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현상이 현상을 보여주는 것을
덧없다 하지 말고
현상의 구석구석을 낱낱이 샅샅이 알아야
그 현상의 모든 것을 알고
그 너머의 없는 실체가
정말 제대로 다가온다는 것을
봄날 숨결처럼 알려준
가래나무와
함께 나무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