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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1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 마가복음 7:1-37
요절 / 마가복음 7: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더러움, 부정함과 정결함, 거룩함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정결하게,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또 이것과 예수님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는 손으로 떡 먹는 모습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모든 백성이 떡을 먹을 때 손 씻는 일에 목숨을 걸었는데,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그 일에 소홀하니, 눈에 불꽃이 튀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손 씻는 문제가 종교의식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잘 씻으면 거룩한 것이고, 잘 씻지 않으면 불 경건하고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 외에 장로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킨다는 명목 아래 세부 시행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것들을 잘 지켜야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중 하나가 손 씻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밖에 나갔다오면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율법에 부정하다고 규정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할 수도 있고 그들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이방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혹시 접촉했으면 어쩌나 하며 손을 깨끗이 씻는 정결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도 자주 씻었는데 그 이유는 밤새 더러운 영, 즉 귀신이 와서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전통을 목숨같이 여기고 지키는 것이 거룩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니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아니, 당신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 눈에는 장로들의 전통을 개 무시하는 게 안 보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6,7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차원에서,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차원에서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들을 예수님은 ‘외식’,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정결의식을 행하며 손을 씻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자신들이 세운 전통만 고수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개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사실 그들의 전통은 처음 매우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지킬 것인가? 고민하며 구전으로 내려온 전통들을 묶어 계명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은 저버리고, 비본질인 사람의 전통만 지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은 드리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만을 강조하고 가르치다 결국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고르반’ 전통입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고르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자 하는 결단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모님을 봉양하기 싫으니까, 자신의 재물을 이미 하나님께 드리기로 맹세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놓고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아름다운 전통을 세워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통에 관한 형식만 지킬 뿐, 막상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자세가 없을 때, 아무리 아름다운 전통과 계명이 있을지라도, 얼마든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비본질적인 형식과 전통만 남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잘 담아내는 전통과 형식이어야만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전통이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리면 비본질적인 것에만 마음을 쓰게 되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 속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썩고 부패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 사이도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형식만 남아 마음이 썩고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는가? 우리 마음이 어떠한가? 이것을 꿰뚫어 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예레미야 17장 10절에서도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입으로만,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마음을 쏟아부어야겠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이 있을 때 온 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바깥에서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장 갔다 오면 뭔가 더러운 것에 접촉이 되었을까 걱정하며 온몸을 물에 담궜습니다. 몸은 물론이고, 컵과 그릇까지 물에 담그고 씻어서 깨끗하게 하려 했습니다. 바깥으로부터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며, 어떻게 해서든 바깥에서 들어오는 더러운 것을 차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병환자, 혈루증 앓는 여인, 죽은 시신, 무덤, 이방인 등 접촉하여 나를 오염시키고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결벽증에 가깝게, 멀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할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19,2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음식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은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뒤로 배설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사람 속, 곧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원래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마음은 하얀 백지와 같이 깨끗하고 순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자, 마음이 부패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위에서 언급한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거짓, 음탕, 질투, 비방, 어리석음 등의 악한 생각들로 가득하게 되어 추하고 더럽게 되어 버렸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은 이런 인간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을 때 좋은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항상 악한 생각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도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더럽고 악한 마음이 정결하게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 홍수심판처럼 더러운 세상을 싹 쓸어버리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놓으시고 예수님의 그 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십니다. 죄 때문에 우리의 양심과 마음은 온통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죄 없고 흠 없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 심령을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시편 119편 9절을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죄악된 소원이 점차 사라지고 거룩한 영적 소원으로, 하나님을 닮고자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도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는 대로 우리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성도들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성령의 공동체를 이루기에 힘써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깥의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것들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가르쳐 주시고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때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녀의 딸이 더러운 귀신(악령)에 들려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안에 예쁜 것만 가득해야 할 텐데, 더러운 영, 악령을 가지고 있으니, 엄마로서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녀는 예수님에게 즉시 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사라지고,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겉으로, 혈통적으로, 민족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부정하고 더럽다고 여기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헬라인이고, 스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본문은 2번이나 말하면서 이방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분명 이 여인은 부정하고 더러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딸 안에 있는 더러운 귀신, 악령들을 내쫓고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바깥에 있는 것이 더럽고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간절함이나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움, 비방, 중상모략 같은 악한 생각, 다른 사람, 특히 예수님에 대한 공격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 더러운 게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겸손하고 간절합니다. 남에게 뭐라고 할 게 없습니다. 지금 여인은 누가 자기 딸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예수님만이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실 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여인을 예수님은 어떻게 맞아주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그녀의 간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것도 정중한 거절이 아니라 모욕적인 거절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을, ‘개’는 이방인, 즉 이 여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개’인 너에게 사랑하는 자녀의 떡을 가져다 먼저 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당시 유대 사회에 널리 통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이런 일반적인 비유를 한 개인에게, 그것도 믿음으로 나아온 이 여인에게 그대로 적용하신 것은 좀 심하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개들이 고급 음식을 먹습니다. 애완견 전용 미용실, 전용 식당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납니다. 아프면 동물병원에 데려갑니다. 심지어 껴안고 함께 자기도 합니다. 애완동물 전용 장례식장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은 애완견을 위해 장례 예배까지 드려달라고 하는 등의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요즘은 정말 개팔자가 상팔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개’는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입니다. 거절당해도 마음이 힘들 텐데 모욕적인 말로 무시까지 당하는 여인의 속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인격적이고 사랑이 풍성하신 예수님이 과연 이 여인을 상대로 모욕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까입니다. 27절을 다시 보면 ‘먼저’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자녀는 이스라엘이고 개는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순서가 있는데 먼저 유대인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구원의 순서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이스라엘의 특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를 예언하셨고 약속하신대로 메시아 예수님을 유대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유대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복음을 먼저 전달받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경험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상이 유대인들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방인에게는 은혜를 안 베풀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만을 위해 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 천하 만민이 복을 받길 원하셨습니다. 이사야서 19장 25절을 보면,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라고 했습니다. 이방 나라 애굽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방 나라, 앗수르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하십니다. 이를 볼 때 구약시대부터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는 이방인 구원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가 그대로 보면,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주시기는 하지만, 아직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의 은혜가 임할 때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딸의 더러운 귀신 들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애타게 간청하는 이방 여인을 그렇게 박대하실 분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만나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가신 분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실까요? 여인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만한가? 정말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사모하는가? 속마음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정열을 부채질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인을 좌절에 빠뜨리고 낙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여인이 가진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 주님의 어떤 은혜라도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믿음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대체나 예수님의 의도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여인의 마음에서는 독한 쓴 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Yes, Lord!” 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비천하고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주님의 은혜를 간구할 따름입니다. 이 여인은 개 같은 자신의 자기 인식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기다려야 하는 개처럼, 주님이 은혜 주시기를 기다리며 간구할 뿐입니다. 독한 말, 혈기의 말을 내뱉지 않고, 믿음의 말을 합니다. 여인은 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에 돌아가 본즉, 딸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더러운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더러운 악령이 떠나니 깨끗해진 것입니다. 누가 이 여인의 딸을 더러운 귀신 들린 데서 깨끗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여인은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어떻게 나아갔습니까? “주님, 옳습니다” 주님의 주권과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겉에서, 외부로부터가 아닌 것을 배우게 됩니다. 외적인 혈통과 민족, 이런 것들이 더러움을 규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더럽고 부정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우리의 구주, 메시야이십니다. 31~37절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귀먹고 말 더듬는 자들에게 손을 대시고 “에바다, 열리라” 말씀하시며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사야서 35장 5,6절은 말씀합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예수님은 못 듣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시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풀려 말하고 노래하게 하시는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이십니다. 우리가 이 메시야,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정결함과 부정함의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더럽고 부정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귀를 열리게 하시고 혀를 풀리게 하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십니다. 우리를 능히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날로 죄악이 깊어져만 가는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덧입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므로 정결함을 회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알짜배기, 알곡 신자, 마음이 청결하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