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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엽집(만요슈)’을 해석한 '노래하는 역사' -저자 이영희 교수 ]
1. 이영희 (저자 소개)
작가인 이영희님은 193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한국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11대 국회의원,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을 거쳐
현재 포항제철 인재개발원 교수이며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대한민국아동문학상, 대한민국교육문화상, 소천문학상, 해송동화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 5월 현재, 이영희 후원회 사무국에서
일본 고대사와 일본어의 진상을 추구하는 격월간지 <마나호> 제12호까지 발간했다.
이영희님은 70년대 중반부터 20여 년간 『별님을 사랑한 이야기』등 창작 동화집 27권,
『사랑학 에세이』등 에세이집 4권을 비롯해
일본 文藝春秋사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枕詞의 秘密』『일본어의 진상』『불가사의한 일본어』
『되살아나는 만엽집』『무서운 노래』 등의 8권의 일본어 저술을 통해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작가다.
1989년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나온 「또 하나의 만엽집」은
일본인의 고전「만엽집」에
고대 왜열도에 진출한 한반도 세력의 언어와 역사가 들어있다고 말해 일본에 큰 충격을 줬다.
이영희님은 「천무와 지통」일본어의 진상」등을 잇달아 발표,
고대 일본어 뿌리가 한국어라며,
「만엽집」 노래를 통해 잃어버린 우리 고어를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영희님은 1994년 조선일보에 '노래하는 역사'를 기고하였고,
그 후, 조선일보에서 책으로 발간하였다.
2. 만엽집 소개
7세기의 실종된 역사가 고스란히 일본 노래집 속에,
그것도 한국의 고대어로 찬란하게 숨 쉬고 있다.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간행된 4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만엽집(萬葉集)이 있다.
8세기에 편찬된 이들 책들은 7세기 요동치는 한국의 정세판도에 따라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 고구려계의 황족, 귀족 등
엘리트 집단들이 대거 신천지 일본으로 건너가
서로 정권을 다투는 우리 한국인들끼리의 피 튀기는 정권 각축전을 담은 역사책이다.
물론 주류 일본 학자들은 부정하지만,
애당초 우리말로 읊어진 옛 노래들을 10세기 이후의 일본말로 풀려니 판독이 불가,
곧 요령부득(要領不得)이다.
만엽집(만요슈) 은 고대 일본의 시가로 전 20권 4천5백 16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명 그대로 많은 (만) 시화 (엽)를 모은(집) 시가집으로,
만대의 뒤까지 빛나라는 축복의 뜻이 담겨있다 고도 한다.
주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고대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에 읊어진 노래들이다.
편집자는 반체제 관료였던 오오토모노 야카모치이다.
여러 학설이 있지만 773년쯤 편찬됐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통설이다.
작자는 왕실과 귀족, 병사, 승려 등에서 부터
서민, 거지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지만
노래의 주류는 ‘연애시’들이다.
만엽집은 일본문학의 고전이지만,
우리 향가처럼, 만엽집의 노래들도 한자를 빌려 고유어를 표기한 공통점이 있다.
우리의 신라 향가처럼, 한자로 쓰여져 있으나 한시는 아니다.
한자의 음독과 훈독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두루 활용하여 당시의 노래를 표기해 놓은 것이다.
향가의 표기법이 향찰이라면 만엽집의 표기법은 ‘만엽가명’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백제로부터 한자를 배운 고대 왜 열도에 신라의 향찰도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10세기에 일부 해독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삼국시대의 우리말로 읊어진 노래들을 당시의 일본말로 억지 해독해버림으로써,
뜻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오역이 양산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선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 입학시험에 ‘만엽집’ 해독문제가 반드시 출제되곤 했었으나,
오역의 위험부담을 깨달은 탓인지 최근 ‘만엽집’ 출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간 필자가 해독한 결과에 의하면,
‘만엽집’ 중엔 정치적인 노래가 많고,
섹스의 노래를 가장한 정치 모의의 작품도 적지 않다.
이른바 ‘이중적인 노래’다.
이에 또 일본 사학계의 별칭 "매서운 칼잡이"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
(백제 성왕이 일본의 천황을 겸임하였고,
고구려 연개소문이 656년에 죽지 않고, 일본으로 넘어가 천무천황이 되었고,
신라 문무왕도 죽지 않고, 일본 문무왕이 되었다는 등을 주장하는
좀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학설이지만,
잘 읽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가 집필한
여러 책에서의 충격적인 학설은 고스란히 저자의 만엽집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문무왕이 일본으로부터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대왕암에 수장'되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니...)
3. 만엽집에 한국 사투리가 곳곳에...
여기서 잠깐, 향찰ᆞ이두문자에 대해 언급하고, 만엽집의 충격적 근간 몇 가지만 소개한다.
한글완성 전 한자의 새김과 소리를 활용하여 우리말로 표기한 향찰, 곧 이두는,
신라시대의 설총이 고안한 것으로 배워왔으나
그보다 훨씬 전부터 쓰여 오고 있었으며,
백제, 고구려, 신라의 표기법이 조금씩 달랐다.
일본에 한자가 전래된 것은,《일본서기》책에도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태자에게 처음 가르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백제 17대 아신왕,405년)
이보다 앞서
백제의 여러 지식인, 기술자들이 잇달아 일본행을 하였는데,
이 시기가 바로 우리의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백제 58성을 함락(396년)하였던 때이다.
만엽집 노래가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의 것인데
한자와 약 2백 50년의 시차가 생기고,
백제 식 음과 훈은 상당히 일본화 되었던바,
이런 상태의 한자 독법을 활용하여 이두 식으로 쓴 노래가 만엽집이며
오늘날의 일본식 한자 독법과 우리나라 식 독법을 섞어서 읽으면
판독불능의 숱한 노래들이 술술 풀려진다.
백제계는 전라도 사투리로 ,
신라 계는 경상도 사투리로,
고구려 계는 평안도, 함경도 사투리로,
심지어 제주도 사투리까지...
이러한 사정이니 고대 한국어를 모르는 일본학자들이
10세기 이후의 일본말로 《만엽집》을 제대로 풀어낼 재간이 없다.
4. 고구려 말(평안도 사투리)로 해석되는 일본의 스모 심판의 의례적 호령들
: "핫키요이", "다가! 다가 다가라 다가 다가라..", "노콧다. 노콧다."
(이 말 들은 무슨 의미일까! 일본인들은 의례적인 추임새로 알고 있을 뿐인데..)
일본 스모의 시작을 알리는 말. "핫키요이"
그렇다!
두 역사(力士)가 싸우고 미적미적하니, '우리말'로 외치는 것이었다. (하기요)
그리고, 심판이 신경전을 벌이는 선수들이 둘레만을 맴도니까
"다가! 다가 다가라 다가 다가라.. "(빙빙 돌지 말고), 다가가라. 다가가...
또, 끝날 때 쯤 이런 매김을 한다는데..."노콧다. 노콧다." ["넘구다.(넘겨라.]"
억지로 해석해도 뜻이 통하지 않고
그냥 아자, 얼씨구 하는 고대 추임새 정도로 알고 있는 정도라는데...
그러므로, 정작 일본에서는 상황에서 심판이 외치는 호령이 다만 외쳐 오는 것이었단다.
이러니 어찌 일본말로든 한자로든 뜻이나 음이 풀리겠는가?
그렇다. 답대로 위의 요령부득한 말들을 평안도 사투리로 풀어보면,
"하기요.(시작하기요)" 빙빙 돌지 말고. 다가서 다가가라. 다가가..."
"넘구다(넘겨라)."인 것이다.
과연 진실일까?
그러나 작가 이영희는 너무나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일본은 바로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고대 일본어는 우리의 고대어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5. 결론
일본의 고대 시집 '만엽집'은 일본 학자들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난해함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영희님은 일본 학자들도 두손 두발 들어버린 그 어려운 시들을
고대 우리말 이두를 이용하여 척척 풀어낸다.
그 집념과 놀라운 성과에 우선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영희님이 주장하는 한일 고대사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악스럽게 놀라운 것이다.
결국, 일본의 고대 시가집인 “만엽집 (만요슈)” 라는 책의 내용이
사실은 한국인의 작품이며
일본어로는 해석될 수 없는 작품이 한국어로는 다 해석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우리 고대 삼국시대의 유명인들에 대해서
일본의 역사서인 만엽집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영향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당연히 있겠지요.
알다시피 만엽집은 일본의 귀족들이 읊은 시(우리의 향가)입니다.
왜 일본의 귀족들이
우리 고구려 신라 왕족들에 대해서 열심히 많은 지면을 할애 했냐는 겁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무슨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겁니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야, 고구려,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일본으로 갔다 것이지요.
만엽집은 한국인의 이두 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는데,
일본인들은 실제로 해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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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한일 고대 교류사 바로 잡을 것”
애린문화상 수상 이영희 전 포스코 인재대학원 교수 인터뷰
김정혜기자 tolerance@kyongbuk.co.kr 2013년 06월 20일 목요일 제11면
전래동화나 설화로만 여겨졌던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사실로 입증해
유명한 이영희 전 포스코 인재대학원 교수(82).
그가 얼마 전 올해 애린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또 한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애린문화상은 애린복지재단(이사장 이대공)에서
문화·예술분야에 활발한 활동으로 공을 세운 인물을 뽑아 주는 상이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한 이영희 교수는
동화작가로 등단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잡지사에 근무하다 일간지로 이동해
정치부장까지 올랐고 국회의원이 됐다.
그런데 돌연 한일관계사에 매달리더니 결과물을 책으로 내기 시작,
이도 모자라 두 달에 한 번 잡지를 출간하고 있다.
1931년생이니 올해 나이 여든 둘.
환갑만 지나도 무료하게 하루를 보내기 마련인데
이 교수는 "할일이 너무 많아 바쁘다"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좀처럼 쉬지않고 담금질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애린문화상 시상식은 10월에 열리지만
열정적인 삶 속 원동력을 찾기 위해 수상을 빌미로 인터뷰를 가졌다.
△지난해 말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를 퇴직했다. 근황이 궁금하다.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갈 정도로 바쁘다.
며칠 전 일본에서 취재진이 와 응대하느라 무척 바빴다.
지금도 일본에서 온 역사학자가 집에 와 있다.
매일 7시간 이상 한일관계사 연구에 몰두한다.
알게 된 사실들을 닥치는 대로 기록하기 위해 매진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인데 시간이 부족하다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구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많아 전화번호를 자주 바꾼다.
△연구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다고 하는데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이상할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과 거꾸로 생활한다.
낮에는 전화도 많이 오고 볼일도 봐야 해 연구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잠이 드는 시각인 밤 10시부터 집필에 들어간다.
새벽 5시까지 화장실도 가지 않고 몰두한다.
그리고 지역일간지 2개와 중앙일간지 2개를 훑고 오전 6시 잔다.
오전 11시에 일어나 정오쯤 첫 식사를 하고 잡힌 일정대로 움직인다.
△역사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경주에서 '천마총'이 발굴됐다.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사가 1면을 장식할 일은 드물지 않나.
그런데 천마총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그림으로 볼 수 있는 천마도 등
중요한 유물이 마구 쏟아지면서 계속 1면 머리기사를 써야했다.
때문에 역사 공부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관련 책을 읽기 시작하며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역사공부에 재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인가.
-아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해석한 책을 봤는데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직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고대 역사책이 한자의 음을 빌려 쓴 이두체로 기록된 것을 알았고
독학으로 이두 연구에 몰입하게 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사에 관심을 갖고 매진하게 된 것이다.
△한일관계사 연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한국일보 문화부 근무시절 당시 장기영 사장이 일본 곳곳을 취재하고 오라했다.
내가 도쿄에서 태어나 일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장 사장이 특명을 내린 것이다.
출장비가 꽤 두둑해 무려 3개월이나 일본 곳곳을 누볐는데
그 중 한 신사를 들르게 됐을 때다.
주인에게 신사 이름을 물었는데 모른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구 돌기둥에 새겨진 한자를 우연히 이두식으로 읽어봤는데
'아라가야의 무쇠가는 사나이들의 신사'로 해석됐다.
혹시나 싶어 주인에게 '아라가야계 신을 모시는 신사냐'고 하니
'어디 가야인지는 모르는데 가야에서 오신 신은 맞다'고 했다.
'신체(神體)가 무쇠같은 것이냐'고 하니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묻더라.
그래서 일본 고대사를 이두식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자연스레 풀이가 되는 거다.
그 뒤 한국과 일본의 역사책을 뒤지며 한일관계사 연구에 들어갔다.
△일본 역사책도 이두체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건가.
-일본에는 8세기 초 간행된 네 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와 고사기, 풍토기,
그리고 우리 신라 향가와 비슷한 노래를 모은 만엽집이다.
이들 역사서가 이두체로 쓰여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식 이두체는 아니고
당시 일본에서 쓰여진 일본식 한자의 음과 훈에서 빚어진 소리로 우리 고대어를 표기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 책을 중세 일본어와 현대 일본어로 해독하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고대 한국어로 쓰였으니 중세 일어나 현대 일어로 읽힐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일본 역사책이 고대 한국어로 쓰여 있다는 것인가.
-일본은 극히 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하고 선주민 자체가 한국계다.
각 지방의 우리 고대어,
즉 한국 고대 방언이 천년 넘게 걸쳐 쌓이고 쌓여 오늘 날 일본말의 뼈대가 됐다.
고대 한국어로 역사책을 읽으면 너무나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고대어로 일본 역사책을 추적하면
그동안 잘못 풀이돼 왜곡된 한일 고대 교류사의 진상이 드러난다.
△대단한 발견인데 성과에 비해 크게 주목을 못 받은 것 같다.
-한국에서는 정통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배척하고
일본에서는 자신들이 왜곡한 역사가 드러날까 봐 외면한다.
일본 역사 가운데 천황의 역대 왕조에 관한 기록 중 과장된 부분이 많다.
가령 6대에 걸쳐 기록된 왕들이 알고 보면 동일 인물이다.
정통성을 세우려고 한 사람을 몇 대로 늘려 놓은 것이다.
너무 쉽게 알 수 있는데 천황의 위상이 떨어질 수 있으니 받아들이지 않는 거다.
△그래서 한일관계사 연구에 더욱 매진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눈에는 훤히 다 보여 가만있을 수 없으니까.
또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
암호가 풀렸고 이제 보물을 캐면 되는데 다들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대어를 재구성하고 한일 고대 교류사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나만 할 수 있다.
그래서 너무 바쁘다.
일어로 쓴 책 '또 하나의 샤라쿠(화가 김홍도와 일본 천재화가 샤라쿠가 동일 인물이라는 내용)'를
한국어로 다시 써 출간하기로 돼 있는데 여태 못쓰고 있을 정도다.
△올해 애린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데 소감 부탁드린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포항은 역사 연구를 할 게 많은 곳이다.
좋은 상도 받았는데 앞으로 포항지역 역사와 더불어 한일관계사 연구에 더욱 정진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알게 된 것을 최대한 많이 남기는 데 애쓸 것이다.
※이영희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31년 12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조선인이지만 도쿄에서 차 한 대로 시작해 큰 택시회사까지 세운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랐다.
1945년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에 불안을 느낀 그의 부모가
고향인 포항으로 돌아오면서 이후 한국에서 살았다.
포항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외삼촌 등의 권유로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어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수석 졸업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국내 첫 시동인지인 '죽순'에서 작품을 추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또 기숙사 비를 벌기 위해 부업을 알아보다
당시 국어선생님(시인 박목월)의 소개로 한글학회 일을 돕게 되면서
'우리말 큰사전'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당선돼 동화작가로 활동, 9권의 동화집도 냈다.
대학 졸업 후 월간 새벗에 들어가 편집부장 등을 거친 뒤
한국일보사측의 제안으로 소년한국일보 편집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에 발탁돼 또 한 차례 이직, 정치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고
기자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전국구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일관계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로 임용,
제철사(製鐵史)를 주로 강의했다.
2012년 12월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 1999년 창간한 일어판 회원제 계간지 '마나호' 간행에 집중하고 있다.
마나호는 '진실'이라는 뜻의 고대 일본어로,
한일관계사의 진실을 주 내용으로 두 달에 한 번 출간되고 있다.
남편은 한국의 안데르센으로 불리는 동화작가 김요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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