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북경으로 6-1
자신들의 교리지식의 미흡함에서 나온 결과였지만 성사를 준 신자들에게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반성했다. 윤유일이 다시 이들에게, 「성세성사 이외에는 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고의적이 아닌 교리지식의 미숙으로 인한 결과였기 때문에 큰 책망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고했다고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그제서야 다소 안도를 한 선비들은 제각기 신부를 모셔올 대안을 강구 했다. 「그럼 북경에서 당장 신부를 모셔 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윤유일이 대답했다.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계속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고 있고 잘못 허점을 보이다가는 정부에 박해의 구실을 주는 것 이외에 이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받아온 조그만 나무의 뿌리를 선비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포도나무 뿌리였다. 윤유일이 떠날 때 구베아주교가 짐속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주교께서 선물하신 포도나무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멀리 이태리라는 나라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 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동그랗고 그 안에 씨가 있어서 씹으면 무척 딱딱하다고 합니다. 열매를 씹으면 달 착지근하고 무척 맛이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의 열매를 갖고 발효 시키면 술이 되는데 그것을 포도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찬예식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하는 그 포도주입니다.」 하면서 포도주의 빛깔에 대해 설명했다. 구베아 주교가 한 번 보여 준 포도주를 그는 설명했다. 「빛깔은 핏빛처럼 빨간데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내려 주신 술입니다.」 하며 설명하자 권일신이, 「그러면 그 포도나무를 잘 심고 가꿔야 하는데 과연 우리 조선의 기후에 맞을까요?」 「정성껏 가꾸면 내년에 포도를 거둘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윤유일이 대답했다. 여러 선비들은 윤유일이 가져온 포도나무를 서로 만져 보면서 신기해했다. 「산골에 나는 우리의 머루나무 뿌리와 같군요.」 「일테면 서양 머루라고나 할까요?」 「머루보다는 물이 더 많고 맛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윤유일이 마치 맛이나 본 듯이 설명했다. 그는 또 포도주의 맛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언젠가 록스 신부로 부터 포도주를 마셔 본 일이 있었는데 그 향기와 맛이 좋았다고 했다. 「이 나무를 잘 가꾸어서 신부가 오시면 나무의 열매에서 술을 빚어 드립시다.」 하며 포도나무 묘목을 잘 간직했다.
선비들은 윤유일이 록스 신부와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은 세례와 견진성사를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다. 윤유일은 성세와 견진 때의 감격적인 장면을 모두 빠뜨리지 않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자기들도 그런 거룩한 성사를 받고 싶다면서 빨리 신부를 파견할 것을 토의했다.
나중에 구베아 주교는 서울에서의 윤유일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 했다. 이것은 그 후 문서에 나타나 있는 사실이다.
『조선으로 귀국한 윤바오로는 북경에서 자기가 유럽서 온 선교사들에게서 보고 들은 바를 조선의 여러 교회에서 온 자기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저 선교사들은 유럽의 여러 먼 지역에서 왔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자기가 받은 여러 가지 성사를 베풀어주기 위해 왔다는 것 등을 알렸다.』
윤유일은 서울에 오자 더욱 바쁜 몸이 되었다. 북경에서 성세와 견진까지 받고 왔다는 말에 신자들은 윤유일을 몰래 초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윤유일은 이들에게 북경의 모습과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아는대로 이야기해 주었고 비신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입교를 권했다. 왕복 6천여 리의 대장정을 끝마친 윤유일은 몸이 몹시 피곤했다. 비록 말을 갖고 가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말 위에 올라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줄곧 걸어서 왔던 것이다. 말 잔등 위에는 취사도구와 각종 짐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윤유일이 타고 갈 공간이 없었다. 또 비록 사절단의 일원이었다고 하나 윤유일의 신분은 달랐다. 사절단에 포함돼 혜택을 받거나 음식을 제공받을 수 없는, 어디까지나 자비 염출의 객꾼이었기 때문에 외로웠다.
도중에 말이 병이라도 든다면 그 많은 취사도구를 혼자 운반해야 했기에 항상 말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오직 건강한 두 다리에 의지해 하루에 1백여 리의 길을 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나올 때까지 여관이나 주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노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발바닥이 부르트다 못해 고목나무 등걸처럼 되었다. 피고름이 엉겨 붙어 항상 진물이 흐르면서 여기에 동상까지 걸렸었다. 그는 절룩거리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그때마다 그는 기도문을 외었다. 「공경하올 천주여, 제 몸과 영혼은 이미 천주의 것입니다. 저를 보살펴 주셔서 아직도 깊은 수렁 속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조선의 교우들에게 천주의 너그러운 뜻을 전해 주소서. 몸이 약하고 의지가 또한 부족하오나 오직 천주만을 믿고 이 북경까지 왔습니다. 제가 살아남는 것은 조선의 모든 교우들에게 밝은 빛을 주는 뜻으로 믿사옵고 저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옵소서.」 윤유일은 발바닥의 피고름을 훔쳐가면서 기도를 했다. 그때마다 천주는 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한 인간이 착하고 의로운 사명을 다할 때까지 천주는 늘 보살피는 것이다. 그는 영양가라곤 한 푼어치 없는 부실한 음식과, 밤이 들 때마다 잠자리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언제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북경에서의 두 달 기간은 결코 편히 쉴 수 없는 기간이었다. 오히려러 바쁜 나날이었다. 구베아 주교와 록스 신부로부터 교리도 배워야 했고 서양의 희귀한 문물을 익혀 조선 교우들에게 전해야 했다. 그래서 한시라도 틈을 놔서는 안됐다.
이때의 일이「사학징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학징의」는 천주교민들에 대한 일종의 정부쪽의 신문기록이다. 경술년 봄 북경에서 돌아온 후 윤유일은 이승훈, 홍낙민 등과 밤낮으로 모의하여 오로지 신부를 청래(請來)할 계획을 세웠다.』
윤유일은 귀국하면서 홍낙민과 친교를 맺으며 지냈다. 홍낙민은 당시 집인 충청도 예산에서 상경, 서울에 머물고 있었고, 윤유일이 귀국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갔었다. 홍낙민은 충청도 예산 사람으로 일찍이 진사고시에 합격, 이승훈 정약용과 가깝게 지내면서 천주학에 심취, I784년에 입교했고 세례명을 루가라고 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리에 밝아 학자들에게 교리공부를 시키기도 했 다. 1791년 정조 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서 한때 냉담생활을 했으나 곧 잘못을 뉘우치고 계속 천주께 기도를 올렸다. 윤유일은 이승훈, 홍낙민과 거의 매일 만나서 신부 영입 계획을 세웠다. 「윤바오로 형제가 북경을 다녀옴으로써 우리 교회는 다시금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소. 그러나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오. 우리 교회 에는 신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정식으로 신품성사를 받은 신부가 와서 성사집행을 해야지 우리끼리 만의 성세성사만 갖고서는 껍데기에 불과 하오.」 이승훈의 말에 홍낙민이 제의했다. 「제 의견인데 잘 들어 두시오. 생각 같아서는 조선의 교우 가운데 똑똑한 젊은이 몇 명을 북경에 파견해 그곳 신부의 주선으로 학업을 연수케 해서 사제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건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이승훈이 반박을 했다. 그의 의견은 똑똑한 젊은이들 몇을 파견하려면 거기에 드는 경비도 문제일 뿐 아니라 북경까지 들어가는 것도 어 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생각은 북경의 신부를 영입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서는 우리 쪽에서 다시 북경을 가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윤바오로가 또 다시 북경을 가기에는 체력상 힘들 것 같고‥‥」 하며 홍낙민은 윤유일에게 눈총을 주었다. 이 말에 윤유일은, 「그것이 천주의 뜻이라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이 세상 끝까지 복 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북경엔들 마다하겠습니까?」 하며 다시 한 번 갔다 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윤바오로는 아직도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까?」 「그 점은 문제가 없습니다. 천주께서 이 사명을 완수하라고 제게 튼 튼한 몸과 두 다리를 주셨습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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