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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벚꽃 6-20일, 창덕궁
앵두꽃 10-25일 만개합니다.
경복궁
경회루 능수벚꽃은 4월 6일~20일, 창덕궁 대조전 화계의 앵두꽃는 4월 10일~25일.
고궁의 꽃 피는 시기를 제대로 알고 가면 더욱 충만한 봄나들이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고궁과 왕릉의 봄꽃이 피는
시기를 정리한 ‘봄꽃 개화 시간표’를 일반에 공개했다. 시간표에 따르면 경복궁 아미산의 앵두꽃은 10~25일 꽃망울을 터뜨리고, 창덕궁 낙선재의
매화는 오는 15일까지 그 청아한 자태를 뽐낼 전망이다. 또 덕수궁의 산철쭉은 5~20일, 종묘의 감꽃은 15~30일 만개한다.
고궁과 왕릉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나무에는 기품이 있는 선비의 고고한 절개를 기리는 매화나무, 세종대왕이 좋아했던 앵두나무,
복숭아꽃 살구꽃 나의 고향을 생각하는 살구나무가 있다. 또 연분홍빛 꽃잎으로 두견주를 만드는 진달래, 해안가 산록에서 왕릉의 경관수로 출세한
산벚나무, 삭막한 마음을 화사히 감싸는 산철쭉, 선덕여왕의 일화를 품은 부귀영화의 꽃나무 모란, 7가지 덕을 가진 감나무, 열매가루를 풀어
물고기를 잡는 때죽나무 등이 있다. 다음은 문화재청이 발표한 고궁 왕릉의 올 봄꽃 개화시간표다.
[헤럴드 생생뉴스 2007-04-10 11:17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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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는 기자의
참고내용의 글을 참고하여 이미지와 글을 연재했습니다. 기사내용과 관련이 없음, "글과 사진은 문화재 정보 센터" & "꽃 사진은 인터넷
포털에서 습득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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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궁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3년 12월 4일 개토를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광화문의 해태조각상과 근정전의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들과 경회루 다리 및 영제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조각물들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조각미술품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회루의 루원과 향원지의 연못이 원 형태로 남아 있어 조선의 대표적 명원도 볼 수 있다.
앵두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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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앵두꽃 4.10~4.25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이 아니라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매화, 모란, 앵두,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단 위에는 배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다.
- 아미산의 굴뚝(보물
제811호)
아미산 화계에 설치된 이 육각형 굴뚝들은 화계 앞에
있었던 교태전의 굴뚝이다. 굴뚝의 높이는 지붕을 제외하고 2.6미터쯤 되며, 육각 한 벽면의 폭이 88센티미터쯤 된다. 지붕 위에는 네 개의
연가가 배치되어 있다. 굴뚝 최상단 벽면에는 당초문이 새겨졌고, 그 밑에 용, 학, 박쥐 등의 문양전이 배치되었으며, 정남에는 용문전을
배치하였다. 문양전의 밑 벽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국화 조형전이 배치되고, 북쪽면에는 희(囍)자 등 글씨가 새겨졌다. 이들
조형전의 밑 벽면에는 호랑이, 해태, 박쥐, 학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문양은 군(君), 신(臣), 절의(節義), 부귀, 장수, 벽사를
상징한다. 이 네 개의 굴뚝은 모두 붉은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화계의 조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흥례문 어구 매화 4. 6~4.15
흥례문 일곽은 1910년 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살구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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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당터 살구꽃
4.6~4.15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 일곽에서 양의문을 들어서면 정면9칸, 측면 7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회루지 능수벚꽃 4.6~4.20
경회루(국보 제224호)
경복궁 창건시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을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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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주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70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낙선재 매화 4. 6~4.15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
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앵두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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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 화계 앵두꽃
4.10~4.25
대조전 (보물 제816호)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이다. 곤전은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창덕궁의 곤전은 대조전으로, 희정당의 바로 뒷편에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궁내의 다른 전각엔 용마루가 있으나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 따라서 궁의 어디에서나 용마루 없는 지붕이 중궁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전각 중앙에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머물거나 하례 때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다. 월대의 정면과 좌우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보도에 이어졌고, 월대 좌우 귀퉁이에는 청동 드므를 설치하였다. 이는 거기에 물을
담아두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화마가 제 모습이 물에 비친 데 놀라 화기를 거두어 도망쳐 버린다는 데서 유래된 장치이다. 이곳은
성종·인조·효종·현종·철종·순종 등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철쪽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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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앞 산철쭉 5.5~5.20
희정당 (보물 제815호)
대조전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거처로, 평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3칸을
통간(通間)으로하여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응접실의 서편은 같은 크기로하여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응접실의 동쪽벽 상부에는
<총석정절경도>, 서쪽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 있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는 여기에
머물렀고, 순종이 승하할 때 끝까지 여기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옛부터의 관습과 개화에 따른 신식문물을 절충시키는 시국에 처했을
때라, 임금의 처소도 전각은 옛법에 따르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장치하는 방식을 반영하였다. 지금의 전각은 1917년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중건한 것이다.
모란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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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화계 모란 5.15~5.30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에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임금 자신이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를 짓고 아래층을 규장각이라하여 수만 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여기에서 나라에 진출할 동량들을 육성시켰다. 또한
주합루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영화당에서 취재된 인재들 양성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 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낙선재앞 감나무 5.20~6.10
이곳은 창덕궁 후원 속에서 가장 깊은 계원(溪苑)이다. 1636년 인조가 이 계원을
조성했다. 계류는 북악산의 동편 줄기의 하나인 응봉(鷹峯)의 산록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산내와 어정(御井)을 파서 천수(泉水)를 흐르게 하였다.
계류가에는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을 적절히 배치하고 판석 등으로 간결한 석교를 놓고 어정 옆의 자연 암석인 소요암을
ㄴ형을 파서 곡수구와 폭포를 만들고 암벽에 시문을 새기기도 했다.
정자 앞에는 작은 지당(池塘)도 설치하고 초정(草亭)인 청의정은
수전 속에 건립하여 긴 판석 다리를 거쳐 들어가게 하였다. 이곳은 삼복의 더위에도 물이 차고 숲이 짙어 냉기를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주위의
숲은 심산계곡을 연상시킨다. 이 옥류천에 앉아 계간에 피어오르는 운무(雲霧)를 보고 있으면 선경에 들어온 듯 하다.
이 소요암에
곡수구를 파고 폭포를 만든 것은 1636년 인조 때이다. '옥류천'이란 각자는 인조의 글씨이고, '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飜成萬壑雷'의
오언시는 옆에 주기한 '庚子二月 癸未題' 라하여 1690년 숙종의 시를 새긴 것이다. 이 시를 풀어보면 "흐르는 물은 삼백척 멀리 날으고, 흘러
떨어지는 물은 높은 하늘에서 내리며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번개를 이룬다"는 뜻이다.
옥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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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 조선의 이궁으로
창건되었다. 원래 이곳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1418년에 건립한 수강궁이 있었다.
성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와
생모가 되는 소혜왕후와 양모인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위하여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광해군때 건립된 정전인 명정전이 있어 조선왕궁 중에서 가장 오랜
정전이 있는 왕궁이다.
△옥천교 어구 매화 4.1~4.15
옥천교
옥천교 (보물 제386호)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1483년 조성되었다.
앵두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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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 화계 앵두꽃 4.5~4.25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사모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네면에는 모두 세살문을 달았고 그 위에 교살창을 하였다. 내부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는데 양측으로
각 2칸과 전후퇴칸은 연등천정을 하고 우물천정을 하였다.
철쪽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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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온실 산철쭉 5.5~5.20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짜았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살구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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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교 어구,환경전 살구꽃
4.1~4.15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기둥 위에는 이익공의 공포를 짜고 기둥간에는 두세 개씩의 화반을 놓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외진평주(外陳平柱)와 내진고주(內陣高柱)를 배열하여 퇴량을 걸고 그 위로는 연등천장을 하고 안쪽으로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대량(大樑)은 내진고주
사이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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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덕수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왕이 거처하게 되었다.
1608년 2월에 선조는 행궁의 침전에서 돌아가시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는 화재로 불탔던 중화전이 복구되었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07년 7월 20일에 일본침략자들의 강압에 의하여 고종이 순종에게
제위를 전위 하자 선제가 거처하는 궁이 되어 덕수궁이라 하였다.
△대한문~중화문 산벚꽃
4.6~4.20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오늘날에는 기단과 계단이 묻혀 버렸으나 전에는 다른 궁의 정문과 같이 기단과 석계가 있었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 전전각이 소실될 때 이 문도 소실되었고, 중화전이 중건될 당시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살구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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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 앞 살구꽃 4.15~4.30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해에 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철쪽꽃
철쪽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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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뒤 오솔길 산철쭉
5.5~5.20 석조전
덕수궁미술관(석조전 서관)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 · 연구, 작품의 수집과 보존, 기획 및 상설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 학술과 출판, 근대미술 작품과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도심 외곽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의 관람 불편 요소를 해소하여 강북권에 새로운 문화공간을
활성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모란
모란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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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 뒤 모란 5.15~5.30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
함녕전 행각의 외관
함녕전과 덕홍전 남쪽의 행각이다. 행각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건물은 일정기에 개수되어 많이 변모하였다. 함녕전 앞에는 행각 3칸에 문을 두었고, 덕홍전 앞면에도 3칸의 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3칸의 행각을 붙여 함녕전 행각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게 하였다.
- 함녕전 창호(내부)
함녕전 내부에서 앞쪽 주간의 분합문을 바라본 모습이다. 사분합의 띠살문을 전면 3칸에 달고 그 위쪽으로 광창(光窓)을 달아
실내 조명을 밝게 하려 하였다. 띠살분합문은 비교적 간결 단순한 무늬를 택하였고, 광창은 빗살무늬의 살을 넣어 분합문과 조화되도록 하였다.
문과 창의 시원스러움이 청간(廳間)의 공간을 한층 더 넓고 높게 돋보여 주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장지문을 달았는데, 각
문마다 중앙에 정자살을 넣어 내부공간의 아늑함을 표출하고 있다. 대청의 한 공간 내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한국적 공간의 실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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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와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때죽꽃
때죽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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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 때죽꽃 5.14~5.25
영녕전
종묘영녕전 宗廟永寧殿
이 건물은 세종 3년(1421)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지은 것으로,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현재 영녕전에는 가운데 4개의 방을 양쪽 옆에 딸린 방들보다 높게
꾸미고, 각 방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각각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
감꽃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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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대청ㆍ전사청 감꽃
5.10~5.30 향대청
화령전 華寧殿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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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산책길 진달래
정릉 내진달래 ▲정릉 산책길 진달래, 철쭉 4.7~5.20
1.파주공효공박중손묘역내 坡州恭孝公朴仲孫墓域內長明燈
박중손(1412∼1466)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을
관찰하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2기의 장명등은 각각 2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받침대인 대좌와 불을 밝히는 화사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지붕돌인 옥개석과 그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로 구성되었다. 공효공 박중손 묘 앞 장명등의 앞면과 뒷면 화창 모양은
사각형이나 동쪽의 화창은 동그란 원형이며 서쪽의 화창은 반달모양으로 화창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다.
장명등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42-10호
분류 : 유물 / 일반조각 / 능묘조각 /
기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1-157세종대왕기념관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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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경내 산벚꽃
내벚꽃 ▲서오릉 경내 산벚꽃 4.15~4.25
서오릉
서오릉은 ‘서쪽에 다섯 개의 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오릉에는
5릉(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 2원(순창원·수경원), 1묘(대빈묘)가 있어서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실의 가족묘를 이루고 있다.
경릉은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 익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또 순창원에는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윤씨가, 수경원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가, 대빈묘에는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가 묻혀 있다.
서오릉 西五陵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하여 불렀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
종목 : 사적
제198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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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양묘장 옆 자생화단
야생화꽃 ▲동구릉 양묘장 옆 자생화단 야생화 5.15~5.31
동구릉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추존왕 익종의 능인
수릉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며,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다.
동구릉에는 검악산 중앙 북쪽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에 14대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이, 그 남쪽 아래로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이 있으며, 그 다음으로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그의 비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綏陵)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건원릉 서쪽으로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이, 그 다음으로 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이 있고, 그 아래로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에 이어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이 있으며, 맨 왼쪽으로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등 모두 아홉 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동구릉은 능제의 변화와 조선왕조 519년의 부침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더욱이 능 전역에 우거져 있는 숲과 능역을 가로지르는 개울물 등 자연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동구릉 東九陵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
동구릉
종목 : 사적 제19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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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영릉
▲세종대왕 영릉 산책길 진달래 4.10~4.30
세종대왕신도비 世宗大王神道碑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은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비문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나, 비문의 내용을 실은 책이 전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업적과 왕후, 빈(嬪), 그 소생에
관해 간단히 적고 있다 한다. 문종 2년(1452)에 세운 비로, 강남구 내곡동의 구 영릉(舊英陵)터에 묻혀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인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왔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우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은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 비문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나, 비문의 내용을 실은 책이 전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업적과
왕후, 빈(嬪), 그 소생에 관해 ...
세종대왕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42-1호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1-157 세종대왕기념관 경내
영릉·녕릉 ( 英陵·寧陵 )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훈민문·세종대왕동상·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 것이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영릉
종목
: 사적 제195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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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융릉▲사도세자 융릉 산책길 진달래 4. 5~4.20
용주사상량문 ( 龍珠寺上樑文 )
정조 14년(1790)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1720∼1799)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높혔다. 이 상량문은 중국의 소주지방에서 생산된 공단(두꺼운 비단 일종)에 쓰였는데 공단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퇴색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정조 14년(1790)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1720∼1799)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정조 13년(1789)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청량리 일대)에서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사도세자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제13호
분류 : 기록유산 / 문서류 / 사찰문서 / 기문류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융릉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추존 황제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가 잠들어 있는 융릉(隆陵),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는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융릉·건릉 ( 隆陵·健陵 )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
융릉
종목
: 사적
제206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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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장릉
▲김포장릉 재실 산벚꽃 4.20~4.27
장릉 ( 章陵 )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1578∼1626)의 무덤이다.
인조반정(1623)으로 아들 능양군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고, 인조 10년(1633) 원종의 칭호와 함께 그의 무덤을 장릉으로
불렀다. 무덤 아래에는 영조...
장릉
종목 : 사적 제202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김포시 풍무동 산141-1
장릉 ( 長陵 )
조선 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와 부인
인열왕후(1594∼1635)의 무덤이다. 인조는 광해군 때 인조반정(1623)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시련이 있었고,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자 강원도에 대동법(1623)을 실시하였다. 장릉은 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정한 파주 북운천리에 있었으나,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조선 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와 부인 인열왕후(1594∼1635)의 무덤이다. 인조는 광해군 때 인조반정(1623)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시련이 있었고,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자 강원도에 대동법(1623)을
실시...
장릉
종목 : 사적 제203호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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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홍유릉 외재실~광화당~영원~덕혜옹주묘 100m 산벚꽃 4.12~4.25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과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인 유릉(裕陵)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 두 능을 합쳐 ‘홍유릉’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조영된 왕릉이다.
홍릉(洪陵)
조선 26대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 ~1919)와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95) 민씨의 능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종은 조대비에게 수렴청정을,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고종은 1866년 명성황후
민씨를 맞아들였는데, 민씨의 척족들은 강력한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에 맞서 대외 개방정책을 취했다.
광화당원삼 ( 光華堂圓衫 )
조선후기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
광화당이 입었던 원삼으로, 원삼(圓衫)이란 궁중의 왕비와 후궁의 예복이다. 옷의 겉감은 자주색이고 안감은 홍색의 단에 남색 선을 둘렀으며, 소매
끝에는 남색과 황색의 색동을 대고 백색의 한삼을 대었다. 대(帶)는 홍색의 감에 구름과 봉황무늬의 금박이 찍혀 있으며, 앞여밈은 서로 마주 보고
여미게 되어있다.
조선후기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 광화당이 입었던 원삼으로, 원삼(圓衫)이란 궁중의 왕비와 후궁의
예복이다. 옷의 겉감은 자주색이고 안감은 홍색의 단에 남색 선을 둘렀으며, 소매 끝에는 남색과 황색의 색동을 대고 백색의 한삼을 대었다.
대(帶)는 홍색의 감...
광화당
종목 : 중요민속자료 제52호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복식공예 / 의복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 광진구 군자동 산2
원주영원산성 ( 原州領願山城 )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충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충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
영원
종목 : 사적 제447호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시대 :
신라시대 소재지 :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외 1필
2007 개화시간표는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이제 엠파스 블로그가 "링크link
시스템system 연결MISSING LINK까지 차단해 버렸네요."=> "실망했다. 갑자기 링크 주소가 연결이 안 된다. 차단해
버렸나보다. 실망이다." =헤헤헤 해결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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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 가고 있을까 / 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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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순하 집사님^^ 제가 요즘 문화재 공부를 등록해서 본격적(?)으로 공부 하고 있답니다. 마침 궁금하던걸 올려 주셨네요. 노래는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