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오뉴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절로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듯 해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노모는 한해 동안 지은 농사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해서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이날 따라 아들 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는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자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노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가 없어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자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해서 그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다.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알뜰한 살림살이에 촌노는 또 한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 10만원" 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길래 이렇게 가계부에 쓰여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아들 가족에게 주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쌌습니다. 그리고 마치 죄인이 된듯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다시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가슴이 미어 터질듯한 기분으로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삭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금지옥엽 판사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 라는 아들의 말 속에는 빨리 귀향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거기 어디 잘 데가있어?”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노모는 "나한테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봐라. 잘 알 수 있을 게다!”하며 수화기를 내팽기치듯 끊어버렸습니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 소문이 날거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허락이 안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 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판사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아내는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 나들이길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판사 사위가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들어오는가?” 하며 쫓아 나왔습니다. 이때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라고 대꾸했습니다. 장모가 그 자리에서 돌하루방 처럼 굳은 채 서 있자 “촌년의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자집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시골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난 다음 달부터 며느리의 가계부에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 없고 "시어머니의 용돈 50만원" 이란 항목이 보란듯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