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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31회] 별들의 고향 – 마르크 샤갈. 2022년 12월 18일 방송 다시보기
✺ 유대인 차별을 피해 떠돈 사랑의 화가...‘샤갈(Chagall)’의 험난한 수난기
✵ 예썰의 전당 서른한 번째 이야기는 사랑의 화가 ‘마르크 샤갈’ 동화처럼 포근하고 환상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하지만 샤갈의 실제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러시아 출신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유대인 차별을 피해, 자신의 예술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떠돌이별 샤갈이 길을 잃지 않고 빛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와준 ‘중심별들’ 덕분이라는데. 예썰 박사들과 함께 마르크 샤갈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에 얽힌 흥미로운 썰들을 풀어보자!
색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 예썰 하나. 정식교육 금지, 거주지 제한까지! 유대인 차별 속에도 샤갈을 화가로 만든 ‘일등공신’은? 샤갈이 자신의 고향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인 ‘나와 마을’. 그림 속 마을 풍경은 샤갈 특유의 색채로 표현돼 몽환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데 고향인 ‘비텝스크’는 샤갈 같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만은 화목했기에, 그의 기억 속 고향은 ‘나와 마을’처럼 따뜻했다.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유대인인데다가, 9남매 중 맏이였던 샤갈이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이라는데. 샤갈은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이날 <예썰의 전당>은 샤갈의 ‘나와 마을’로 문을 열었다. ‘나와 마을’ 속 마을 풍경은 샤갈 특유의 색채로 표현돼 몽환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정무는 “(‘나와 마을’은) 샤갈이 자신의 고향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비텝스크 제국(현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표현주의자 화가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린다. 대표작은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나와 마을>, <그녀>, <야상곡> 등이 있다. 1910년부터 4년간 파리에서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후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동판화 연작을 의뢰받아 판화제작자로도 활동했다. 1958년 이후로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설계하기도 했다. 샤갈의 작품에는 내면으로부터 드러난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있으며, 현대 작품에서 드물게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다채로운 색채로 표현한 독창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가 열렸다.
샤갈(Chagall), 〈나와 마을〉, 캔버스에 유채, 1911, 192×151.4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은 "나는 묘화(描畵)의 대상을 러시아에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파리는 그 위에 빛깔을 주었던 것이다"라고 샤갈은 말하였는데 사실에 있어서 파리에서 제작된 이 그림에도 갖가지 고향의 추억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소·바이올린·잉어·닭·꽃다발 등 모두 샤갈이 자랑으로 여기는 조형 언어이며, 그의 소는 이집트의 Himmelkuh(천국의 소)와 같이 행복한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에는 입체파에 대한 관심도 엿보이며 원형, 삼각형이 교차하는 형식이 두드러진다. 집과 농부가 거꾸로 서 있는 것도 과연 그다운 착상이며 이것은 하늘로 나는 인간이나 떨어진 목 등과 같아서 비합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보인다. 그러나 에콜 드 파리의 많은 고향 상실자에게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꿈만이 생활의 지주이며 신화였을 것이다.
샤갈은 이들 작품에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서정적인 화면으로 합성하면서 기억 속의 장면을 묶어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샤갈의 작품들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와 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눈'이다. 소의 눈과 사람의 눈은 마치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어떤 교감을 나누는 듯하다. 1911년 파리에서 이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순간 샤갈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화가의 눈빛이 궁금해져온다.
“화려한 식탁, 예쁜 접시에 담긴
빵이나 배보다
아버지의 거친 비린내 나는 손으로
직접 쪼개준 빵이
훨씬 달콤하고 맛있었다”
-마르크 샤갈의 자서전 中
루체사 강과 합류하는 서드비나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비테프스크(Vitebsk)의 시내/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비테프스크>/ 샤갈, 비테프스크 위에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비테프스크 마을 풍경〉, 1924~1926,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Snow Falling on Chagall’s Village)/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의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고향은 러시아 제국에 속해있던 ‘비테프스크(Vitebsk)’라는 시골 마을로, 샤갈 같은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떠돌아야 했던 유대인들은 많은 차별을 받았다. 교육과 직업에 제한이 있었고, 정해진 곳 내에서만 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에 터를 잡은 유대인들은 대부분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는데, 샤갈의 아버지 역시 청어를 나르는 일꾼이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아버지〉, 1911년, 유화 ''(80.3×44.5㎝). 필립스
걸인도 술꾼도 아니다. 이 남자의 정체는샤갈의 청어 장수 아버지다. 악취 속에서 무거운 생선 궤짝을 날랐다. 손에 쥐는 건 한 달에 20루블 남짓. 9남매 중 장남이었던 샤갈의 회고에 따르면 “지옥 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유대교 회당으로 가 기도했다.
"가엾고 슬픈 우리 아버지"
1911년 고국을 떠나 파리로 온 샤갈은 ‘아버지’를 그렸다. 샤갈 전기를 쓴 프란츠 메이어가 “원초적 힘으로 가득한 맹렬한 그림”이라 평했듯 파리에서 샤갈의 화풍은 일변한다. 새로운 도시에서 영향받은 강렬한 색감이 화면을 구성한다. 파리의 활기찬 분위기와 고향의 향수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특히 배경에 놓인 꽃의 이미지가 인물의 활기를 돕는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아버지’를 통해 아들은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이 그림이 2022년 11월 15일 뉴욕 필립스 경매에 출품돼 약 100억원에 낙찰됐다. 우여곡절이 깊다. 폴란드 악기 제작자 데이비드 센더가 구매해 소장했으나 나치(Nazi)에 약탈당했다. 그림에 애착이 컸던 샤갈은 1953년 무렵 ‘아버지’를 다시 손에 넣었으나, 별세 이후인 1988년 국가에 귀속됐다. 그러다 올해 초 프랑스 국회가 나라에 소장된 나치 강탈 미술품 15점의 반환을 승인하면서 그림은 원 소장자 측에 돌아갔다. ‘아버지’는 15점의 반환품 중 경매에 나온 첫 사례였다.
재재는 “차별이 심했던 비텝스크에서의 기억이 좋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고향을 그린 ‘나와 마을’은 따뜻한 분위기다”라며 의문을 표했다. 이에 대해 조은아는 “가난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샤갈의 가족은 화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유대인인데다가, 9남매 중 맏이였던 샤갈이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 덕분이었다고. 특히, 샤갈의 어머니는 샤갈을 러시아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것’까지 마련했다는데. 샤갈은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었을까.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화덕가의 어머니(Mother by the oven), 1914년, oil on canvas
어머니는 화면의 중심을 꽉 채운 마치 마술사 같은 손놀림으로 일용할 빵을 뚝딱 만들어낼 태세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앞치마보다도 작고 늙게 그려졌다. 샤갈에게 엄마는 당당한 연금술사와 같은 존재였다면 아버지는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샤갈의 어머니 사랑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가족과 고향은 나의 사랑스러운 별들입니다”
-마르크 샤갈
가슴으로부터 그림을 그리면
거의 모든 것이 착착 들어맞지만,
머리로부터 그림을 그리면
대부분이 어그러지고 만다.
-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아내 벨라와 샤갈, 큰딸〉
〈녹색 바이올린 연주자(Green Violinist)〉, 1912-13년,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소장,
〈러시아와 당나귀들, 타인들에게〉, 〈나와 마을〉,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기도하는 유대인〉 등 샤갈이 초기에 제작한 작품 중 많은 수가 비텝스크 및 러시아의 민속, 생활상을 담고 있는데, 이는 샤갈 작품들의 주요 원천이었다.
✵ 예썰 둘. 자타공인 최고의 사랑꾼, 샤갈의 달달한 러브스토리 대공개! 샤갈에게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준 건 그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샤갈의 아내인 벨라 역시 샤갈의 곁을 든든히 지켰다. 9살 연하인 벨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 샤갈은 “나는 그녀가 바로 내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졌다. 벨라 역시 이젤이 낡으면 샤갈이 말하기도 전에 구해다 주는 등 샤갈을 세심하게 챙겼다. 샤갈은 내조의 여왕 벨라 덕분에 힘든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고. 벨라를 향한 샤갈의 애틋한 사랑은 그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밝고 따뜻한 색채로 가득한 '에펠탑의 신랑신부'는 행복감에 젖어 하늘을 나는 신랑신부, 샤갈과 벨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샤갈의 사랑이 표현된 작품이 많다는데. 자타공인 최고의 사랑꾼, 샤갈의 달달한 러브스토리를 들어본다.
“그녀의 침묵도 눈도 내 것이다
그녀는 나를 오래전부터 알았고
유년기, 현재, 미래도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녀가 내 아내라는 것을 알았다“
샤갈의 말년 작, <결혼 꽃다발>, (1977~78).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파란빛이 감도는 화면의 정중앙에, 붉은 꽃다발이 한 아름 담긴 꽃병이 놓여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꽃다발이겠다. 꽃병 오른쪽에는 결혼 피로연에 사용된 듯한 와인병과 과일 바구니도 보인다. 왼쪽에는 이 결혼의 주인공인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기댄 채 흐릿하게 보이는 마을을 배경으로 서있다. 꽃과 연인이라는 주제가 샤갈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은, 아내이자 첫사랑이었던 벨라와 결혼하던 1915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벨라에게 꽃을 받았던 가난한 화가, 샤갈에게 꽃은 행복하게 빛나는 삶을 의미했다. 하지만 사랑과 꿈, 환상의 세계를 다루었던 샤갈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치 못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어야 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1944년에는 그의 부인이자 뮤즈였던 벨라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이런 수많은 고난을 뒤로한 채 다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 니스 근처의 생폴 드 방스 지역에 정착한 뒤로는, 점점 더 크고 화려한 꽃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눈부신 남프랑스의 햇살 아래 빛나고 있는 이 결혼 꽃다발은 말년에 되찾은 새로운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담아낸 샤갈의 대표작이다.
<결혼 꽃다발>, (1977~78)은 어린 시절 기억과 꿈을 몽환성이 더 강해진 화면으로 표출한 샤갈의 말년 화풍이 잘 드러난 수작이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에펠탑의 신혼부부〉, 1938~1939, 캔버스에 유채.150×163.5cm, 프랑스 퐁피두센터 소장
'에펠탑의 신혼부부'는 샤갈이 51세에 그렸다. 그림에는 계란 프라이가 하늘에 떠 있고, 수탉이 사람 몸만 하고, 염소와 바이올린이 한 몸이다. 집은 매우 작고, 나무는 엄청 크다. 신랑, 신부, 닭, 염소, 천사 등 등장인물이 죄다 착해 보이고, 다들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다. 마치 꿈속 장면 같다.
샤갈은 이처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이는 샤갈이 앓은 뇌전증과 연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호진 한양대구리병원 신경과 교수는 “의학계에서는 뇌전증 발작 전조 증상으로 종종 나타날 수 있는 환시가 샤갈의 작품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한다”고 말했다.
샤갈, 〈러시아 전통 결혼(Russian Wedding)〉. 1909년. oil on canvas. 97x68cm. Bührle Foundation, Zürich, Switzerlanda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결혼식 촛불들〉, 1945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도시 위에서〉, 1914~1918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산책〉, 1917-1918.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생일(The Birthday)〉, 1915, 키보드에 유채, 뉴욕 현대미술관.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한 가지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푸른 다윗왕(Le Roi David en Bleu)〉, 1967, Oil on Canvas, 65×81cm, Private Collection, Marc Chagall. Paris.
‘푸른 빛의 다윗왕’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지만, 이 그림의 이야기는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아들의 반역으로 상심에 빠진 다윗왕이 슬픔과 고통을 잊고자 왕관을 쓰고 하프를 연주하며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상심을 치유하는 다윗왕을 통해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시대적 인류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꾸준히 이 성서를 통해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강기슭에서의 부활(La Résurrection au bord du fleuve)〉, 1947, Oil on Original canvas, 98 x 73.5 cm, Private Collection, Marc Chagall. Paris.
이 시기 그린 <강기슭에서의 부활>이란 작품을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색을 띠고 있다. 오른쪽에서 샤갈은 그림을 그리는데 한쪽은 염소의 얼굴이고, 염소 얼굴은 타오르듯 붉은 색이다. 마찬가지로 옆에 그려진 마을 비텝스크도 불타는 듯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단 한 건물. 유대교회만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다. 상단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는 여러 차례 같은 모티프를 반복해서 그리고 있지만 시대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샤갈의 그림은 시대를 반영하기에 그의 모티프 안에서 1940-1950년대의 시대상을 읽어보는 것도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러시아의 유대인 마을인 비텝스크(Ві́цебск)에서 태어난 샤갈은 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샤갈은 성서 판화에서 종종 자기 삶을 작품세계에 투영했다.
<푸른 다윗왕>에서 다윗왕이 날아다니는 마을은 샤갈의 대표작인 <나와 마을>에서도 등장한 고향 비텝스크다. <강기슭에서의 부활> 또한 샤갈의 고향 마을이 등장하며, 당시 2차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탄압받던 유대인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샤갈의 상황은 성서와 역사로부터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벨라〉
벨라는 1944년에 죽었지만, 일생 샤갈의 연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샤갈은 러시아로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군 복무를 했다. 1915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했으며,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했다. 이때 그린 〈생일〉을 보면 그의 사랑과 행복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벨라가 하늘의 푸른 공기,
사랑,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12~1913, 126×107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 소장.
이 작품에서 특히 재미있는 것은 샤갈이 자신의 손가락을 일곱 개로 표현한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고 전위적인 작품 속에서도 화가 특유의 천진난만한 동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샤갈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왼손가락을 일곱 개나 그린 걸까?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갖는 궁금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샤갈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섯 손가락이 아닌 일곱 손가락을 통해 상식이 파괴된 세계를 의식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화가의 이러한 관념적인 언급만으로는 작품에 대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보면서 화가에게 있어서 '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 해석에 대한 지나친 감상의 비약일까? 실제로 손이 없으면 화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화가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는 예술적 영감을 캔버스에 옮기는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된다. 이 손가락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예술적 영감이 샘솟는다 하더라도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샤갈은 자신의 작품에서 평면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욕망을 일곱 개의 손가락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회화의 평면성의 극복은 입체파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이룰 수 없는 욕망 같은 것이었다. 샤갈은 손가락이 일곱 개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아이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일곱 손가락의 자화상〉에서 손가락만큼 많이 회자되는 부분은 창밖으로 보이는 에펠탑이다. 창문 옆에는 카툰에서나 볼 수 있는 말풍선 같은 것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말풍선 안에는 샤갈의 고향 러시아 비프테스크의 교회가 있다. 그림 속 샤갈 앞에 놓인 캔버스에도 바로 그 교회가 등장한다. 아직 어린 이방인 예술가가 멀고먼 타향 프랑스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이 그림 곳곳에 배어 있다.
〈흰색 컬러의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14, 30×26.5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샤갈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번뜩이는 눈과 얼굴의 명암은 그의 여러 작품 속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난다. 자화상 속 샤갈의 눈은 매우 강렬하다. 실제 그의 눈과는 사뭇 다르다. 또한 작품 속 얼굴에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 묘사된다. 이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흰색 컬러의 자화상〉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속 젊은 샤갈의 표정이 매우 냉정하고 어둡게 느껴지는 것 역시 번뜩이는 눈과 얼굴의 명암에서 비롯한다. 그림 안에서 그가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빛깔이었을까?
〈와인 잔을 든 두 사람〉, 캔버스에 유채, 1917~1918, 235×137cm, 프랑스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
〈와인 잔을 든 두 사람〉은 샤갈이 자신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특이한 모습의 두 남녀에게서 샤갈 특유의 치기(稚氣)가 느껴진다. 낮게 드리운 지평선 위에 선 두 사람은 넘치는 행복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치 하늘로 떠오를 것만 같다. 샤갈의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는 러시아에서 온 가난한 이방인 예술가에게 사랑의 기쁨을 알려준 메신저였다. 작품 속 샤갈의 머리 위에 있는 아기천사는 이들 부부의 딸 이다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 벨라의 뱃속에 이다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유독 돋보이는 것은 샤갈이 벨라의 왼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장면이다. 벨라가 무엇을 보고 있기에 샤갈이 그녀의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걸까? 러시아에서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사람의 눈이 두 개인 이유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느끼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한다. 한쪽 눈이 행복을 본다면 다른 한쪽 눈은 불행을 본다는 것이다. 혹시 샤갈은 사랑하는 아내 벨라의 눈 가운데 불행을 보는 눈을 가린 것은 아닐까? 그로테스크한 화풍만큼이나 샤갈의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샤갈, 〈비바의 초상〉, 1953-6, 캔버스에 유화
〈달빛 아래 러시아의 농촌〉, 캔버스에 유채, 1911, 126×104cm,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샤갈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단연 〈나와 마을〉(국내에서는 '눈 내리는 마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역주)과 〈서커스〉, 〈달빛 아래 러시아의 농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 속에는 형태와 공간에 대한 기상천외한 상상이 마치 어린 아이의 생각처럼 펼쳐진다. 아울러 종교에서 느낄 수 있는 경건함과 시의 서정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특히 〈나와 마을〉은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캔버스에 합쳐 놓은 콜라주 기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 기법이 되었다. 영화에서 쓰이는 몽타주 편집 방식이 캔버스에 옮겨진 것이다.
샤갈은 이들 작품에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서정적인 화면으로 합성하면서 기억 속의 장면을 묶어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샤갈의 작품들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나와 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눈'이다. 소의 눈과 사람의 눈은 마치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어떤 교감을 나누는 듯하다. 1911년 파리에서 이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순간 샤갈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문득 화가의 눈빛이 궁금해져온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하얀 그리스도〉, 1938년.
✵ 예썰 셋. 샤갈이 유일하게 남긴 ‘OOO’? 제2의 고향 파리를 위해 샤갈이 준비한 선물의 정체는? 샤갈이 자신의 예술을 온전히 펼칠 수 있게 도와준 조력자가 또 하나 있다. 20세기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다. 샤갈은 유대인 차별을 피해 고향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당시 프랑스는 유대인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몽파르나스에 자리를 잡은 샤갈은 그림 그릴 천이 없어 테이블보에 그림을 그려야 할 만큼 가난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마티스, 피카소 등 지금은 거장이 된 무명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더욱 성장하게 된다. 제2의 고향이라 칭할 정도로 파리에 애정을 보였던 샤갈.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품어준 도시를 위해 한 ‘작품’을 완성했다. 바로 천장화 ‘꿈속의 꽃다발’! 오페라 극장의 천장을 장식한 이 그림은 샤갈이 유일하게 남긴 천장화이기도 하다. 샤갈의 천장화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오페라 가르니에 천장화, 〈꿈속의 꽃다발〉, 1963.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 Paris)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1976:소설 〈인간조건 La Condition humaine〉(1933)의 저자)는 1964 년에 쥘 외젠 르느뵈(Jules Eugène Lenepveu)의 원본 천장화가 있는 자리에 새로운 그림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에게 의뢰했다. 샤갈은 기존 그림 위에 떼었다 붙였다 하는 이동식 프레임으로 '꽃다발 속의 거울'을 그렸다.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천장 마르크 샤갈의 작업(Marc Chagall's Ceiling for the Paris Opéra), 원래 있는 르느뵈의 그림 위에 덧씌워 설치 미술 형식으로 얹혀놓은 천장화를 사람들은 '꿈의 꽃다발'이라고 불렀지만, 샤갈 자신은 이 거대한 천장화를 '꽃다발 속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마르크 샤갈의 '꽃다발 속의 거울' 천장화는 1964년 샤갈이 그린 그림으로 극장 천장에 덮어둔 그림에는 14명의 위대한 작곡가들, 무소륵스키(Mussorgsky), 모차르트(Mozart), 바그너(Wagner), 베를리오즈(Berlioz), 장-필리프 라모(Rameau), 클로드 드뷔시(Debussy), 라벨(Ravel),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차이콥스키(Tchaikovsky), 최초의 인간 아담(Adam), 비제(Bizet), 베르디(Verdi), 베토벤(Beethoven)과 빌리발트 글루크 Gluck 등의 오페라 장면으로 채워있다. 모두 오페라 명장면들이다. 일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대부분 많은 다른 사람들은 '샤갈의 작품이 가르니에의 엄숙하고 고상하며 신중한 분위기를 헤프게 간지럽힌다'라는 평도 들었다.
극장 천장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가르니에(Garnier)가 디자인했다. 샤갈의 그림 중앙에는 무려 7톤의 청동의 샹들리에가 있다. 너무 커서 4층 박스 속에서 무대가 가린다고 불평했는데, 이 크고 무거운 샹들리에는 마침내 1896년 5월 20일 추락해 극장 안내 직원이 깔려 죽었다. 1910년 이 끔찍한 사건에 영감을 받은 추리소설 작가 가스통 루이(Gaston Leroux)는 고전 고딕 소설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을 썼고, 그 소설을 기반으로 '팬텀 오브 오페라' 뮤지컬도 탄생했다.
파리 가르니에 극장 천장화 ‘꿈속의 꽃다발’ 준공식은 예술적 이벤트로 천장 샹들리에 조명을 끈 상태서서 오케스트라가 모차르트의 교향곡 ‘주피터’를 연주 하면서 하나씩 켜 가면서 화려한 불빛, 음악과 함께 선보인 샤갈의 작품이 공개 되였다. 파란 하늘에 샤갈의 별을 새기다.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Mozart Symphony No. 41 in C major ‘Jupiter’ K.551 W.A. Mozart 1756~1791)
이 교향곡의 부제인 《주피터》는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으로 주피터의 이름에 걸맞게 웅장하고 장대한 규모의 작품이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밝은 적색의 유태인〉, 1915.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농부의 삶〉, 1925.
• 마르크 샤갈, 〈누워 있는 시인〉, 1915, 보드에 유채, 77.2×77.5cm.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이 아름다운 그림을 테이트 모던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 속에서 꿈꾸듯 고요히 누워 있는 한 남자의 모습. 이 그림처럼 ‘시와 꿈’이라는 주제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샤갈의 그림에는 유난히 어린 시절의 환상과 동화, 꿈속의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늘을 날아가는 신부의 모습이나 커다란 염소의 얼굴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샤갈의 모티프들이다. 〈누워 있는 시인〉은 그런 그림들에 비해 조금 고적해 보이지만, 샤갈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일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Work isn't to make money
you work to justify life.
-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 〈혁명〉, 1937.
예술에 대한 사랑은 삶의 본질 그 자체다
L'amour de l'art est l'essence meme de la vie
-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러시아 비텝스크 출신의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 대표작은 주요 작품은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나와 마을〉, 〈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 〈갈보리 언덕〉, 〈바이올린 연주자〉, 〈창문을 통해 본 파리〉 등이 있다. 1910년부터 4년간 파리에서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후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동판화 연작을 의뢰받아 판화제작자로도 활동했다. 1958년 이후로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설계하기도 했다. 샤갈의 작품에는 내면으로부터 드러난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있으며, 현대 작품에서 드물게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가 열렸다.
폴란드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러시아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샤갈에게는 형제가 8명이 있었으며 식구들은 모두 독실한 유대교도였다. 샤갈의 가족은 비테프스크에 사는 2만여 명의 유대인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초라하게 살았으나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생선·밀가루·설탕·양념 등을 파는 가게를 경영했다. 어린 샤갈은 유대인의 초등학교에 다닌 뒤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지방공립학교에 들어갔다. 샤갈은 유대 교회당에서 성서를 읽었고 노래를 불렀으며, 정통 합리주의를 반대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의 유대교파인 하시드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학교에서 데생의 초보를 배운 뒤 그 지방 출신의 사실주의 화가인 제후다 펜의 작업실에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그곳에서 3년 동안 간헐적으로 공부하다 마침내 그무렵 무대장치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던 레온 바크스트 밑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림 속에 이미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 나오는 악몽 같은 분위기의 〈죽은 남자 The Dead Man〉와, 검은색과 흰색의 배합을 실험한 초상화 〈검은 장갑을 낀 나의 약혼녀 My Fiancée with Black Gloves〉가 있다.
청년기는 19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후원자가 제공한 생활비를 가지고 파리로 갔다. 몽파르나스에서 하숙생활을 하며 1년 6개월을 보낸 뒤, 자유분방한 미술가들이 모여 사는 라뤼슈(벌집)라는 초라한 마을의 끝에 있는 작업실로 이사했다. 샤갈은 그곳에서 표현주의 화가인 수틴과 색채추상화가인 로베르 들로네, 입체파 화가인 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저, 페르낭 레제, 앙드레 로트 등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시인인 블레즈 상드라르,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등을 만났다.
그 집단에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대담한 회화를 장려했으며, 마르크 샤갈은 그러한 자극에 영향을 받아 러시아에 있을 때 드러내기 시작한 시적이고,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인 경향들을 빨리 발전시켜나갔다. 그와 동시에 파리의 미술관들과 화랑들에서 본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및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들에 영향을 받아, 샤갈이 고향에 있을 때 사용했던 대체로 칙칙한 색채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마르크 샤갈이 처음으로 파리에 머물렀던 이 4년의 기간은 때때로 그의 전성기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나와 마을〉·〈아폴리네르에게 바치는 경의 Hommage à Apollinaire〉·〈갈보리 언덕 Calvary〉·〈바이올린 연주자 The Fiddler〉·〈창문을 통해 본 파리 Paris Through the Window〉 등이 있다.
이 그림들에서 이미 마르크 샤갈은 본질적으로 그뒤 6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양식을 개발했다. 샤갈의 색채는 때때로 엷은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 복잡한 특성과 반향을 띠어갔다. 종종 거꾸로 된 묘한 형상들을 캔버스에 아무렇게나 배치했는데, 이것들은 때때로 필름 몽타주와 비슷하면서 명백히 의도한 것 같은 내면의 환상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디시어(語)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농담이나 러시아의 전래설화, 또는 보드빌을 떠오르게 한다.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로맨틱하게 잘생기고 곱슬머리에 약간 동양적으로 보이는 젊은 시절의 화가 자신인 경우가 많다. 어린시절과 비테프스크에 대한 추억들이 이미 표현의 주요원천이 되고 있다.
마르크 샤갈은 파리에서 해마다 열리는 '독립미술가전람회'와 '가을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한 뒤, 1914년 현대 미술 잡지인 〈슈트름 Der Sturm〉을 발간한 베를린의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져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전시회에 들른 뒤 샤갈은 비테프스크에 갔다가 그곳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마르크 샤갈은 그 시기에 비교적 사실주의적인 양식으로 그 지방의 풍경을 담은 유화와 노인들을 주제로 한 일련의 스케치를 그렸는데, 노인을 주제로 한 연작으로는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The Praying Jew〉·〈풀밭의 유대인 Jew in Green〉 등이 있다. 1915년에 샤갈은 비테프스크의 부유한 상인의 딸인 벨라 로젠펠트와 혼인하여 이때부터 그녀를 자신의 그림들에 많이 등장시켰는데, 그러한 것으로는 날아다니는 연인을 그린 〈생일 Birthday〉과 활기차고 곡예를 하는 듯한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 Double Portrait with a Glass of Wine〉 등이 있다.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 샤갈은 처음에는 이것에 몰두했다. 샤갈은 비테프스크 지역의 예술위원이 되어 지방 아카데미와 박물관을 위한 야심적인 사업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년 6개월 동안 열심히 활동했는데도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싸움들이 점점 심해지자 활동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로 옮겼다. 그곳에서 샤갈은 한동안 무대미술에 관심을 기울여 유대인 작가인 숄렘 알레이헴의 작품들을 위한 무대장치·의상이나 카메르니 극장을 위한 벽화들을 만들었다.
1922년 마르크 샤갈은 영원히 러시아를 떠나 처음에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그가 1914년에 남겨놓았던 그림들의 상당수가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한 뒤 1923년 아내와 딸과 함께 다시 파리로 가서 정착했다. 샤갈은 베를린에 있는 동안 판화기법을 배웠다. 친구인 상드라르의 소개로 파리의 미술상인인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만난 뒤 곧 니콜라이 고골리의 소설인 〈죽은 영혼들 Dead Souls〉의 특별판에 삽화로 넣을 동판화 연작을 의뢰받았으며 그뒤 오랫동안 판화제작자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뒤 3년 동안 마르크 샤갈은 고골리의 책을 위하여 107점의 전면 판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무렵 볼라르는 이미 또다른 계획(라퐁텐의 〈우화집 Fables〉에 18세기의 판화들과 비슷한 채색 삽화들을 넣은 개정판을 제작하는 일)을 세워놓고 있었다. 샤갈은 복제용으로 100점의 구아슈 그림을 준비했지만, 그의 색들은 너무 복잡하여 계획된 인쇄 과정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곧 흑백 동판화로 바꿔 1931년 그 판화들을 완성했다.
이무렵 볼라르는 성서에 삽화로 넣을 동판화를 제작해 달라는 또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1939년까지 마르크 샤갈은 66점의 판화를 완성했지만, 그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볼라르가 죽자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그 일을 시작하여 모두 105점을 완성했다. 파리의 출판업자인 E. 테리아드는 볼라르가 남기고 간 많은 사업들을 다시 시작하여 1948년에 〈죽은 영혼들〉(각 장의 표제용으로 11점의 동판화를 더 만들어 모두 118점으로 이루어짐)을, 1952년에 라퐁텐의 〈우화집〉(표지용으로 2점의 동판화를 더 만들어 모두 102점으로 이루어짐)을, 1956년에 성서를 발간했다.
마르크 샤갈은 이렇게 늦어진 대작업들뿐만 아니라 그보다 규모가 작은 판화집들과 낱장의 판화 작품 및 채색 석판화와 모노타이프를 많이 제작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에 샤갈의 그림은 대작이 줄어들었으며 많은 비평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질도 떨어졌지만, 어쨌든 더욱 뚜렷이 시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더욱 인기를 얻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Bride and Groom with Eiffel Tower〉·〈서커스 The Circus〉가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험이 증대하자 마르크 샤갈은 인상적인 그림인 〈흰 십자가 White Crucifixion〉에 반영되어 있듯이 매우 다른 종류의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샤갈은 널리 여행을 다녔는데 1924년에는 브르타뉴에서, 1926년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1931년에는 성서의 동판화를 준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1932~37년에는 네덜란드·스페인·폴란드·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1년 샤갈은 자신이 예전에 러시아어로 썼던 〈나의 생애 My Life〉를 프랑스어로 번안하여 출판했다. 1933년 스위스의 바젤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1939년 카네기상을 타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현대의 대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르크 샤갈은 프랑스의 루아르 지방으로 이주했으며, 그뒤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위협이 차츰 심해지자 더 남쪽으로 피해갔고, 마침내 1941년 7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샤갈은 멕시코에서 여름을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그뒤 몇 년 간 뉴욕 시나 그 근처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1942년 뉴욕 시의 '발레 시어터'를 위해 발레 〈알레코 Aleko〉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만들었다. 마르크 샤갈을 비롯해 모두 러시아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창작물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집시들 The Gypsies〉이라는 시에서 줄거리를 따왔고 음악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가단조 3중주 Trio in A Minor〉에 기초했으며 역시 러시아의 레오니드 마신이 안무를 맡았다. 샤갈은 한동안 예전에 프랑스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을 그림에서 계속 표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노란 십자가 Yellow Crucifixion〉·〈깃털과 꽃들 The Feathers and the Flowers〉이 있다.
그러나 1944년 아내 벨라가 죽자 그녀에 대한 추억들을 종종 비테프스크를 배경으로 다루었다. 〈그녀 Around Her〉(1945,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그녀를 울고 있는 아내이자 유령의 신부로 그리고 있으며, 〈화촉 The Wedding Candles〉(1945, 프랑스 개인 소장)·〈야상곡 Nocturne〉(1947, 개인 소장)에서도 다시 그녀를 신부로 그리고 있다. 1945년 마르크 샤갈은 뉴욕 시에서 상연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The Firebird〉를 위하여 배경막과 발레 의상을 제작했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미국의 미술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과 그로부터 몇 달 뒤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열린 회고전을 보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1947년 시카고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마음을 그린 작품 The Works of the Mind〉에 들어 있는 한 강연에서 샤갈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입체파 화가들에게 그림은 어떤 질서를 갖춘 형태들로 뒤덮인 표면이었다. 나에게 그림은 논리와 설명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질서를 갖춘 것들(물체·동물·인간)의 묘사로 뒤덮인 표면이다. 구도의 시각적 효과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는 '환상'과 '상징'이라는 말들을 싫어한다.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는 곧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 겉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진실할 것이다."
1948년 마르크 샤갈은 이미 프랑스를 2차례 방문한 데 이어 다시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파리 교외에서 살다가 결국은 코트다쥐르의 방스와 그 옆의 생폴에서 살았다. 1952년 바바 브로드스키와 재혼하고 65세의 나이에 친숙하고 시적이며 추억에서 따온 모티프들이 계속 작품에 나오긴 하지만, 거의 새롭다고 할 만한 활동을 재개했다. 고대 코트다쥐르의 도기 제조 중심지들에 가까이 살았던 것에 영향을 받아 샤갈은 실험적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3차원적 형태에 대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1953~56년에는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잊지 못하면서도 파리에 대한 애정으로 일련의 그림들을 그렸다. 1958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한 모리스 라벨의 발레인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의 연출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했다. 1958년 이후에는 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을 설계했는데, 첫 작품은 메스 성당과 예루살렘에 있는 '하다사헤브루대학 의료 센터'의 예배당을 위한 것이었다.
1964년에는 뉴욕 풀턴에 있는 교회의 창문을 완성했고 파리 오페라 극장의 새 천장을 완성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 링컨 센터에 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새 건물을 위하여 2점의 커다란 벽화인 〈음악의 샘 The Sources of Music〉·〈음악의 승리 The Triumph of Music〉를 완성했다.
1967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한 모차르트의 〈마적 Magic Flute〉을 위하여 무대장치와 의상을 제작했다. 1973년 프랑스 니스에 '마르크 샤갈 성서 메시지 미술관'이 문을 열었으며, 197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마르크 샤갈에게 레종도뇌르 최고훈장을 주고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회고전을 열어 그를 예우했다.
1977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제와 시카고의 전임 시장인 리처드 J. 데일리를 기념하여 만든 마르크 샤갈의 〈미국의 창문들〉이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공개되었다. 큰 꽃다발과 우울한 어릿광대, 날아다니는 연인들, 환상적인 동물들, 성서의 예언자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의 이미지들을 묘사한 민속적인 작품들로 말미암아 샤갈은 20세기 파리파의 중요한 전위미술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1939년 카네기상, 1948년 제25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판화부문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다. 1977년 프랑스로부터 레종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마르크 샤갈은 회화 이론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내면의 시적 호소력을 이용하여 상징적이고 미학적인 형식 요소들과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합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나와 마을 I and the Village〉(1911)과 같이 초현실주의 이전에 나온 마르크 샤갈의 초기 작품들은 현대 미술에서 처음으로 정신의 실체를 나타낸 것들이었다. 다양한 표현 수단을 사용한 샤갈의 작품들 가운데는 연극과 발레 무대장치, 성서를 삽화로 그린 동판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예를 들면 〈미국의 창문들 The American Windows〉(1977) 등이 있다.
마르크 샤갈은 이 환상적인 주제를 화려한 색과 특유의 능란한 붓질로 묘사했는데, 그의 양식은 표현주의나 입체파, 추상미술과 같은 1914년 이전의 운동들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개인적인 성향을 띠었다. 비평가들은 때때로 샤갈의 작품 대부분에는 가벼운 감상이 깃들어 있고 작품의 질이 고르지 않으며 모티프가 지나치게 되풀이된다고 비판하지만, 특히 걸작들은 현대의 작품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은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한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31회] 별들의 고향 – 마르크 샤갈. 2022년 12월 18일(일) 오후 10시 30분 방영, 동아일보 2021년 01월 30일(토), 런던 미술관 산책(전원경, 시공아트), 자화상전(천빈, 어바웃어북),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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