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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전하께서 배우셔야 할 것입니다."
아르카센은 딱 잘라 말했다. 라나는 그의 담담한 표정을 보다가 긴 드레스 자락에 가려진 발을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그래도 아르카센은 고개를 내젓는다. 라나는 뒤이어 책상까지 쾅 쳤다. 사실, 소녀가 화를 내는 것은 정말로 제왕학이 따분해서 배우기 싫다는, 마냥 철없는 투정이 아니었다. 열 여섯, 제국 에노필레스의 법으로 성년인 열 일곱이 되지 않아 아직은 어린 아이다. 그러나 라나는 대륙을 이끌고 있는 강대국의 1 황녀였다. 단순한 말의 겉 표면만을 긁어낸 게 아니라 아르카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간파해 낸 것이다.
제왕학帝王學. 글자 그대로 올바른 제왕이 되기 위한 학문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제왕이 배우는 학문이란 뜻도 되지 않는가? 어리 해석하든, 저리 해석하든 제국에서 제왕학을 배울 권리를 갖는 것은 단 한명이었다. 국본國本, 황태자 이르젠. 아무리 전대 황후의 딸로서 라나 역시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태자의 권리를 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러나 라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시치미를 뗐다.
"다음대의 황제폐하가 즉위하시면 세르틴데의 여대공으로 자연스레 배우게 되겠죠. 설마 아버지께서 벌써 황위를 오빠에게 넘긴다고 했나요?"
라나의 말에서 쌩쌩 찬바람이 불었다. 황위계승, 그 빌어먹을 것 때문에 수많은 견제를 당하고 살아왔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책봉되어 있던 황태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에게는 암묵적인 위협이었다. 소녀 자신이 아무리 황위계승에 욕심이 없음을 외쳐도 자기의 판단만을 믿는 귀족들은 라나를 수없이 괴롭혔다. 그것만으로도 힘겨운 황궁살이인데 거기다 실질적인 황위 계승의 상징인 제왕학을 배우라고?
"싫어, 안 배울거야. 절대로, 절대로 안 배워어어!"
다소 높은 외침이 집무실 안을 가득 메웠다. 라나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저으며 책상을 쾅쾅 내리쳤다. 다 필요없다. 설사 여론이 뒤바뀌어 그 자신이 여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다 하여도 절대로 그것을 디디지는 않을 테다. 소녀의 뇌리에 흐릿한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온화한 루시아르 황후, 귀족들의 온갖 음해공작에도 견고한 신뢰를 보내주었던 이르젠의 모습이었다. 차라리 자신마저도 가출하면 어떨까? 엘로디에게까지 제왕학을 가르치려고는 하지 않을 거다. 동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에노필레스에는 남녀의 구분은 없어도 적서의 구분은 명확했으니까.
조금씩 극단적인 생각에까지 이르고 있는 라나의 귀에 차분한 아르카센의 음성이 들렸다.
"폐하께서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제왕학을 배우셔야 서류를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쓰러져?! 그리고 서류!?"
쿵, 둔탁한 울림이 깊게 퍼졌다. 아르카센이 뒤쪽으로 내려놓았던 종이뭉치를 라나의 앞으로 내려놓은 것이다. 단순히 제왕학을 배우기 위한 자료들이라 생각했던 종이뭉치들은 일이 밀릴대로 밀린 서류들 중 제법 중요한 것만을 추려 온 것인가보다. 종이뭉치를 응시하는 라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자타공인 괴물같은 체력을 자랑하던 아버지가 쓰러질 정도면 그 양이 보통이 아니라는 애기인데, 저렇게 양이 작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슬쩍 올려다 본 아르카센의 입가에는 소녀를 약올릴 때만 가끔 떠오르는 야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딱, 아르카센은 손가락을 가볍게 맞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만찬 음식을 나를 때 쓰는 수레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악! 라나는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언제 다가온 건지 아르카센이 소녀의 어깨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라나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수레를 보았다.
이건, 말 그대로 서류지옥이다!
"아, 아리 경…?"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배우시죠. 폐하께서는 극도의 안정을 요구하시는 상태라, 후에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퇴로 차단. 진격할 곳은 보이지 않음. 라나는 군소리 않고 얌전히 폭신한 의자에 몸을 밀어넣었다. 교재는 서류, 시험지도 서류. 바야흐로 제국 최고(라 쓰고 최악이라 읽는다)의 선생님일 아르카센과의 과외 시작이었다........ 일까?
◇ ◇ ◇
에르페 궁. 제국의 지존으로서 만인지상의 위位에 있는 황제 테르반 펠레스의 거처궁인 이곳은 유쾌한 웃음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크크크크… 크으파하하하하!! 그래, 듀르한 공이 직접 서류를 챙겨들고 갔다고?"
"그러하옵니다, 폐하."
"크하하하하하! 라나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가는군!!"
과로로 쓰러졌다는 황제는 멀쩡하게, 아니 그보다 더 팔팔한 안색으로 행색만 그럴듯 하게 침대에 누운 채로 두툼한 이불을 체통도 없이 탁탁 두들겨가며 호쾌하게 웃고 있었다. 앞에 시립해있는 시종장은 혹여라도 황제의 웃음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뒤쪽에 있는 문을 잘 여며 닫은 후,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는 한 사내를 난감한 시선을 담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후드를 푹 눌러 쓰고 있던 사내의 입에서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조용히 하게."
그러자 정말로 놀랍게도 황제의 웃음이 뚝 하고 멎었다. 도대체 사내가 무엇이길래 제국의 황제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시종장조차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있는지 시종장은 사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 사내가 손짓하자 아무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가벼운 마찰음을 내며 다힌 것을 확인하고 사내는 천천히 일어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내렸다. 황제의 침실 안이 컴컴해지고 나서야 그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게 푹 눌러쓴 후드를 뒤로 제꼈다.
후드를 뒤로 젖히자 나타난 것은 1황녀의 머리색과도 똑같은 찬연한 레드와인 빛 머리칼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라나와는 달리 희끗한 백발이 섞여있다는 것이지만 드러난 얼굴은 몹시 수려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맑지만 매서운 빛을 담고있는 레드와인 빛 눈동자 역시 너무도 깊어 그가 얼마만큼의 연륜을 지닌 건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침묵하고 있던 황제는 사내가 딸과 비슷한 용모를 드러내자마자 탄식했다.
"이거, 장인 어른은 나날이 회춘하는 듯 합니다. 누가 보면 제 아들놈이라 해도 믿겠군요."
"자네는 나날이 실없는 농담이 늘어가는 군. 누가 대 제국 에노필레스의 황제라 하겠나?"
-장인 어른. 황제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낯설지 않은 칭호가 사내의 정체를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레드와인 빛 머리칼에 같은 색의 눈. 오직 아우스탄디 대공가만이 그러한 특징을 지닐 수 있고 황가에서는 이셀리나 황후의 딸인 라온제나만이 그 색을 지니고 있었다.
케르벤체스 J. 아우스탄디. 현 아우스탄디 대공가의 가주이자 가문 자체로 이루어진 알려지지 않은 황실만을 위한 암살길드의 마스터. 혹자들에겐 희대의 암살공, 죽음의 사신이라 더 많이 불려지고 있는 사내. 그리고- 이셀리나 전 황후의 아버지로서 황제의 장인이기도 했다.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욱 많은 비밀에 휩싸인 사내였다. 하지만 그라면 황제라 해도 충분히 하대할 권한이 있었다. 장인이란 위치도 위치였거니와 그는 많고 많은 황자들 중 하나였던 지금의 황제를 황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아홉 이무기의 난'이라고 불렸던 오래되지 않은 에노필레스의 암흑기.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을 황족의 미덕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 '아홉 이무기의 난' 이후로 관념 자체가 바뀌었다.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황위 계승자가 되었던 암흑기 이전의 법들과는 달리 현 황제 때부터는 첫째만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첫째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둘째로, 그 다음은 셋째로- 이렇게 장자세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세 명의 황녀와 여섯 명의 황자가 골육상쟁하던 그 때의 폐혜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쨌든 그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힘이 없던 막내 황자를 꿰뚫어 본 대공이 힘을 실어주기 시작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10년을 이끌었던 전쟁이 순식간에 판가름났다. 당연하게도 이무기 중에 용이 된 것은 대공이 점찍었던 막내황자, 테르반 펠레스 2세였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는 대공도 황제에게 존대를 쓰기는 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그는 황제에게 하대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일부 귀족들은 대공이 그릇된 마음을 먹으면 제국이 대공의 손 안에서 놀아날 거라고 수군거렸지만 그것은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아우스탄디 대공가는 철저한 황실의 그림자로서 그 명맥을 천년 가까이 이어왔다. 제아무리 그림자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일 뿐.
주인이 있었다면 결코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우스탄디 가는 황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라나에게 제왕학이라니, 귀족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을 거야. 호위기사 하나 정하는 데도 그리 힘들었지 않나?"
잠시 옛 기억을 뒤적이고 있는 황제의 귀에 조용한 대공의 말이 들렸다. 황제는 비록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지만 대공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짖궂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태자가 없어 쉬지않고 업무를 처리하다 쓰러져버린 황제에게 무얼 어찌 반발하겠습니까? 아니, 설사 반발한다손 쳐도 황제가 아니면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은 어쩌고요? 그리고 장인 어른이 원체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지라 시간을 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어째 가면 갈수록 툴툴거리는 듯해 보였지만 황제가 하고있는 말의 의미는 정확했다. 하나는 라나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대로 황제가 결코 과로로 쓰러진 게 아니며, 다른 하나는 라나가 제왕학을 배우는 것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귀족이 하나도 없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대공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미간을 조금 좁혔다. 황제는 흡족해야 할 대공이 되려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대공의 말이 더 빨랐다.
"잘못 짚었네. 내가 자네를 만나자고 한 것은 내려보냈던 가솔들 중 하나가 황도로 되돌아 오면서 황태자를 봤기 때문이야. "
"이르젠을요?"
"그래. 에레토넨 산맥 중턱에 있었다더군. 뒤쫓으려 했으나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치고 황태자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사라져서 그냥 올 수 밖에 없었다 하네. 사라지면서 '황도까지는 앞으로 3일'이라고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고도 했어."
"3일…."
황제의 표정은 갑작스럽게 침울해졌다. 3달 동안 가출했었던 아들이 3일만에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표정이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이 너무 성급히 행동했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대공 역시 직접 만나자고 할 게 아니라 서편으로 전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3일이면 결코 많은 시간이 아니다. 이리저리 생각해 둔 수가 있어 라나에게 제왕학을 배우라고 아르카센을 보냈지만, 성토당했던 황태자가 갑작스럽게 돌아온다면 안그래도 입지가 약한 라나가 위험했다. 제왕학은 본디 장자세습의 원칙에 따라 실직적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만이 배울 수 있는 것. 입 놀리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조금이나마 제왕학에 손을 댄 라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자신들이 아무리 든든히 지켜준다 해도 상처받는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다.
"제가 우매했습니다. 괜히 애꿎은 라나만…."
"일단 적당히 몸을 다스리는 척 하여 심각한 일이 아님을 보이게. 겉으로는 라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치는 게 없음을 알리란 말일세. 그리고 라나는 그 사실을 모르게 하면 되질 않나."
"장인께서는 어쩌시렵니까?"
"나는 일단 에레토넨 산맥으로 가 보겠네. 황도로 통하는 길목에서 황태자를 만난다면 볼기짝이라도 두드려 올려보내야 할 것 아닌가."
사실 대공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 가솔이 쫓아가지도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는 이르젠의 일이 걸렸다. 그가 알고 있는 황태자 이르젠은 검술을 배우긴 했어도 결코 무인의 기골이 아니었다. 그런데 속도가 생명인 암살자의 속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뭔가 기이한 인연을 만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한 자락의 자쥐도 남기지 않고 3달동안 이어졌던 끈질긴 황가와 대공가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었다. 혹여, 황태자가 사이한 것과 접촉해 황가에 해가 되는 힘을 얻었다면 그 자리에서 제거할 생각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모를 황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피가 날 정도로 두들기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저 붙잡아 올려주기만 하십시오, 제거하더라도 제 손으로 하겠습니다. 직설법으로 해석하자면 대충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음이니 다소 잔혹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대공은 내색하지 않았다. 일국의 황제쯤 되면 그만한 결단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대공은 내렸던 커튼을 걷어 창문을 열고 따가운 햇살 아래로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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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폐하는 이르젠을 싫어하고 계시는 걸까요?
.............................. ㅋ,ㅋ
맞춰보세용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색을 바꿔보았어용)
첫댓글 ㅎㅎ 역시 이번 편도 너무 재밌네요 ㅎㅎ 잘읽고 갑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열심히 쓸게요 > <
아아 역시 제스타일 판타지 소설이네요ㅋㅋ 이러니까 황자에 대해서 더 궁금해 지는데요?+_+ 부디 끝까지 건필해 주시기 바랍니다ㅋㅋ
넵, 아직 연재분량을 다 따라잡지 못했지만 꾸준히 올릴게요~
음.. 글쎄요.. 이르젠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쿡쿡. 음.. 3달간의 가출과 그 사이의 변화.. 이거이거 궁금해지는 걸요? 쿡쿡. 다음편 기대하겠습니다^^
ㅋ,ㅋ 황자님의 활약을 기대해주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와후, 수고하셨어요! > <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네 싫어하는것 같아요
얽... > < 폐하와 태자전하의 사이를 지켜봐주세용!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ㅋ,ㅋ
오옷~!!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