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어울리지도 않는 영어 나부랭이로 글머리를 장식하며 영화 일기를 시작해 본다.
저번 주 토요일,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며 밤바다를 보고 있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란 영화의 한 장면이 뜬금없이 생각났다.
레플리컨트의 리더인 로이 (룻거 하우거)가 데커드 (해리슨 포드)를 구해 주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특히 로이가 글머리에 쓴 영어 대사를 읊조리는 장면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
칠팔년 전에 구한 대여용 비디오 테잎이 있긴 했지만 원체 낡아서, 요즘 맛들인 DVD를 구해볼 요량을 내본다. 십여군 데의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클릭해 보지만 모두 '품절'이란 말 밖엔 없다.
쇼핑몰에 직접 연락을 해보니 언제 구할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단다.
급기야 한 달에 한 번 나갈까 말까한 시내로 진출.
한 허름한 DVD 가게에서 역시 대여용으로 구비된 딱 1개 남은 걸 살 수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와 [봄날은 간다], [화양연화] DVD를 연달아 구입하고, 또 이 DVD까지...
이번 달은 어떻게 버터야 할 지 엄두가 안 난다.
하지만 집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DVD를 보고 나니, 돈 걱정은 금방 날아갔다.
대여용인 중고 DVD긴 했지만, 역시 DVD는 다르군.
화질… 죽인다.
음향… 역시 죽인다.
근데… 어라?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진 레터박스로 처리되어 있더니, 정작 본편이 시작하자마자 4:3 TV 배율로 바뀌었다.
분명 자켓에는 레터박스로 처리된 Widescreen Version이라고 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 이미지도 없는 공 CD 같은 디스켓을 이리 저리 돌려봤더니, 한 면은
Standard Version 이고 다른 한 면은 Widescreen Version 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해서 반대 면으로 아주 선명한 화질과 음향, 그리고 레터 박스로 처리된 화면 배율의 [블레이드 러너]를 감상했다.
역시나 로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의 비장함은 네멋에서 느꼈던 감동과 맞먹는다.
로이의 은발머리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와 로이의 물기어린 목소리, 그리고 고개를 떨군 로이의 머리위로 퍼지는 반젤리스의 신디사이저.
스필버그가 연출한, 당 영화와 같은 원작자인 필립 딕 K의 다른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터]는 원작만 읽어보고 영화는 안 봐서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원작 매니아들로부터는 그리 좋은 평을 못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원작은 절판된 상태라 읽어보지 못하고 영화만 봤지만, 그리 소설 매니아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원작의 제목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이 영화는 감독의 출세작인 79년 작 [에일리언] 이후 3년 만에 제작한 영화로 1982년에 개봉했다.
개봉 결과는 쫄딱 망했다고 한다.
여기엔 2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스필버그의 ET랑 같은 해에 개봉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작사측에서 흥행결과를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멋대로 재편집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해리슨 포드의 지루한 나레이션과 뜬금없는 해피엔딩으로 인해 엉망이었다고 한다.
제작사 편집판은 본 적이 없지만,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신디사이저의 대가 반젤리스가 이런 제작사측의 횡포에 항의하여 OST 출시를 반대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라니 제작사가 당 영화를 엉망으로 만들긴 했나 보다.
그러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 리들리 스콧 감독과 주연이었던 해리슨 포드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블레이드 러너]는 감독판으로 재개봉될 수 있었고, 드디어 이 영화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남들이 걸작이라고 혹은 졸작이라고 평하건 중요한 건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떤가?'가 아닐까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이 영화는 신학적인 은유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해 준 영화였다.
창조자와 피조물, 원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의 사유론에 대한 반증은 이십대 철없는 치기로 가득했던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