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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려타곤(懶驢 坤) 28-3
해가 저물고 짙은 어둠이 깔리면서 칠호는 백초당이라 불리는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얀 안개에 뒤덮여 있는 거대한 건물은 완전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별도 달도 뜨지 않은 그 음산한 밤에 백초당 앞에 선 칠호는 건물 전체에 알 수 없는 귀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은 밤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멀리서 야경꾼의 불조심 도둑 조심하는 소리만이 칠호의 귀에 들려올 뿐이었다.
백초당의 정문 앞에 서게 된 칠호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위로 들어올려 백초당의 정문 위에 현판이 달려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면서 그가 가장 먼저 때려부수고 싶은 현판이 사라져 있었다.
휑하니 빈 정문 위를 바라보는 칠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초당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현판과 정문을 때려부수면서, 이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자들이 공포로 떠는 광경을 보고 싶었던 칠호였다.
"제기랄----."
한 소리를 씹어 뱉어내며 칠호는 뒤돌아 섰다. 한 단체를 상징하는 현판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문과 현판을 지키기 위해 따로 사람을 둘 정도로 현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현판이 없어진 것을 보면서 칠호는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자들이 떠났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본거지를 옮기지 않는 한 현판은 절대로 다른 곳으로 옮기는 물건이 아니었다.
허탈한 걸음으로 뒤돌아 서서 백초당에서 멀어지고 있는 칠호는 품 안에 소중하게 간직한 붉은 유리조각을 꺼내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애초에 중원으로 돌아온 이유는 성녀라 불리는 여자의 환생을 찾아서였다. 빈집을 때려부수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칠호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그 붉은 유리 조각은 갑자기 빛을 뿜어내면서 팽그르르 돌더니 서쪽을 가리켰다.
"누군가 다른 조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서쪽으로 가고 있나 보군. 그렇다면 마교 성녀의 환생은 서쪽에 있다는 의미인가--?"
조각이 인도하는데로 서쪽으로 몸을 날리려고 하던 칠호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안개에 쌓인 백초당을 바라보았다. 저 집은 절대로 빈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한 탓이었다. 다른 자들이야 저곳을 떠날 수 있어도 단 한사람 그가 가장 죽이고 싶어하던 한 사람만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깜빡했구나---."
흐뭇한 미소를 흘리면서 뒤돌아 선 칠호는 오른 손을 앞에 보이는 백초당의 정문을 향해 뻗었다.
짙푸른 녹색의 광채가 앞으로 뻗어나가 백초당의 정문에 부딪쳤다.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트리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폭이 일장에 높이가 일장 반이나 되는 거대한 백초당의 정문은 그 순간 녹아 내리고 있었다. 독으로 이루어진 강기, 그래서 독강이라 불리는 칠호의 새로운 무기였다.
양옆에 높은 담벼락만 남겨두고 그렇게 정문이 사라지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칠호는 중얼거렸다.
"잠들어 있다는 그자가 머물고 있는 곳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한기가 감도는 곳이라 다른 자들은 접근도 못한다고 했겠다? 지난 십년간 날 골탕먹이던 그자를 죽일 절호의 기회다."
지하에 잠들어 있는 방종구를 죽일 생각에 백초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칠호는 얼마 못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뿌옇고 짙은 안개만이 주위를 감싸고돌고 있었다.
"진법이로군."
여유 만만한 미소를 흘리면서 칠호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한 순간 칠호의 몸 전체에서 짙은 녹색의 광채가 피어오르고, 그 광채는 칠호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회전하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녹색 빛의 폭풍이 칠호의 몸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안개가 걷히고 드러나기 시작하는 건물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붕괴되기 시작했다.
"꽝! 꽝!"
요란한 폭음이 계속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백초당에 세워졌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려갔다.
폭음이 멎고 회오리치던 녹색의 광채가 모두 칠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 백초당에 남아 있는 것은 백색의 광채 속에 머물고 있는 하나의 건물뿐이었다.
방종구가 지하에 잠들어 있는 그 건물의 지붕에 앉아 있는 방수련은 강기의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겨우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던 호신강기를 거두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몸매에 검은 경장을 한 날카로운 인상의 한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자를 보면서 방수련은 밀려오는 지독한 살기와 위압감에 몸이 떨려왔다.
진법을 이루고 있던 바위와 나무와 건물 모두를 한 순간에 파괴시킨 자였다. 독강이 퍼지면서 백초당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동안 방수련 또한 호신강기를 펼쳐 그녀가 머물러 살던 집을 지키고 싶어했지만 겨우 그녀가 앉아 있는 하나의 건물만을 지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 평지로 변해버린 땅에 온 몸에 녹색의 광채가 감돌고 있는 그자를 바라보며 방수련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칠호?"
그녀가 생각하기에 동생 방소구 외에 이런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칠호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칠호는 멍한 얼굴로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별도 달도 떠 있지 않은 아주 어두운 밤이었지만 두 사람 다 밤의 어둠을 꿰뚫어 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백설 같은 피부 위에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차가운 표정에 아름다운 얼굴---. 칠호가 난생 처음 보는 미녀였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칠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 속의 혼란을 털어내고 칠호는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로 백초당의 셋째 딸 방수련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더니----, 네가 바로 바로 방수련이로구나!"
방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당신이 칠호라 불리우는 운룡회의 천룡이라는 바로 그 사람인가요?"
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 방수련은 절망했다. 지금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백초당으로 쳐들어 온 것이다. 지하에 잠들어 있는 오라버니 방종구를 저자를 반드시 죽이려 들것이고, 그녀 혼자서 저자를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대로 그녀가 도망친다면 지하에 잠들어 있는 오라버니 방종구가 저자의 손에 죽게 될 터이니---.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 물밀 듯이 후회가 물려왔다. 취하나 취앵이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이곳에 남아 있었더라면 저자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저자가 독강을 연성 했다면 취하와 취앵이는 빙강을 연성한 상태였다. 취하와 취앵이 둘을 북해로 보내지 않았다면 오대세가의 배신도 없었을 것이고, 저자가 쳐들어오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방수련은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판단 착오로 인해 그녀 자신과 모두가 위험해진 것이다.
지붕 위에 앉아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방수련에게 시선을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칠호는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해져서 방수련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심하군. 위험하다 싶으니 모두 다 도망치고 여자 하나만 남아 있다니---. 신기서생이라는 자가 네 남편이라고 들었는데, 남편은 어디 간 거지? 마누라만 놔두고 저만 살자고 도망치는 겁쟁이였나?"
칠호의 말에 쓴 미소를 흘리면서 방수련은 밑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는 무공을 배운 사람이 아니니 이 자리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방종구가 없으니 백초당도 한물 갔군.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호호,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일, 넌 우리 가문의 원수다! 방씨 집안의 자손이라면 누구라도 너하고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내 남편은 널 위해 준비한 것이 있지."
"뭐지?"
칠호는 방수련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면서 섬칫한 느낌에 황급히 질문했다. 그러나 아직 싸울 기분이 들지 않고 있는 칠호였다. 지붕 위의 여자는 그가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자였고 목소리 또한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칠호는 손을 쓰는 일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방수련은 사방을 살펴보았다. 칠호라는 자가 독을 사용한다는 그것도 독강까지 연성한 독의 고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의 남편 또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준비한 수십가지 함정이 모두 독에 의해 사라져 백초당 에는 건물들의 무너진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방수련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독이 땅속으로도 스며들어가 땅에 묻어놓은 폭약까지 녹여버렸는지, 터질 때가 됐는데 폭약도 터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의 실력뿐이었다.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아서 칠호가 방종구가 잠들어 있는 지하로 들어가는 일을 막아야했다.
"야--아--합!"
날카롭고 뾰족한 기합성이 방수련의 입에서 흘러나오면서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금과 함께 그녀의 몸은 칠호를 향해 쏘아져 가고, 칠호는 막대한 힘이 실린 그 공격을 피해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미처 공력을 끌어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방수련의 공격을 맞받아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칠호의 실력이 위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지붕 위의 여자를 무시할 정도로 그의 실력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방수련 또한 천하에 상대를 찾아보기 힘든 고수 중의 고수였다.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적색의 금과 백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방수련의 두 손이 번갈아 가며, 칠호를 향해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쉬지 않고 공격해 들어갔다.
한번 잃은 선기를 다시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호는 계속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공격을 피해 반격의 기회를 잡으려하고 있었지만, 방수련 또한 지금의 선기를 잃게 된다면 이자의 손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필사적이었다. 이 일전에는 그녀의 생명만이 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는다면 지하에 잠들어 있는 방종구 또한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칠호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방수련의 연환의 공격에 계속 뒤로 밀리고 있는 칠호는 한 순간의 방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만 했다. 피하고 있기는 하지만 방수련의 손이 그의 몸을 한번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손이 닿은 것도 아닌데 칼로 베어진 것처럼 길게 갈라지고 그 자리에 경기가 할퀴고 난 상처가 남아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뿌연 백색과 녹생의 광채를 뿜어내는 그림자가 백초당이라 불렸던 건물의 폐허 위에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을 때, 신기서생은 지하에 마련된 한 비밀스런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총관, 당신은 이대로 소림사로 가서 처형에게 계속 처남이 올 때까지는 꼼짝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말하시오. 다른 세력들이 눈치 채기 전에 어서 가시오."
"그럼 방주님은--?"
"난 이곳에 남아서 지금 백초당에 쳐들어온 자를 죽일 생각이오. 어서 다른 자들이 눈치 못 채게 떠나시오."
백초당의 총관 염철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신기서생이 다음으로 한 일은 한 마리의 커다란 매의 다리에 서찰을 묶는 일이었다.
"비응아, 취하와 취앵이에게 반드시 이 서찰을 전해야 한다."
백초당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한 바위틈에 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곳으로부터 크기가 석자 정도 되는 검은 매가 깜깜한 밤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잠깐 열린 그 공간을 통해 어둔 밤하늘을 바라보며 신기서생은 중얼거렸다.
"늦어도 사흘이면 취하와 취앵이는 돌아 올 수 있겠지?"
다시 그 공간이 닫히고 이제 밀실에 혼자 남게 된 신기서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밀실을 벗어났다. 수십개의 밀실이 늘어서 있는 이 지하의 비밀스런 공간 속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지만 모두다 떠난 뒤였다. 정옥의 명에 따라 백초당에 소속되어 있는 모두가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그가 다시 불러 줄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제 이곳에는 은밀하게 숨어서 정옥을 지키고 있던 열 두명의 복면을 쓴 무사들뿐이었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심지어 신발까지도 검은 색 일색인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다가가면서 정옥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모두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예, 방주님. 우리는 모두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신기서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고 복잡한 지하의 미로를 지나쳐 그들이 다시 땅위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백초당의 부서진 폐허 위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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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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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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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