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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려타곤(懶驢 坤) 28-5
눈과 얼음의 대지를 벗어난 소구 일행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황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구의 마음은 급했다. 너무 오래 집을 비워둔 상태였다. 그래서 소구는 두 사람을 들볶고 있었다.
"급해요! 집으로 어서 가 봐야 한다구요!"
잠도 못 자고 식사도 거의 못 한 채, 소구의 재촉에 못 이겨 불과 한달 만에 북해를 벗어나게 된 정각과 양평은 피곤한 얼굴로 소구를 바라보았다. 북해를 벗어나 황량한 몽고족들의 터전인 어딘지 모를 황야에서 두 사람은 너무 지쳐서 이제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고,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소구는 두 사람을 향해 계속 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중이었다.
"소구야, 조금만 쉬었다 가자. 헥 헥."
숨을 헐떡이며 정각 대사가 입을 열었다. 죽어라 경공을 발휘해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남으로 남으로 달리게 된 두 사람은 소구가 괴물처럼 보이고 있었다. 보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남으로 달려온 세 사람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잠도 안자고 식사도 거의 거르면서 보름이라는 시간을 줄기차게 달렸으니, 사람인 이상 탈진해서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구처럼 괴물이 아닌 두 사람은 너무 지쳐서 주저앉아 있었고, 똑같이 움직인 소구는 두 사람과 달리 팔팔하기만 한 상태였다.
"그럼 잠시만 여기서 쉬도록 하죠. 그리고 쉬는 김에---."
말을 멈춘 소구는 사형인 양평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구의 그런 눈빛을 본 양평은 누워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뒤집어 뒤로 도망치면서 소리쳤다.
"아직 머리 깎기 싫다고 했잖아!"
"이제 거의 도착했으니 쉬는 김에 여기서 깎고 가자구요!"
날이 시퍼렇게 선 작은 소도(小刀)를 한 손에 든 소구는 도망치는 사형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티격태격하면서 머리를 깎아라 못 깎는다 하면서 두 제자가 남쪽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정각 대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에구구, 오늘 저녁엔 몽고족의 마을에 들려서 쉴 수 있으려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선 정각 대사였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제자가 살아 있어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놈들아! 같이 가자!"
생각을 하는 잠깐 사이 제자들의 몸은 까만 점으로 변해 버린 것을 깨닫고, 정각 대사는 황급히 소리치면서 제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구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즐거웠다. 늘 혼자서 움직여야만 했던 소구로서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같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고독이라는 절대로 익수해질 수 없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하하하! 사형, 뭐가 그렇게 창피하다는 거야? 주위를 둘러보라고! 다들 똑 같이 변발을 하고 있잖아!"
마침내 중원 땅에 들어서면서 양평은 변발을 하게 되었다. 영 어색한지 뒤로 길게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양평이 말했다.
"이 머리 모양이 뭐가 좋다고 너도 나도 다 하는 거냐?"
"사형이 잠든 사이 세상이 바뀌었어. 중원은 이제 더 이상 한족이 지배하지 않아. 만주의 여진족이 황제가 되어 있어."
"글쎄,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나라가 바뀌고 황조가 바뀐다고 해도 머리 모양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말은 내 생전 처음 듣는다."
"나도 갇혀 지내고 있는 사이 벌어진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지. 그 머리 모양을 안하고 있으면 반역자로 몰려 관병들에게 쫓겨다녀야 한다는 거야."
"끄---응---."
양평은 앓는 소리를 내며 불편하기만 한 등뒤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목에 둘둘 감았다. 앞서 길을 걷고 있던 정각 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서서 말했다.
"저기 객점이 보이는구나. 일단 저곳에서 식사부터 하자꾸나."
식사다운 식사를 꽤나 오랫동안 하지 못한 양평은 객점을 보자 미친 듯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생선과 양념하지 않은 고기만으로 식사를 계속해야만 했던 양평은 양념이 된 요리가 쌀이 그리웠다. 식탐이 도가 지나친 소구 역시 양념이 된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객점 앞으로 순식간에 달려갔고, 정각 대사 역시 오랜 세월 곡기를 끊고 살아야 했기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져 있었다.
외딴 황야 한 가운데 세워진 그 객점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몽고족들과 거래하는 상인들과 표국의 보표로 보이는 자들의 한 무리가 그곳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소면과 야채 그리고 만두 몇 조각이 올려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사이 소구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백초당이 폐허로 변했다는 소문 말인가?"
"방주도 죽었다고 하던데?"
"믿어지지 않은 소문이 너무 많이 들려."
"군산에서 소림과 개방을 제외한 구파와 오대세가가 싸웠다고도 하던데?"
"둘 다 명문정파라고 하는 세력들인데--, 설마 그들끼리 싸웠을려고?"
"백초당이 폐허로 변했다는 말도 그렇고---, 오대세가가 백초당과 같은 편이었다는 말도 있더군."
"그 제 잘난 맛에 사는 도도한 오대세가의 인간들이 상인들의 단체인 백초당과 같은 편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흥, 믿을 것을 믿어야지. 자네들도 생각해보게. 백초당이 어떤 곳인가? 천하제일고수가 버티고 있는 곳인데 누가 감히 덤벼들어? 게다가 그곳에 안방 마님으로 있는 방수련이 누구고 방화련이 누구인가? 방씨 집안의 둘째와 셋째 딸의 무공도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여자인데다 막내인 수면천마 방소구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자이지. 게다가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의 두 아내 또한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들이라고 하더군.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만 벌써 다섯이야. 그리고 백초당에 머물고 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만 해도 셀 수가 없는 지경이야. 누가 백초당을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백초당의 당주인자가 또한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인 청방의 방주라는 신분을 지닌 자라는 것을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럼 그 자의 호위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보게. 누가 그런 자를 죽일 수 있다고 믿는 거야?"
"그러니까 믿기지 않는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도 생각해보게.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이 멀고먼 변방까지 그런 소문이 흘러들어 왔을 리 만무하지 않나? 아닌 땐 굴뚝 연기 나겠나? 다 믿을 수야 없겠지만 소문 중에 사실도 들어 있을 거란 말이야."
"혹시 잠적했다던 운룡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식사를 하는 표사들 간의 대화는 온통 백초당에 대한 이야기뿐이었고, 백초당이 소구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정각 대사와 양평은 불안한 표정으로 소구를 바라보았다.
"소구야, 네가 우리를 생각해서 천천히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개봉으로 갈 터이니 먼저 가거라."
소구를 바라보며 정각 대사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부님?"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은 비록 네가 나보다 고수가 되어 있다만 나와 네 사형의 무공 또한 결코 낮은 편이 아니니 네가 생각한 것보다는 빨리 개봉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걱정 말고 사부님 말씀대로 먼저 가도록 해라. 사부님은 내가 모실 테니 너는 먼저 집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거라."
사부와 사형의 말을 들으면서 소구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다만 죄스러운 눈빛을 하고 사부를 바라보았다.
정각 대사는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고, 사부인 정각 대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다음 소구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앉은자리에서 사라졌다.
양평은 놀란 얼굴로 방금 전까지 소구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바라보았다.
"놀라지 말거라. 소구가 배운 혼천문의 경공은 공간을 격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예? 소구가 그럼 신선의 반열이라도 든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반인반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을 처음 본 순간 알아볼 수는 있었지. 소구의 공부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단다. 우리도 어서 식사를 끝내고 길을 떠나자꾸나.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양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하는 동안 그토록 시끄럽던 객점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바로 그들의 곁에 평생 가야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인물들이 있는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소구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면서 객점 안은 고요해진 상태였고, 남아 있는 두 사람 정각 대사와 양평이 나누는 대화 또한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저분은 자비수라 불리시던 정각 대사야, 그 앞에 앉아 있는 무인은 금룡이라 불리던 양평이 틀림없고---."
무림의 소문에 민감한 표사들은 잠시 뒤 두 사람의 정체를 깨닫고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조금 전 사라진 인물이 정각 대사의 제자로 알려진 수면천마 방소구라는 사실 또한 금방 알 수 있게 된 표사들과 상인들은 정적을 깨트리지 못하고 귓속말로 수군거리면서 힐끔힐끔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탁자에 은전 한냥을 올려놓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눈치만 살피던 표사들은 곧 요란하게 방금 본 장면에 떠들기 시작했다.
소구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개봉을 향해 달려갔다. 혼천독보를 사용한다면 개봉까지 한 걸음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전혀 싸울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기에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백초당에 도착해서 적과 싸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혼천독보 대신에 다른 경공을 사용해야 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 달려가는 소구는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바람이 스치는 것으로 느낄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너무 늦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소구는 속으로 방금 들은 말이 헛소문이기를 빌면서 이를 악물고 개봉을 향해 달려갔다.
'방금 들은 말이 헛소문이기를---, 제발 내가 도착할 때까지 집에 아무 일 없어야 할텐데--? 취하와 취앵이가 버티고 있으면 수련 누나와 함께 어떤 적이 와도 감당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대세가의 호위는 어떻게 된 거지? 백초당이 폐허로 변했다니---. 믿을 수 없어!'
마음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지우고 소구는 이를 악물고 개봉으로 달려가고, 그 시간 백초당에는 취하와 취앵이 도착해 있었다.
중원 땅을 벗어나기 전 전서응이 그녀들을 향해 날아와서 그녀들은 밤을 낮 삼아 달려 백초당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집은 이미 폐허로 변한 뒤였다.
백초당의 이장이 넘는 높이의 담장만 남겨두고 그 담장 안에 줄지어 늘어서 있던 모든 건물이 무너져 있는 광경을 보면서 두 여자는 잠시지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넋을 잃고 폐허로 변해버린 백초당을 바라보고 있는 취하는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는 취행을 보면서 소리쳤다.
"어디가 취앵아?"
"지하."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취앵이 말한 지하가 어딘지를 깨달은 취하 역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종구 도련님은 무사하실까?"
떨리는 목소리로 취하가 입을 열었다.
"그분이 무사하지 못하다면, 천하가 피로 물들 거야."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취앵이의 몸에서는 말과 함께 무시무시한 살기(殺氣)가 피어오르고,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취하의 몸에서도 곁에 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 같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폐허로 변한 백초당 주변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은신해서 담장만 남은 백초당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지만, 단지 두 여자가 내뿜는 살기만으로 그들은 몸을 피해야 했다. 살기와 함께 그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인적인 한기(寒氣)가 백초당의 담장을 넘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겹겹이 기관과 함정이 장치되어 있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취하와 취앵은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망설였다. 밑에 내려가서 그녀들이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반드시 이 아래로 내려가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무사한지 알아야만 했기에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밑으로 뛰어 내려갔던 그녀들은 잠시 뒤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우리들의 남편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곳을 지켜야지. 그리고 이 일에 관계된 자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할 거야. "
취하의 질문에 취앵이 대답하면서 먼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록 하녀와 주인집 딸의 사이로 만난 사이였지만 주종의 관계라기보다는 그녀들과 친구와 같은 사이였던 방수련이 그녀들이 서 있는 땅 밑에서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본 직후였다. 취하와 취앵의 마음속에도 이제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부터 겨울이 오려면 한 달이나 남은 가을이었지만 개봉에는 서리가 내리고 하늘에서는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개봉 전체가 너무 일찍 찾아온 겨울의 추위에 몸살을 앓고, 개봉에 살고 있는 무림인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개봉을 떠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추위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백초당이라 불리는 곳은 하나의 얼음지옥으로 변해 있었고, 그곳에서 일어난 차가운 기운이 개봉 전체를 겨울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건 주말 보네시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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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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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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