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3월, 만네르하임과 백군은 핀란드의 제3 도시인 탐페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군의 장교진 대부분을 흡수한 백군은 체계적인 공세 계획으로 쉼 없이 탐페레의 적위대를 몰아붙였다.
일리야는 수입한 무기와 물자로 적위대에 2만 명에 달하는 인원을 충원하였다. 본래부터 지원제였던 핀란드 적위대는 무직자와 여성 등이 많이 자원한 상태였고, 일리야는 토지개혁과 물자지원을 미끼로 지원 수를 크게 늘렸다. 또한 콘스탄틴 공작의 자금을 이리저리 동원하여 붉은 군대 내의 자원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윽고 야콥 팔바드레와 에스토니아 지원병대대가 헬싱키 항구에 도착하자 일리야는 한숨 돌렸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유데니치가 발트 지역을 점령한 상태에서도 에스토니아까지 달려온 지원병대대를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여는 한편, 모든 지원병에게 러시아어를 쓰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해야 했다. 에스토니아 지원병들은 일리야가 무슨 의도로 그런 당부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긴 설득은 필요 없었다.
“서부 전선의 러시아 원정부대 소속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겁니다.”
바이노 로무스라는 이름의 지원병대대 중대장이 찾아왔을 때 일리야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가 가져온 여러 물건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리야는 군사에는 일천했지만, 그랬기에 솔제니친이나 트로츠키가 말하는 대로 마르크스주의식 전술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고 전문가에게 군사 전술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의 등장을 경계는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혁명전쟁에서 패배하는 악수를 둘 생각은 없었다.
“산탄총이 효과적인 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빌하고 아미엥에서 미군이 얼마나 많은 산탄총을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딱 이런 식으로요.”
일리야는 개머리판과 총신을 잘라낸 더블 배럴 산탄총을 살펴보았다. 귀족까진 아니지만, 부르주아 집안 태생인 그는 사냥용 산탄총을 본 적이 꽤 있었고, 이런 총이라면 멀리 날아가는 거위나 사냥감을 잡기엔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호에서나 도심에서는 병사들끼리 주먹질을 할 정도로 전투가 가까이에서 일어납니다. 권총이 많이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미군은 이런 산탄총을 사용하는데, 20m까지는 살상력을 보장합니다.”
“그래도 너무 짧지 않습니까?”
“탐페레에서는 집에서 집, 골목에서 골목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벌목용 도끼를 쓰는 사례도 있다더군요. 자동권총은 러시아와 핀란드에선 희귀품이고. 그래도 산탄총은 흔한 편 아닙니까.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것이라 자신합니다.”
일리야는 산탄총에서 떼어져 나간 금박의 흔적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본래 사용하던 귀족이 누구였을 진 몰라도, 설마 빨갱이들에게 넘어가 사람 잡는 무기로 자신의 총이 사용되리라 생각하진 않았을 터였다.
“좋습니다. 로무스 동무는 전문가이니 맡겨 보지요. 산탄은 제조가 쉽다고 했으니…. 적위대 점령지 내에서 산탄총을 최대한 모아 보겠습니다. 부족한 수량은 스웨덴과 러시아에서 얻어 보지요.”
일리야는 문서를 꺼내 산탄총 관련 사항을 슥슥 적어나갔다. 로무스의 산탄총 제안은 그가 아는 수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크기의 차이도 있었지만, 옥수수 알갱이보다 작은 수많은 산탄이 들어가는 수렵용 산탄과는 다르게, 로무스의 제안 속 산탄은 크기가 9밀 리가 넘는 큰 구슬이 6개에서 8개가 들어갔다. 핀란드나 러시아의 병사들은 두꺼운 방한복을 입기 때문에 새를 잡는 산탄은 상처를 못 낸다는 게 로무스의 주장이었다.
“아, 그리고 사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보시죠.”
로무스는 프랑스제 와인 한 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고급은 아니었다. 브레스트에서 동맹국 대표단이 내놓았던 와인에 비하면 싸구려라고 불러도 족했다. 하지만 일리야는 고이 간직해온 듯한 그 와인병을 보며 뜻 모를 감정을 느꼈다.
“사실 저희 아버지가 입헌민주당원이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붉은 군대에 들어가지 못할 뻔했는데, 트로츠키 동무와 솔제니친 동무가 귀족 장교들을, 우스트랼로프 동무와 카메네프 동무가 비 볼셰비키 장교들을 영입하자는 주장을 관철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리야는 그제야 로무스의 쭈뼛거리는 태도의 이유를 눈치챘다. 자신이 한 주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일리야는 순진하게도 기뻤지만, 또한 씁쓸함을 느꼈다. 모든 일이 이렇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간다면 좋으련만, 일리야의 머릿속엔 이제 로무스와 같이 ‘자기 파벌’이라 할 수 있을 이들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주류였다.
“혁명은 소외되고 차별받는 자를 없애자고 하는 것이지 그걸 만들자고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부르주아와 귀족을 없애자 말하는 볼셰비키의 선전과 정반대로 말하는 듯한 일리야의 태도에 흠칫했지만, 로무스는 곧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똑같은 표현을 반대로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일리야도 엄연히 볼셰비키 당중앙의 후보위원인데, 볼셰비키와 입장이 그렇게 다를 리 없었다. 로무스는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했다.
*
“백군 측에서 러시아 장교단과 만네르하임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콜차크 제독이 ‘핀란드는 러시아의 일부니, 적위대건 백군이건 밀어버리고 생각하겠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백군 사이에 돈다는군요.”
탐페레로 출발하는 신규 적위대 병력의 기차를 살펴보던 일리야에게 이바르스 스밀가가 다가와 말했다. 스밀가와 일리야 모두 그 소문이 체카에 의한 공작의 결과물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키릴은? 찾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헬싱키 동쪽 50km에 있는 포르보의 하이코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라는 아들까지 낳았더군요.”
일리야는 피식 웃었다. 키릴 대공은 영국 왕족과 결혼하여 사촌 간 결혼과 대공비의 정교회 개종 등 온갖 부침을 겪었지만, 차르와 알렉세이 태자, 미하일 대공이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잡혀 있는 상황에서는 키릴 대공이 로마노프 황가의 대표나 다름없었다.
“다만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핀란드는 독립국이고, 핀란드 적위대는 외국, 그것도 러시아의 황족을 굳이 건드려 백군과 영국군에 어떠한 명분을 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붉은 군대가 포르보에 갔다간 핀란드를 다시 대공국 취급하는 것이고요.”
“아, 상관없습니다. 저라고 딱히 그자를 만날 건 아닙니다. 서신 한 장만 보내지요.”
일리야는 지노비에프의 명의로 된 편지가 든 외투 안쪽을 툭툭 두들겼다. 편지 안쪽에는 프랑스로 망명한 콘스탄틴 공작을 만나 그와 전폭적으로 협력하며 친 소비에트 여론을 형성하고 황가를 빼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스밀가는 무당파이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일리야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편지의 영향력을 생각해보았다.
키릴 대공이나 콘스탄틴 공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일리야의 이름을 언급해 볼셰비키 내의 유일한 연락책을 없애버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편지와 계약서에 적힌 대로 지노비에프의 이름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노비에프가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것대로 볼셰비키 당중앙은 지노비에프가 반동 세력과 손을 잡았다고 의심할 터이고, 지노비에프가 이 사실을 긍정한다면 일리야는 지노비에프의 약점을 바로 틀어쥐게 되는 것이었다. 러시아 국내파로써 지노비에프의 명성은 높았기에 그렇게만 된다면 일리야로썬 아쉬울 게 없었다.
“스밀가 동무. 내전에서 사회민주당과 적위대가 이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보수주의적 소극성에 회의주의라는 비판을 들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당에서나 당중앙에서나 격이 일리야보다 높은 스밀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정치적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스밀가는 일리야를 그렇게 좋게 보지도 않았지만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 곰곰이 할 말을 정리하던 스밀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탐페레에서 승리한다면 백군에 대해 어느 정도 우세를 점하겠지만 백군을 상대로 총체적 승리를 거두긴 어려울 것입니다. 몇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소모전이 펼쳐질까 우려됩니다.”
“외세의 지원이 없는데도요?”
“없어서 그렇습니다. 만약 독일이나 영국이 핀란드 백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내전은 3개월 안에 끝나버릴 겁니다. 다만 독일이 전력을 서부에 쏟아붓고 있어서 이야기가 다른 것일 뿐입니다.”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구상을 생각했다. 러시아에서는 번개 같은 솔제니친의 추진력으로 볼셰비키가 제1당에 올라 다른 당을 휘어잡고 연립정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핀란드에선 사민당에게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긴 했지만, 솔제니친은 없었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서 평화조약을 맺어 내전을 아예 중단시키고, 전후 핀란드에는 사민당의 우파나, 심하면 자유주의 공화주의자를 명목상 최고지도자로 세우고 농민당, 공화파와의 연립내각을 건설하는 걸 구상 중이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통일전선에 비하면 폭이 너무 넓었지만, 사민당에게 러시아라는 강력한 뒷배가 있는 이상 연립내각도 한시적 조치일 뿐이었다.
“저는 ‘과정에서의’ 온건함을 주장하는 건데, 제가 왜 온건파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근본주의자인데 말입니다.”
일리야는 입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닌은 항상 독재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뒤에 민주주의를 하자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로 경악한 플레하노프와 마르토프를 쫓아내고, 카메네프와 리코프의 반대에 부딪히고 나서야 연립정권에 동의했었다. 일리야는 딱히 레닌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단지 그는 독재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다음 민주주의를 한다면, ‘그 반대’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니콜라이가 날 보며 웃겠어.’ 일리야는 이탈리아로 가 버린 사촌 니콜라이를 떠올렸다. ‘이탈리아 인민’이라는 신문사의 사장이자 이탈리아 사회당원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난다던 니콜라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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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무스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따로 제가 언급하지 않거나 여러분이 알아보지 못하는 인물은 대부분이 실존 인물입니다. 네, 팔바드레도 실존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모르는 이유는 다 대숙청 때 읍읍..
첫댓글 빨리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런데 테트리스 차르 폐하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ㅎㅎ
아니 어리숙한 일리야 어디갔습니까. 코와 이마가 문에게 공격받던 일리야 내놓으십시오 선생님!(..)
그런 주인공이라면 핀란드에서 실패하고 출당엔딩이라서요 ㅋㅋㅋㅋ
@렌지파일 “바르셀로나의 유대인” 엔딩 피하려면 약삭빨라져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