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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려타곤(懶驢 坤) 29-1
백초당을 중심으로 개봉의 외곽에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세워져 있는 네 가문의 건물 위로도 눈이 내리고, 그 중의 한곳에 오대세가 소속의 다음 대의 가주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창 밖으로 펄펄 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들은 말을 잃은 채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꽝!"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지금까지 말도 한 마디 못하고 있던 그들 중의 하나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우리의 아버님들은 노망이라도 나셨단 말이오?!"
차마 노망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다른 네 사람은 노망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들에게 일을 다 떠맡기고 가주의 자리는 계속 차지하고 있던 그들의 아버지들이 벌인 일은 노망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일이었다.
"다들 이제 어쩔 거요? 수면천마(睡眠天魔)가 이 일을 안다면 가만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운룡회(雲龍會)와 싸우러 가기 위해 백초당의 경비를 데리고 가야 한다? 누가 그 말을 믿겠소? 더군다나 백초당의 전력이 가장 약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경비를 강화해야 할 때에---. 수면천마는 고사하고 그의 두 아내 중의 하나도 세가의 힘으로는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르고---."
"취하와 취앵이라는 이름은 이제 강호에서 아주 유명해질 거요. 지금은 백초당에서 가만있지만 그녀들이 움직인다면 그녀들이 가장 먼저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오대세가가 될 것이고, 오대세가의 멸망 속에 그녀들의 이름이 알려질 것이오."
"우리는 오대세가요. 우리에게는 천년의 저력이 있소. 불과 몇 사람의 힘으로 우리의 이름을 강호에서 지울 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흥, 그대는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으로 개봉이라는 거대한 도성 천체를 한 겨울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소? 단지 분노로 몸에 간직하고 있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뿐인데 개봉 전체를 한 겨울로 만들었단 말이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소?!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힘으로 그 힘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오?! 게다가 그녀들보다 더한 고수라는 방소구는? 그가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는 짐작도 할 수가 없소이다!"
"자자, 진정들 하시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서로 언성을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오? 우리가 잘 의논하면 살아날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오."
두서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그들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여 있지만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들도 팔십세가 다 되어 가거나 넘는 노인들이었지만 가문의 힘을 그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정예를 모두 이끌고 군산으로 떠난 가주들로 인해 가문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그들은 창밖에 흩날리는 눈으로 실감하는 중이었다. 개봉에 머물러 있던 무림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백초당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한기(寒氣)와 살기(殺氣)에 공포에 질려 모두가 도망치는 중이었고, 그들 역시 그 한가지 일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들 가문의 가주들이 벌인 일은 명백히 배신 행위였고, 그 한가지 일로 개봉에 있는 백초당이 폐허로 변한 상태였다.
"역시 이대로 어딘 가로 숨는 수밖에 길이 없는 것 같소. 지금 남아 있는 식솔들만이라도 데리고 몸을 피하지 않는다면 가문이 멸문 당할 것이오. 방소구는 어릴 적 자신을 죽이려하던 세력 중에 오대세가와 구파의 인물들이 끼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백초당과 동맹을 맺으면서 방소구는 원한을 삭히고 우리와 공생하기를 선택했었지만 이제 동맹은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른 수가 없다는 듯 그들 중의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림만 남고 구파와 오대세가가 전부 강호에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니--, 그럼 정파에는 소림만 남고 마도에는 마교만이 남는 셈인가---?"
그들 중의 하나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은 다른 네 사람도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만 바라보며 한동안 그 밀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군산에 모인 가문의 정예들이 아버님들의 욕심으로 헛되이 죽게 될 것을 생각하면---."
거기 모여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 중의 하나가 그렇게 입을 열면서 그들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그 후로도 한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개봉을 떠나 잠적하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은 수치를 무릅쓰고 잠적해야만 했다.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면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리지 짐작도 못할 그들이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분노한 수면천마 방소구와 그의 두 첩의 손에 의해 가문의 모든 사람이 다 죽어버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문을 보존하려면 지금은 숨는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명의 식솔들만을 데리고 그들은 겨울이 되려면 아직도 멀기만 한 초가을날의 어느 아침에 눈을 맞으며 개봉을 몰래 도망쳤다.
담장만 남겨두고 모든 건물이 무너져 있는 백초당에 모습을 드러낸 소구는 눈으로 뒤덮여 있는 집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들은 폐허 위에 무표정한 얼굴로 지하로 뚫린 한 구멍 옆에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뚜벅뚜벅 그녀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소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취하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이제야 돌아온 거죠?!"
원인은 북해에서 늦게 돌아온 소구에게 있다고 생각한 취하와 취앵은 원망에 찬 눈으로 그녀들의 남편 소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취앵이가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로 지하로 뻥 뚫린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래로 내려가 봐요."
"형은, 형은 무사한 것인가?!"
취하와 취행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모습을 보면서 소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움직일 수 없는 형이 무사하다면 언제라도 몸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도 무사할 것이다. 집이 무너져서 아쉽기야 하지만 부서진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었다. 소구의 몸은 지하로 수직으로 뚫린 구멍 밑으로 뛰어내려가고, 바닥에 닿았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은 얼음 동상으로 변해 버린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누---누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듬거리면서 누나인 방수련을 향해 다가가는 소구는 다리가 떨려왔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얼어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소구였다. 한 손은 한시도 누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던 붉은 금 위에 뻗어 있는 상태로 숨을 거두고 그대로 얼어붙은 누나의 모습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한 소구였다. 볼에는 눈물이 그대로 얼어서 달라붙은 얼음 조각이 붙어 있고, 부릅뜬 두 눈은 소구가 서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는 자세 그대로 방수련은 꼼짝을 안하고 있었다.
소구는 한 걸음을 옮기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힘겹게 얼어붙은 시신으로 변해 있는 방수련의 곁으로 다가간 소구는 절망했다. 부상을 입고 이곳에서 형처럼 가사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살릴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심맥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을 가까이 다가가면서 알아볼 수 있게 된 소구였다.
소구는 절망 어린 얼굴로 누나 방수련의 모습을 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곳에서 아직 한가지 확인해야 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지하의 밀실 한 가운데 있는 거대하고 투명한 관속에 고통에 찬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형 방종구의 모습이 그가 떠나기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그의 두 눈에 들어왔다.
"형----."
소구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관 앞에 은은히 붉은 광채를 뿌리는 반지 옆에 검은 색의 칙칙한 반지를 내려놓고 뒤돌아선 소구의 몸에서는 살기(殺氣)라 불리는 것이 피어오르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것은 강해져 갔다.
"우 아 아 아!"
살기에 가득 찬 고함과 함께 백색의 광채가 백초당의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방종구가 잠들어 있는 지하를 지상에서 지키고 있던 취하와 취앵은 한순간 비틀거리며 입가로 피를 흘리고 바로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소구의 눈이 그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냐?!"
하늘 높은 곳에 떠서 그녀들을 내려다보면서 소구가 소리쳤다.
"너희들과 누나가 같이 있다면 그 누구도 이곳을 이렇게 만들 수 없어!"
소구가 일으킨 사자후로 내상을 입고 있는 상태인 취하와 취앵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너무 늦어서야! 수련 아씨는 우리보고 당신이 있는 북해로 가 보라고 했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들을 향해 살기를 뿌리고 있는 소구를 향해 취앵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애초에 싸워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가지고 있는 힘을 끌어올려 겹겹이 호신강기를 펼쳐 몸을 보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따라 개봉 전체를 뒤덮고 있던 한기는 약해져 있었지만 백초당의 담장 안은 하나의 얼음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정말로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얼어죽을 것 같은 한기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소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는 그 자체로 이미 살상의 능력을 지닌 것이었고, 그 살기는 지금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살기가 극에 이르면 나타난다는 무형지기(無形之氣) 바로 그것이었다.
소구의 무형지기를 정면으로 받아 내고 있는 취하와 취앵은 두려웠다. 이성을 잃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인 소구의 모습은 그녀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분명히 주화입마라 불리는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들의 남편은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죽이는 악마로 변해 버릴 것이고 가장 먼저 죽는 것은 그녀들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려는 감정이 소구의 마음속에 퍼져 나가는 동안 아주 약간은 남아 있는 이성이 질문을 던졌다.
"누나가 너희들보고 북해로 가라고 했다고?"
"그래요! 우리가 북해로 떠난 이틀 사이 이곳이 이렇게 변해 있었어요! 신기서생이 보낸 전서응의 연락을 받고 다시 우리가 돌아왔을 때는 여기가 이 모양이 되어 있었다구요!"
취하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간신히 서서 버티는 것이 고작인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고함을 치며 변명하는 일 정도였지만, 그 효과가 있었는지 붉게 물든 소구의 눈이 그를 수면천마라 불리게 한 졸린 눈빛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취하와 취앵은 그녀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살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리고 그녀들을 향해 허공에서 내려오는 소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기(寒氣)를 거두거라. 너희들로 인해 아무런 원한이 없는 다른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지상에 두 발을 디디면서 가장 먼저 소구가 한 말은 그녀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개봉 전체가 몸살을 앓게 하던 한기는 빠른 속도로 다시 그녀들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정상적인 가을 날씨로 변해 가면서 개봉에 쌓여 있던 눈과 얼음이 빠른 속도로 녹아 내리기 시작했지만 세 사람에게 그런 일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잠시 뒤 폐허로 변한 백초당의 담장 안에서 마주 앉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소구는 취하와 취앵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그래요. 저희들이 왔을 때 본 것은 폐허로 변한 백초당과 시신이 되어버린 수련 아씨의 모습뿐이었죠."
취하가 황급히 대답했다. 방금 전 정말로 그녀들을 죽이려고 했던 소구의 모습을 본 탓인지 그녀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소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한번도 소구가 정말로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녀들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었다. 둘이 있으면 천하무적 소구라도 상대할 수 있다고 한 생각도 만리 밖에 사라진 상태였고, 그녀들은 단지 남편이 그녀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만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소구에게서 진짜 공포라는 것을 맛본 것이다.
"그럼 백초당의 호위를 맡은 오대세가의 가주들은---? 그들이라도 있었다면 일이 이 정도로 벌어질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매형은 어디로 간 것이지? 천하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해서 누나와 결혼하고 청방과 백초당의 지휘를 맡은 그는 어디로 간 것이지?"
이제 안정을 되찾았는지 더 이상 소구는 그녀들을 향해 살기를 뿜어내지 않았고, 그녀들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녀들은 이제 소구가 그녀들을 해치는 적이 아닌, 어떤 적이 와도 그녀들을 지켜주는 남편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도의 기분을 느끼면서 취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가 정말 지혜로운 자였다면 백초당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을 리 만무해요!"
소구가 없다고 해도 한 순간에 이렇게 폐허로 변할 버릴 정도로 백초당은 약한 곳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소구가 안심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한 것이고----.
취하의 뾰족하고 분노에 찬 외침을 들으면서 소구는 다시 한번 폐허로 변한 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건물은 무너지고 누나는 죽어 있는 상태였다. 소구는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안으로 삭이면서 폐허로 변해버린 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정각 대사라는 분은 어떻게 되었어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취앵이 물었다.
"지금 이곳으로 오시는 중이다. 그보다--, 백초당에서 우리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은 것일까?"
"죽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 구멍 옆에서 몇 구의 시신의 조각을 발견했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단지 살점 몇 조각이 남아 있어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시신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는 사람도 많겠죠."
취하가 방종구가 잠들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구멍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소구는 사방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말한 취하의 말대로 형이 잠들어 있는 지하로 들어가는 구멍 근처에 격전의 흔적과 사람의 살로 추정되는 타들어 가는 살점 몇 조각 외에는 다른 곳에는 그저 무너진 건물의 잔해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럼 모두 어디로 간 것이지?"
우울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구가 질문했지만, 소구의 의문에 취하와 취앵은 대답 할 수 없었고 그것은 그녀들 또한 궁금한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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