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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의 어머니 전인항
10여년 출간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의 힘』 (한결미디어)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대기업 총수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했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이런 잘문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창업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여사의 이야기를 열어보자.
하루에 네 차례씩 기도하고 찬송한 어머니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어머니 전인항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정말 내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먹고살기도 어렵던 그 힘든 시절을 헤쳐 오면서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우리들을 대학까지 가르치셨다.
어머니의 일생은 한마디로 자식에 대한 희생과 헌신의 삶이었다.
내가 강조하는 경영철학 가운데 희생정신은
어머니에게서 영향 받은 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께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네 차례씩 기도하고 찬송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여사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탄광을 운영하는 대부호 집안의 4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전인항 여사가 살던 마을에는 숭덕학교란 곳이 있었다.
전인항 여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계기도 이 학교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소녀 전인항은 이 학교 여선생이던
미국에서 온 김한나 선생님의 찬송가 소리를 듣고 바로 매료됐다.
그러나 워낙 엄격했던 전인항 여사의 할아버지는 손녀의 교회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았던
소녀 전인항은 할아버지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
울타리 구멍을 통해 교회와 숭덕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전인항 여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은 억척스러울 정도로 해냈다. 이런 억척스러움은 훗날 남편이 납북돼 홀로 자식을 키워야만 했던 에게 큰 힘이 됐다.
정동교회에서 혼례...김우중도 정동교회서 결혼식
숭덕학교 2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전 여사가 다니던 학교도 폐쇄됐다.
하지만 전 여사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홀연 단신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전 보육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영변으로 돌아와 유치원 선생과 소학교 피아노 선생을 지냈다.
이태영 전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이 이때의 제자다.
이태영 전 소장은 생전 전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항상 웃는 얼굴, 아름다운 몸맵시,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가 마치 천사처럼 보이는 매력 만점의 처녀 선생님이었다.
형부의 소개로 (감우중의 아버지) 김용하 선생님과 결혼해 영변을 떠나시던 날에는
친구들이 모두 울었다”
애초 전인항 여사는 결혼보다 기독교에 귀의하고자 다짐했었다.
이화여전 선배인 김활란 여사처럼 여성 선각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소 존경하던 선교사가
“신앙은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고 삶을 즐기면서도 자신에 충실하다면,
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권면이 마음을 돌렸다.
형부 소개로 만난 제주 출신의 남편 김용하씨는
도쿄대학 법정대 예과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은 1930년 정동교회에서였다.
전 여사의 두 아들 덕중과 우중도 이곳에서 혼례를 치렀다.
“어려운 아랫사람 형편을 늘 염두에 두라”
전인항 여사의 신혼생활은 무척 행복했다.
어린 우중을 안고 남편과 함께 중국 신경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평온했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남편 김용하씨가 북한군에 끌려간 것이다.
전 여사는 아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수많은 시체를 한 구 한 구 뒤지며 남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하루아침에 집안을 이끌어야 할 가장이 된 전 여사는 홀로 어린자식들을 키웠다.
이때 자녀들의 나이는 관중(전 대창기업 회장)이 열여덟,
덕중(전 교육부 장관, 아주대 총장)이 열여섯,
우중(전 대우그룹 창업회장)이 경기중학교 1학년이었다.
이러한 와중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전 여사는 부산의 한 방직회사에 취업했다.
여공들의 젖먹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이때 체험을 통해 전 여사는 “어려운 아랫사람 형편을 늘 염두에 두라”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윤리 강조
전 여사는 자식들에게 기독교적 윤리와 도리를 가르치려 무던히 애썼다.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단정하게 앉아서 식사하라”였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자식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두 번째 강조한 것은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라”였다.
가난하고 어수선하던 시절 전 여사는 자식들에게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일깨워줬다.
전 여사는 자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때론 자식들을 깨우치기 위해 회초리로 자신을 벌하기도 했다. 자식을 법도 있게 키우려 한 의지에서였다. 훗날 회초리의 의미를 깨달은 자식들은 행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인항 여사는 어린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이처럼 전 여사의 삶은 ‘신앙으로 만든 큰 테두리’ 속에서의 헌신된 생활 그 자체였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교회의 장로나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 또한 이런 전 여사의 영향이 컸다.
전 여사는 자식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 평균적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여겼다.
1960년 무렵 맏아들 관중이 어렵사리 마련한 집도 막내 성중(델코 회장) 유학비를 위해 과감히 처분했다.
전 여사의 이 같은 간절한 기도와 간구 때문일까. 자식들은 모두 그녀의 바람대로 평균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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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시곗바늘은 새벽 5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김우중은 대우자동차 인수 작업을 밤새 지휘하다가 부평공장 야전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서가 다급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본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김우중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시간이 멎어버린 듯했다.
청와대 빈소에 들어서자 영정사진이 그를 맞았다.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박정희 그 얼굴.
김우중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영웅은 죽음을 직시한다. 단순한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죽음을 직시한다.
위기에 부딪혀 고귀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무대에서 훌륭하게 영웅을 연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박정희는 김우중을 자식처럼 여겨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아련히 마음속에 떠올랐다.
1961년 5.16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을 돌며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다잡는 데 힘썼다.
제주도청을 방문하여 회의실에 들어서니
벽에 대구사범 은사 제4대 (김우중의 아버지)김용하 제주지사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박정희는 크게 반가워하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김용하 선생의 가족을 찾아보도록 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우중에게 말했다.
"그래,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세계를 돌며 무역업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 김우중의 당찬 말에 박정희는 활짝 웃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꼭 성공하리라 믿네 한국이 살길은 오직 수출뿐이야.
이제까지처럼 외국 물건을 들여와 팔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어.
그런데 기업인들 거의가 지레 겁을 먹고 이 좁은 땅 안에서만 움츠리고 있으니 걱정일세.
김우중 자네가 앞장서서 세계 수출에 힘써 보는 게 좋겠네.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쓴 '한국해양사'를 꼭 읽어보게나."
박정희는 책 한 권을 김우중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이제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고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국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가 민족 백년대계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바다를 안고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금후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일 것이다.
… 이 정신을 고취하며 이 사업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며 또 영원성의 건국 과업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경제의 보고, 교통의 중심, 문화수입의 첩경, 물자교류의 대로(大路) 내지 국가발전의 원천, 국민훈련의 도장(道場)인
이 바다를 내어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다가 부칠 것이다.
… 진실로 인도(引導)하기를 옳게 할 것 같으면 일찍 바다 위에서 유능유위(有能有爲)한 많은 증거를 보인
우리 국민은 금후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 장단에 크게 춤을 추어서 다함께 구국의 대원(大願)을 이룰 것이다.'
머리글을 읽어보던 김우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바다로 나아가는 자만이 한국을 구한다!' 이때 25세 젊디젊은 김우중 가슴속에 '세계경영' 대우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는 수출로써 나라를 일으키자는 박정희의 크고 깊은 뜻에 매우 공감했다. 박정희는 이 인연을 잊지 않고, 1974년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을 김우중이 불하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우중은 그 자리에 '대우센터'를 지어 그룹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 뒤로 대우는 박정희 뜻을 받들어 수출 선봉장 역할에 온 힘을 기울였고, 정부는 대우가 세계시장을 누비는 기업으로 나아가게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출이 곧 국력이라며 힘주어 말하던 박정희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로지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온몸을 바친 박정희,
우리 국민들이 앞으로 그만한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우중의 마음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 뒤 김우중은 박정희의 뜻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의 면담으로 추진된 한 해 100만대 생산 목표의 중앙아시아 자동차공장,
강경한 호메이니 정권의 각료가 직접 안내원으로 나서서 유치를 간절하게 바라던 이란의 도로.통신 관련 산업,
대우가 차관까지 주선해주며 수주했던 파키스탄 고속도로,
하노이 시장이 적극 요청하던 베트남 호텔 건립과 생산기지 유치,
군부 실세가 국가기간산업이나 되는 듯이 자랑 삼던 수단의 대우 타이어공장,
새벽 공항에 나와서 김우중을 기다리던 경제 각료들의 리무진 행렬, 국빈 대우 경호행렬,
세계 곳곳 수천 명 대우 가족들과 김우중과의 감동적인 만남들,
코리아는 몰라도 대우 로고가 그려진 작업복을 가장 멋진 나들이옷으로 자랑스럽게 걸치고 다닌 동구권 젊은이들.
이 밖에도 세계경영 김우중의 후광이듯 빛나는 기억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는 1896년 12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도쿄 법정대학 2년 수료 뒤 경성제대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 무렵에 학생 박정희를 가르치며 조선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어머니 전인항은 1902년 9월 평안북도에서 태어났으며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이화여전 보육과 1기 졸업생이 되었다.
김우중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49년 4대 제주도지사로 일한 아버지 김용하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끌려가고 말았다.
5남매는 홀어머니 아래서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김우중은 피눈물 나는 고난의 그 시절을 오히려 자신의 일생 가운데 가장 값진 시간으로 간직한다.
그는 대구 방천시장에서 신문을 팔았다.
하루에 신문을 100부 넘게 사다가 팔았는데, 몽땅 팔리는 날은 돈을 조금 벌었지만
다 팔지 못하는 날은 그만큼 밑져야 했다.
그는 날마다 신문 100장을 사들자마자 방천시장으로 뛰었다.
남보다 빨리 가서 한 부라도 더 팔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듯 아무리 일찍 시장에 가서 이 집 저 집 신문을 넣어도,
이미 다른 녀석이 앞서서 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어서는 신문을 넣고 갔다.
이때 무엇보다 거스름돈이 문제였다. 신문을 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리 거스름돈을 세모꼴로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를 어쩔까. 고민을 거듭하던 김우중 머리에 번쩍 기발한 생각이 스쳐갔다.
바로 신용거래 방식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무조건 뛰어가면서 집집마다 신문을 먼저 돌리고 되돌아오면서 신문 값을 받았다.
그러자 어느새 방천시장이 몽땅 소년 김우중 것이 되었다.
어쩌다 돈을 떼어먹고 간 사람이 있더라도,
팔지 못해 남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작지만 남다른 생각!
이는 김우중 자신과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해내고,
뒷날 대우 32년 세계경영 성공신화의 밑거름이 된다.
김우중은 대학을 마치고 '한성실업'에 들어가 무역부 은행관계 업무를 맡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무역은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김우중의 선임자는 온종일 수시로 서류를 들고 황급히 은행에 뛰어다녔다.
그런데 김우중이 업무를 넘겨받고 보니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해서
능률이 오를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은행결재시간이 오전 오후 한 번씩 있음을 알아낸 뒤 그에 맞춰 하루에 딱 두 번만 은행에 갔다
. 결과는 허둥지둥 여러 번 뛰어다닐 때와 마찬가지였다.
또한 김우중은 은행에 갖고 다니는 서류를 하나의 서식으로 만들었다.
매번 수치나 내용이 바뀌는 칸들만 비워놓고 그 밖에 변동이 없는 부분은 미리 인쇄해 놓음으로써
서류 작성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런 만큼 여유가 생기고 능률도 올랐다.
은행에는 수많은 회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여직원들 도움에 따라 은행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달라졌다.
김우중은 어떻게 하면 은행 직원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곰곰이 머리를 짜냈다.
마침 회사 창고에 수입은 해놓았으나 팔리지 않은 여성 양장 옷감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옷감들을 풀어 은행 여직원들에게 싸게 팔자 그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서 좋고
회사서는 골치 아픈 재고품을 현금화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이렇게 김우중은 수출입 창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한성실업은 김우중 덕분에 은행 일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1963년 김우중은 동남아 중개무역 중심지 싱가포르에서 무려 37만달러어치 생산계약을 이루어낸다.
겨우 27세 젊은 나이로 이뤄낸 쾌거였다.
한성실업은 합성섬유를 써서 천을 생산했는데 그 무렵 합성섬유는 인도계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었다.
김우중은 천 조각 샘플을 들고 닥치는 대로 업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인도 상공회의소장 라자크가 경영하는 회사와 20만야드 생산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을 본 다른 상인들에게서도 앞다투어 주문이 쏟아졌다.
한성실업만으로는 1년 내내 공장을 돌려도 다 만들 수 없는 분량이어서,
하청을 주고 기한 늘려가며 마침내 주문을 모두 소화했다.
생산된 천은 베트남·태국·필리핀 등 아시아 곳곳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한국 최초 섬유제품 직수출이었다.
주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성실업의 사업은 크게 확장되었다. 김우중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통금시간을 넘겨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매우 많았다.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워 다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으며, 그즈음 전기가 없어 밤에는 촛불을 켜 놓고 일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한번 큰 성공을 거두고 나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정부에서는 수출만 하면 '시장 개척'이라 하여 3년여 동안 바터(barter·구상무역)권을 보장해 주었다. 수입할 물건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한성실업은 직접 물품을 수입하여 국내에 팔기도 하고, 그 권리를 프리미엄을 붙여 다른 회사에 팔기도 하면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이 모두 김우중이 싱가포르에서 큰 계약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실패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고민하는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만약 1%의 성공 확률이 있다면, 그 1%를 성공의 씨앗으로 삼는 자가
바로 진정한 비즈니스맨이다."
김우중이 남긴 명언이다.
성공 가능성 1%에 주목했던 저돌적 낙관론이 활발한 세계경영의 모토가 되었으리라.
김우중은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먼저 도전하는
'황무지 개척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박정희 경제개발연대 압축성장 시기에 꼭 필요한 이상적 기업인이었다.
그 시절은 유학만 갈 수 있으면
학비는 장학금을 받거나 현지에서 어떻게든 일하며 벌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일할 때
그의 큰형은 군인신분으로 유학을 갔고
둘째 형과 누이동생, 막내 남동생도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김우중은 자신의 앞날을 거듭 고심했다.
이렇게 회사원으로서 삶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형제들처럼 유학을 떠날 것인가.
그의 결단은 직접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트리코트 원단 생산업체인 대도섬유 사장 도재환, 한성실업 영업부장 조동재,
경기고등학교 단짝 이우복 등과 힘을 모았다.
그러나 자금이 모자랐다. 김우중이 한성실업에서 거둔 실적만 듣고 은행이 큰돈을 빌려줄 리도 없었다.
은행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사정했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자 김우중은 아예 새벽부터 은행 지점장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
지점장 차가 나오면 얼른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경비원들 손에 질질 끌려 나왔지만 사흘 때가 되자 마침내 지점장도 두 손 들고 말았다.
마침내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다.
그때는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이 한창 재벌급 기업을 일궈나가고 있을 때였다.
탄탄한 기업들이 즐비한 적자생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대우'가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며, 창업자 김우중 자신 또한 몰랐으리라.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달러 규모의 수출 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 격인 ㈜대우를 출범시킨다.
'창조·도전·희생'의 대우정신은
박정희 불굴의 의지 '우리도 할 수 있다!'를 이어받은 1970~1980년대 한국 경제 시대 정신, 바로 그 자체였다.
아프리카·동남아의 밀림 오지, 불면의 열대야 속에서 독충들과 싸워야 했던
해외 15만명을 포함한 25만 대우인의 신념이었다.
1967년 31세 나이로 대우실업을 창업할 때부터 김우중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시장이었다.
그 무렵 국내 기업들은 수출하면 오히려 밑진다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김우중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기회였다.
국내시장은 한계가 있었지만 세계시장은 한없이 넓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우중에게는 국경이 없었다.
1984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에서 주는, 기업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기업인상'을 받는다.
대우는 전략적으로 진출 지역을 정했다.
전략거점국가 육성 차원에서 온 세계를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세계화를 추진했다.
6개 권역 전략거점국가로는, 첫째 서유럽의 영국·프랑스·독일,
둘째 동유럽의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체코, 셋째 독립국가연합(CIS)의 러시아·우즈베키스탄·우크라이나,
넷째 아시아의 중국·인도·베트남·미얀마·북한,
다섯째 아메리카의 미국·멕시코·페루·칠레·브라질,
여섯째 아프리카의 모로코·알제리·리비아·이집트·수단·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다.
이들 6개 권역 국가들은 체제전환국 또는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고 인구가 많았으며 자원이 풍부했다.
서슬 퍼렇던 냉전시대였지만 김우중은 국내 기업들이 꺼리던 '철의 장막'을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의 이른바 '위험국가'들도 과감하게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고 외교관계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이는 기업은 '애국'이며 기업이익보다 국가이익이 먼저라는 김우중의 신념과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우중은 자동차산업에 주력했다.
대우는 1979년 새한자동차를 인수했다.
국내 대표적인 노사분규 사업체로 연간 16만대 생산에 머물러 있던 새한자동차는
대우가 인수한 지 6년 만에 200만대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적 규모의 자동차회사로 탈바꿈했다.
대우자동차는 '제미나'라는 구형 모델에서 자체 모델인 '맵시나'등을 생산하여 판매했다.
그리고 1992년에 이르러 GM과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경영혁신운동인 NAC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우자동차 경영 정상화에 몰두하던 김우중은 부평공장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지내면서
대우자동차 고유의 고효율 생산방식을 세워나가는 한편,
세계경영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매년 자체적으로 개발한 새로운 차량을 출시하고,
세계 곳곳에서 200만대 규모의 자동차 생산능력을 키울 계획을 세웠다.
그때 국내 자동차 총생산은 100만대에 지나지 않았고, 총 판매량도 20만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4~5년에 한 번도 힘든 신차 개발을 매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열악한 생산기술은 무시한 채 200만대가 무슨 말이냐며,
직원들은 김우중의 말을 새겨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6년뒤 부평공장은 복합생산체제를 이루어 '르망'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군산종합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며 '라노스·누비라·레간자'등과 대형 트럭이 쏟아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창원 공장에서는 경차 '티코'를 생산했고, 쌍용자동차까지 인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