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혜화동에 가면 ‘서점’이 있다. 아니, 어디에? 대학가 및 동네 구석구석의 보물창고 역할을 하던 서점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오래된 일. 그러니 혜화동을 드나들면서도 서점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음아트도서>라는 이름으로 서점의 문을 연 것은 2005년 10월 1일이니 올 10월이면 만 3년이 되는군요.”
예리하고 집요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한상준 대표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때를 회상한다.
서점이나 출판관련 일을 한 것은 아니었고 작은 회사의 관리직원을 했었지요.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다시 취직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던 중,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사실 살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40대 중반에 취업을 다시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직장생활을 할 만큼 했지만 앞으로 관리직원으로서의 역할을 썩 잘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어요. 예전부터 책을 보는 것이 좋았어요. 책읽기를 좋아해서 직장 다니면서도 내내 북 리뷰를 해서 정리해 둘 정도였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요. 사실 제가 이런 생각을 할 당시 인터넷서점이 활성화되고 고객의 대형서점으로의 집중화가 되어 있던 터라 시장이 매우 좁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시장조사를 하고나서도 서점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군요? 사명감 같은 것이 혹시 발동한 것이었나요? 책을 가까이 해야 할 학생들이 드나드는 대학가 서점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이요.
많이 벌겠다는 마음을 다독이고 좋아하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출발한 것이니, 시작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죠. 그냥, 평균수명은 늘어난다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래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할까요.
산다는 의미까지 생각했다면 이건 단순한 출발이 아니라 아주 심오한 결단에 의한 출발인데요.(웃음) 그런데 대학가를 제쳐 두고 하필 혜화동 대학로를 선택하게 된 것은요?
처음에는 제가 살던 동네의 뒷골목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혜화동 대학로는 공연이 상시로 이루어지는 곳이어서 유동인구가 당연히 많죠. 또 누구나 알고, 찾기 쉽고, 낯설지 않은 공간이구요. 사람을 만나자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 누구나 아는 상식선에서의 판단을 선택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곳이 분명 서점일진데, 책을 파는 일 외에는 색다른 활동들이 일어난다고 하던데요?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좋아하는 책을 가까이 두고 직업으로서 서점을 운영하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말문을 트고 재미난 일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요. 서점운영에 대해 ‘무모한 낭만주의’라며 걱정하시는 분에서부터 작은 서점이 제발 살아남는 경우를 보여 달라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저보다 더 이 공간을 고민하고 아껴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놀랍게 생각했어요. 정말 예측하지 않은 일이었죠.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구요. 오히려 문화적 충격을 제가 겪은 셈이었어요.
사실 사람들의 속내를 듣기 어려운 시대이고 익명이 편안한 시대라 생각하는데요. 시대가 그러할수록 역설적으로 이런 소통이 가능한 ‘열린 공간’에 대한 갈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나 싶네요. 그나저나 제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이음>의 책 전시 방식은 상당히 유혹적 이예요. 헌책방의 냄새도 나고요.(웃음) 대형서점을 가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동선을 장악하는 보이지 않는, 저항하기 힘든 그 무엇을 느끼곤 하는데 이곳은 내 자리를 찾아온 것처럼 편안해요.
<이음>이 서점의 고정관념을 깬 것은 조병준 시인의 출판기념회를 여기서 하면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대개 출간기념회 때 하는 팬 사인회라는 천편일률적인 행사, 다시 말해 행사를 위한 행사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 독자와 저자가 보다 긴밀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중의 하나가 신현림 시인의 독자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지요.
▶ 공연포스터가 붙어있는 서점 내부 / 음악과 차와 대화가 가능한 공간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다행이도 아주 좋았어요. 또 다른 예로 손님 중에 김재엽이라는 희곡작가가 있었어요. 연출도 하고 극단도 운영하는 분이었는데, 그 분의 작품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를 혜화동1번지 극장에서 초연을 했어요. 그때 고대 앞 <장백서원>, 신촌의 <숨어 있는 책>, 그리고 <이음>이 3,000권의 책을 후원, 이 책을 무대배경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이게 계기가 되어 <책 읽는 시민들을 위한 무료공연>이라는 것을 서점에서 하기로 결정, 2007년 매월 총 22회 정도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의 공연을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4시, 7시에 진행 하였지요. 공간을 보시면 알겠지만 적을 때는 20여 명이, 관객이 많을 때는 50~60명이 서서 관람을 하기도 하였어요.
헙! 서점에서 연극을 했단 말이지요?
네. 반응이 좋았어요. 또 성공회대 김민웅 교수가 <자유인의 풍경>을 출간하면서 김민웅 교수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는 <북 콘서트>를 하기도 했지요. 이 처럼 대개 책을 출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획을 해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요. <봄날은 간다>의 최창근 작가의 희곡낭독, 임종진 작가의 <김광석 사진전> 등도 그 경우죠. 임종전 작가의 사진전은 서점공간의 특성 탓에 가능할까 걱정도 했는데 작가가 직접 전시디스플레이를 하였고, 그 덕분에 색다른 분위기를 만끽했죠. <김광석 사진전> 기간 동안은 내내 김광석 노래만 틀었어요. 아무래도 이렇게 공연이니 전시 등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책을 ‘충동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서 책 판매량도 증가했답니다.
이제 겨우 기반을 다지는 시기인데요. 앞으로 <이음>은 어떻게 미래를 이어가실지?
좀 더 건실하게 뿌리내려서 생존의 위협이 아닌, 좀 더 다져진 기반 위에서 운영할 수 있다면 좋겠죠. 좀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니까요. 서점을 해서 경제적 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오래 버텨서 맨질 맨질 해진, 시간과 세월의 때를 같이 묻히고 가는 그런 서점, 단순히 많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무엇이든 나누고 싶은 공간, 대형 서점에서 밀려났지만 참으로 훌륭하고 좋은 책들, 1쇄로 머물지 모르는 책들을 서가에 가득 꽂아 두는 공간, 이런 공간을 만드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라고 할까요. 어차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터넷서점이나 대형서점의 행보를 따르기 보다는 작은 공간의 의미를 살리면서, 오붓하게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으로 꾸리고 싶습니다.
쉽게 서로를 소개하고 또 작고 장난스런 전복이 가능한 작은 공간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 197-1 삼영B/D 지하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분명히 있다. 이곳은 서점인데 서점이 아니다. 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원하면 한 잔의 차도 쉽게 마실 수 있다. 전시가 있고 시낭송이 있고 꽤 심각한 토론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고 ‘웃음’이 있고, ‘질문’이 있고 ‘응답’이 있다.
한번 들러봐라. 당신이 인생에서 그토록 갖고자 했던 행운이 어쩌면 이곳에서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동안 삶 속에서 잃어 버렸던 꿈의 <이음>이든, 서로 다른 소리가 한 공간에서 극적으로 만나는 <異音>이든 간에 당신은 그 공간을 들어서는 순간 주요한 등장인물이 될 테니까.
‘5월은 거의 날마다 <그 날>이다. 노동절,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입양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5월만큼 어떤 무엇을 함께 기려야 할 ‘무슨무슨 날’이 많은 달은 없다. 노동자에게는 1일이 그 날이요, 어린이에게는 5일, 어버이에게는 8일, 스승에게는 15일, 입양 가족에게는 11일, 미성년자에게는 19일(셋째 월요일), 부부에게는 21일이 다 <그 날>이 아닌가.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기념일의 이름 속 주인공들 때문에 <그 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린이날은 어른들이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어버이날은 자식들이 어버이를, 스승의 날은 제자들이 스승을, 입양의 날은 입양을 잘 모르는 이들이 입양을, 성년의 날은 성년이 되는 미성년들이 성년의 의미를, 부부의 날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날이 아닌가.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을 넘어 인권의 달이다.
5월의 문을 여는 1일 노동절도 그렇다. 비교적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청년 실업자, 구직 포기자, 그리고 날로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진정으로 살피는 날이 아닌가. 여기서 노동자를 살피는 주체는 마땅히 그들에게 임금을 주는 사용자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참, 중요한 날 하나를 빠뜨렸다. 우리 민주주의의 의의를 함께 되새겨보는 5·18민주화기념일 말이다. 정말 5월은 인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인권의 달이다.
이렇게 좋은 5월이라 해도 우리네 소시민들은 어서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솔직히 없지 않다. 씀씀이가 커질 수밖에 없어 허리띠 풀 날 없는 ‘잔인한’ 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5월은 정말 신나는 달이다.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라 해도 만만치 않은 삶의 무게로 우리는 평소 그들을 돌보기 쉽지 않은데, 이렇게 언덕이라도 있으니 쑥스럽게나마 비빌 수 있는 것이다. 5월은 날마다, 뜻있는 <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