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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산승山僧이 법회法會를 하는 경우는 우리 보살菩薩님들이 한 3분의 2쯤이나 되십니다. 거사居士님들이나 특히 젊은 분들은 별로 없으신데 오늘은 주로 젊은 불자님들이 훨씬 더 많으시니깐 제 마음도 이제 보람을 느끼고 우리 불교佛敎의 전망에 대해서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수오묘深秀奧妙해서 한 말로 하기에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小乘도 있고, 대승大乘도 있고, 또는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차원에서 하는 현교顯敎도 있고 말입니다. 또는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그러한 차원의 밀교密敎도 있고. 그러면 그런 소승과 대승과의 관계, 현교와 또는 밀교와의 관계, 그런 것을 우리가 다 밝히(바르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기초 교육이 튼튼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 같은 것도 염두에 두고서 앞으로 정진精進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불교는 심종心宗이라! 마음 심心자 종파란 마루 종宗자 말입니다. 심종이라, 우리 불교를 심종 그럽니다.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 아, 그 물질도 있고, 여러 가지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다 현상적인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있는 것인데, 불교는 어째서 그렇게 마음뿐인 종교인가, 마음의 종교라고만 하는가, 이렇게 거부반응을 느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꼭 극복하셔야 합니다. 왜 불교는 하필이면 물질도 있고, 두두물물 모든 현상이 다 있는 것인데 심종心宗이라고만 그렇게 하는가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그런 견해見解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반야사상般若思想이라! 반야의 지혜智慧가 나온다 말입니다. 사실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종 그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내 몸도 있고 귀중한 내 가족도 있고 그러는데, 왜 마음뿐인가? 그렇더라도 마음뿐입니다. 어째서 마음뿐인 것인가? 부처님의 사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질이라 하는 것은 절대물질絶對物質은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시간성時間性도, 공간성空間性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분명히 내 눈앞에 있고,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공간성이 있으니깐 물질이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또 시간도 있을 것이고 한데, 왜 그러는 것인가?
그 해답으로 해서는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물질이 없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졌다. 이 말씀은 모두가 조건부條件附라, 그런 말씀이란 말입니다. 어느 조건, 인연을 떠나서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다 기초 불교를 알으시니깐 새삼 제가 말씀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만 자기自己라는 존재를 본다 하더라도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이라, 오온의 가화합이란 말입니다. 오온은 내내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아닙니까. 오온이라. 오온이 잠시간 가짜로 화합되었단 말입니다. 색色은 이것은 내내야 물질이니깐 산소, 수소, 질소, 뭐다, 그런 각(각각의) 원소의 결합체가 되겠지요.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은 이것들은 우리 관념觀念의 활동이고 말입니다.
내 몸뚱아리를 비롯한 일체 물질과 또는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의욕意慾하고,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우리 정신활동, 이런 것이 본래로 없다 말입니다. 본래로. 본래에 있다고 한다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그때는 거짓말이 돼야 하겠지요. 분석分析한 뒤에 공空(석공析空)이 아니라 말입니다. 내 몸 구성 이대로 바로 즉공卽空이라! 바로 공空이라 말입니다.(당체즉공當體卽空) 어느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공色卽空 할 때에도 색色은, 물질이란 것이 분석하면 다 공이 되지 않는가, 물질이라는 것은 끝에 가서 에너지energy가 되는 것이니깐 공이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으로 해석학적解釋學的으로 생각합니다만 반야심경의 즉공卽空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즉공卽空이라, 색色 이대로 공空이다. 물질 이대로 공이다 말입니다. 내 몸뚱아리 이대로 공이라 말입니다. 다이아몬드 그대로 공이라 말입니다. 그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공입니다.)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내내야 아시는 바와 같이 탄소의 결정체 아닙니까. 우리가 아끼는 금金이라 하더라도 귀에다 붙이고 어디에다가 붙이는 금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것도 내내야 이제 금 원소元素(원자 번호 79번)의 하나의 결합체란 말입니다. 더 추궁해서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에 각 원소라는 것은 결국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전자가 몇 개 있는가?) 양성자陽性子 중성자中性子가 몇 개가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각 원소의 구분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 그런 것들(소립자素粒子들)을 떠나서는 또 각 물질은 없다 말입니다.
저는 법문을 할 때마다 서투른 물리학 풀이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공空이라는 것을 알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알기가. 공空만 알아 버리면 사실은 불교는 참다웁게 대승大乘으로 입문入門이 되는 것입니다. 공을 모르면 대승이 못 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가 있는가,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대승이 되고 대승이 못 되고 한다 말입니다. 반야지혜가 있어야 대승이 됩니다. 대승이 되어야 참다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 부처님 법문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방편설方便設을 떠난 진실眞實한 법문이 됩니다. 따라서 어렵더라도 과학적으로 또는 (다른) 무엇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모든 것을 거기에다 유추해서 인용하고 원용해 가지고서 공도리空道理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 생활을 무던히 했습니다. 한번은 저 백장암百丈菴 저 위에 한 천미터 이상 되는 고지高地에다가 조그마한 토굴을 지어가지고 한 철을 지냈다 말입니다. 별로 준비를 않고 들어갔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삼동三冬이 임박되어 가지고서 나무 준비도 미처 못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방은 일곱 자 사방방(1.36평)입니다. (그런) 방이니깐 이제 협소한 방이겠지요. 따라서 나무는 별로 안 들지만, 그래도 일곱 자 사방방도 역시 겨울에 따습게 하려면 장작이 그래도 (하루에) 여남(10개 이상)은 개비는 들어가야 따스워지는데 나무 준비를 안 하니깐, 그것이 아까워서 (하루에) 장작 세 개비만 땠다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마음을 못 통하면 아주 (방에서) 죽도록까지 안 나올려고 그래서 지붕도 짚으로 안 이고서 굴피라, 참나무 껍데기로 이었다 말입니다. 참나무 껍데기는 천년만년 간다는 것입니다.
참나무 껍데기도 이제 적어서 그래서 촘촘히 잇지를 못했다 말입니다. 그때 마침 비가 억수로 왔어요. 비가. 그래서 구멍으로 갖다가 비가 샌다 말입니다. 우산도 없고 막을 길이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밑에서 방바닥에는 물은 벙벙하고, (할 수 없이) 나무토막을 놓고서 그 위에 앉아서 물을 퍼내가지고서 그 비를 봐왔다(버텼다) 말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생식生食을 했습니다. 생식을 했는데 갖다가 시냇물(계곡물)이 얼어붙어버려서, 그쪽(백장암 윗쪽)은 지리산 쪽이라 놔서 여기보다 훨씬 추운 지방 아닙니까. 그래서 생식을 하니깐 따스운(따뜻한) 물은 필요도 없고, (그러나 계곡물이)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얼음을 깨가지고서 이 양재기에다 얼음을 넣고 (불을 때서) 녹여서 물을 좀 마시고는 했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리고 이제 그런 생식도 콩가루나 깻가루를 섞어서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쌀만 담그어가지고 막 먹었다 말입니다. 찬 물에다 쌀만 담그어서 먹었으니 이것이 소화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도 하고 약간 고통을 겪었다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아無我라 하는, "내가 없다"는 소식이 잘 실감이 안 간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운 사람 밉고, 고운사람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군 사람들은 또 밉단 말입니다. 고놈한테 어떻게 내가 보란 듯이 무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런 관념觀念을 떨쳐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그런 각오로 들어갔지만은 그런 속에서도 '나'라는 관념을 떨치기가 쉽지가 않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비었다'는 금강경金剛經도 수백 번도 읽기도 했지만, 반야심경般若心經이사 중 되어서 12년 되었으니깐 뭐, 몇천 번은 읽었겠지요.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도리가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불자님들한테 '모두가 본래가 공이다. 본래가 마음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도 아! 저 양반들이 지금 알아먹을 것인가? 그러나 여러분들 세대는 지극히 총명한 세대 아닙니까. 다행히도 그 물리학적으로 물질 자체가 종당終當에 가서는 에너지가 되어버린다. 이런 소식을 지금 증명證明한다 말입니다. 이러한 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총명한 시대에는 즉공卽空이라! 만사萬事가 모두 다 공空이라는 것을 알 듯 말 듯 하실 때란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봅시다. 일대시교. 아함경阿含經 12년이라, 부처님 49년 설법에서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했다 말입니다. 아함경은 부처님의 근본교리입니다만, 아함경 대요 이것은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유루지有漏智의 차원, 우리 중생의 상식차원에서 설해 있는 그런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가지의 가르침은 이른바 유교有敎라, 있을 유有자 유교란 말입니다. 있고 없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서 설했다 말입니다. 중생의 일상적인 상식 차원에서 하신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안 보인다 말입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모두가 다 비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도 중생이 못 알아먹는다 말입니다. 2천 5백 년 전, 그때 물리학이 있습니까,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순숙純熟이라! 훈련을 시킨다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보시면 짐작이 되십니다만 가사 우리가 업장業障이 많아 그 욕심이 많고 자기밖에는 몰라도, 백일百日이나 또는 몇 백일이나 말입니다. 자꾸 기도祈禱를 모셔보면 차근차근 자기라는 아我가 떨어진다 말입니다. 차근차근 자기라는 모서리가 무디어 집니다. 그래서 공부가 순숙되면 그때는 아我라는 것이 몽땅 빠져버린다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그와 같이 열두 해 동안이나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소식을 말씀을 하셨고, 열두 해 동안 왠만치 우리 중생 마음을 훈련시킨 다음에 이만큼 되면 공도리空道理를 말씀해도 알아먹겠구나, 업장業障이 가볍게 했으니깐 알아 먹는다 말입니다. 같은 법문도 업장이 무거운 때 듣는 것과 기도나 참선을 해 가지고서 (업장이) 가벼운 때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참선도 한 철 공부 할 때, 두 철 공부할 때 (다르고), 같은 반야심경 풀이도 똑같은 사람이 하지만 다르다 말입니다.
그래서 십이 년 지난 다음에 반야경般若經을, 공空도리를 22년 동안 부처님 설법 가운데 가장 고구정녕苦口煗娡하게 22년 동안이나 반야 공도리를 말씀했다 말입니다. 모두가 공이다. 사실 이 몸뚱아리가 이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여러분들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배우셨지요. 십이인연법이라. 과거 전생前生의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 그것은 지금 뭐, 어떤 자취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명은 우리 의식意識에 있는 번뇌煩惱란 말입니다. 무명은 사물을 바르게 못 본다 말입니다. 검으면 검다고 보고, 희면 희다고 봐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못 본다 말입니다. 그렇게 못 보는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성자聖者만이 무명이 없습니다. 성자는 사물을 사물(본질) 그대로 본다 말입니다. 이른바 실상實相을 본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다 말입니다. 우리 부모님도 무명 때문에 음욕淫慾의 행을 했겠지요. 또 부동浮動하는 그런 영靈도, 부동하는 그런 식識도 역시 무명식無明識이기 때문에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거기에 끌려간다 말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어머니의 태胎속에 탁태託胎해서 커 나온다 말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뚱아리 이건만은 과거 전생에 이런(똑같은) 몸뚱아리가 없지 않습니까. 과거 전생에는 없었다 말입니다. 한동안 살다가 교통사고 만나서 죽든 또는 80세에 죽든 말입니다. 어떻게 죽든 결국은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는 이런 몸뚱아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금생今生에 몇 십 년 동안 모양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모양 그것은 실존實存인 것인가. 잠시간 금생에 존재하는 모양도 역시 실존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존이.
우리는 지금 시간 관념觀念이, 우리 중생 인간 차원으로 보는 것이니깐 저 사람은 저렇게 잘 생겼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같은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일초의 몇 억분의 일도 역시 그 찰나刹那 순간 동안도 같은 모습이 아니란 말입니다. 10년간이나 20년간이나 그렇게 전에 만났다가 다시 만나보면 그때는 젊은 사람이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보통은 매일 만나서는 잘 모른다 말입니다. 분명히 변화하는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일 초 전과 일 초 후의 우리 몸뚱아리가 같지가 않지 않습니까.
신진대사新陳代謝로 본다고 생각할 때 일초 전과 일초 후의 자기 몸이 같지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자기라고 지금 고집하는 것입니다. 일 초 전의 자기와 일 초 후의 자기, 또 일 초의 몇 억분지 일의 전前의 자기와 후後의 자기가 같지 않은 것인데, 우리가 같은 모습으로 자기가 존재한다고 본다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과학적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무아.
우리는 아무리 무아無我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산소가 있고 수소가 있고 하지 않은가? 또는 산소나 수소를 구성한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가 있지 않는가? 그런 것도 가장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로 (쪼개지지만) 그것도 역시 (종당終當에 가서는) 염파念波라, 염파란 말입니다. 마음의 파동波動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간宇宙間에 있는 어떠한 물건도 말입니다. 태양계나 은하계나 어떠한 물건도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의 파동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마음의 파동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貪嗔痴에서 (무명심無明心에서) 일어납니다. 무명無明으로 해서, 무명이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했지만 우리가 사태事態를 잘 못 본다 말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 그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일심진여一心眞如란 말입니다. 오직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인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는 것이니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기에서 이제 아我가 생기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我가 생기면 나한테 좋으면 탐심貪心, 나한테 싫으면 진심嗔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그 파동이 전자電子 되고 양성자陽性子가 되고 중성자中性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기電氣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본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본래는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전자電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금金으로 안경테를 만드나 금으로 시계 줄을 만드나 금의 순수도純粹度는 그때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일심진여一心眞如의 그 마음자리가 이렇게 변동하고 저렇게 변동해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나 별 같은 모양이 되나 또는 금 같은 모양이 되나 '일심진여'라는 그 마음의 순수도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때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어제나 오늘이나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이렇게 알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반야般若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들 비어 있다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한 권만 가지고도, 반야심경 한 편만 가지고도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있지 않습니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우리가 생각하는 꿈같은 견해, 우리는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 운동 하시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나 정견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견이 허두 아니겠습니까. 정견正見이 바로 서야 정사유正思惟 바른 사고,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생활 바른 행동,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이 바로 못 서면 그때는 다 빗나가고 맙니다. 윗단추 한번 잘못 잠그면 다 밑에도 결국 잘못 잠기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습니다.
정견正見은 무엇이 정견인 것인가? 정견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있어야 정견입니다. 반야가 없으면 정견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 사제법문四諦法門은 정견正見이 아닌가. 정견이나 사제법문四諦法門(사성제四聖諦)도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 말입니다. 고집멸의 멸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멸滅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불성 즉 진여불성眞如佛性 그것만이 사실인 것이고,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본다는 것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왜 안 보이는 것인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입니다.
지금 더운데, 냉방시설도 안 되어서 제가 장황하게 말씀 드리면 모처럼 기회이나 여러분들이 좀 난감하시겠지요. 그래서 이제 제 말씀을 될수록 간추려서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튼 우리는 정견正見을 가지고서 정견正見대로 행동하고 또는 (정견正見에) 입각해서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교행증敎行證이라! 교敎만 있고서 행行이 없으면, 증證은 고사하고 수행修行도 못 따르면, 그때는 말법末法인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 또는 상법像法이라, 말법末法이라, 그런 법을 다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전통적인 해석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꼭 정견正見,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과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바른 수행修行과 또 거기에서 바른 증명證明과,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야 정법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다 말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고, 또 부처님과 과거 전생前生에 인연因緣이 깊은 훌륭한 도인道人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말입니다. 그래서 정법천년正法千年이라, 부처님 가신 뒤에는 그렇게 못 된단 말입니다. 지금도 부처님같이 신통자재神通自在를 갖추어 가지고서 타심통他心通을 다 해서 우리 마음에 딱 맞는 법문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오십니다만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신 뒤에는 또 상법천년像法千年이라, 상법천년이라. 증명證明을 못 하고서 마음으로 도인이 되어서 물론 더러는 있다 하더라도, 많이 깨닫지는 못하고서 그냥 가르침만 있고 행行만 있단 말입니다. 행만. 오늘날 불교는 어떠한가? 오늘날 불교는 교敎와 수행修行과 증證,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행行도, 증證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행行도 증證도 별로 없고서 교敎만 있습니다. 교敎도 바로 모르고서 반야사상般若思想도 미처 모르고서 불법佛法을 안다고 한다 말입니다.
무아無我를 증명證明을 못한다 하더라도 무아無我의 도리道理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현대는 분명히 이것은 말법末法입니다. 말법이란 말입니다. 말법으로 해서는 생사生死를 못 건넙니다. 불교佛敎의 마지막 구제救濟는 내내야 생사해탈生死解脫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고 다 좋습니다. 다 좋으나, 불법이 불법인 점은, 불법佛法이 불법인 그런 소이所以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가 우주의 본 모습을 본단 말입니다.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을 안단 말입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서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못 살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바탕을 알아서 모든 중생과 더불어서 그렇게 되겠끔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할 불교운동은 정법시대를 우리가 가져와야 합니다. 또는 정법시대가 안되면 우리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행복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되고 바른 스승도 못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됩니다. 자기(나)라는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의미도 모른단 말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인가, 내 몸뚱아리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명명백백明明白白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우선 알아야 합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 모양色도 공이요, 소리聲도 공이요, 향기香도 공이요, 맛味도 공이요, 촉감觸도 공이요, 다 공이다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은 우리 업장業障 때문에 그럽니다. 무명無明 때문에 그럽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그 사람도 정말로 기도祈禱를 모시고, 정말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명상暝想도 하고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하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참 텅텅 비어 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아리가 비어 온다 말입니다. 내 몸뚱아리 지금 오십 몇 키로, 육십 몇 키로 된다고 하지만 무게가 본래 있지가 않습니다. 무게가! 저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간다고 생각할 때는 거의 무게가 제로Zero입니다. 위로 올라 갈수록 가볍단 말입니다. 이 대륙권大陸圈 내에서만 몇 십 키로 하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무게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즉, 섭리攝理 아닙니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간단히 말씀 드리면, 있을 유有자 유교有敎라, 상식常識차원에서 하는 부처님 가르침, 또 만법萬法이 모두 비었다 하는 빌 공空자 공교空敎라, 다 비었다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비었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이유離有이지요. 허무虛無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허망한 것이지, 본래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진여불성뿐이라고 이와 같이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가르침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이것과 저것과의 중간中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중도中道만 존재합니다.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야 한다 말입니다. 상식을 못 넘으면 속물俗物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상식을 못 넘으면 그것은 속화운동俗化運動입니다. 불교를 속화俗化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大衆化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를 시키면 안 됩니다. 꼭 반야사상般若思想을 기조基調로 하셔 가지고서, 반야사상은 모든 철학哲學의 기조가 되어 있습니다. 무철학無哲學이라 말입니다. 즉, 어려운 말로하면 무無의 자각적自覺的 한정限定이라. 모두가 원래 없던 것인데 인연因緣 따라서 이렇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상相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相, 밉다는 상相, 곱다는 상相, 그런 상相만 있을 뿐입니다.
상相, 그것은 본래本來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즉공卽空이란 말입니다. 분석 한 뒤에 공析空이 아니라 이대로 공인 것을 성자聖者는 공空으로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이 보는 것을 우리 중생衆生은 명명백백이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이것이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이라. 전도몽상을 타파하는 것이 우리 반야般若 안 되겠습니까. 전도몽상을 타파하셔서 꼭 행行과 증證을 갖추어서, 수행과 증을 갖추어서, 그래서 정법正法이 되셔야 합니다.
정법이 되어야 남북통일南北統一도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깐 앞으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앞으로는 승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도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공산주의의 대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모두가 다 중생들이 이렇게 얽고(얽어매고) 저렇게 얽어서 만든 것은 이것은 다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다운 기본적인 해결(해결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밑에서 공산주의도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도 취할 것은 취하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출가出家한 스님네는 그래도 제법 할 수가 있지만 재가불자在家佛子는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절대로 어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우리가 지금 별로 못 배우고 업장이 많아서 인생人生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과거 전생에 오계五戒정도는 지켜서 사람으로 태어났다 말입니다. 과거 전생에 무던히 그래도 오계五戒를 지켜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더불어서 '나'와 조금도 조금도 본 성품은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그 독사毒蛇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 성품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호리불차豪釐不差라,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상相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차이가 없다 말입니다. 남을 죽인 강도도 역시 겉만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강도짓을 한 것이지 그 사람도 역시 우리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바이블Bible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을 했다고 생각할 적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 말씀이 "일흔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하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21~18:22) 반야般若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를 못합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미운 사람은 절대로 밉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바로 보면은, 우리한테 번뇌煩惱가 없다고 생각할 때,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누구나 빛나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흐리멍덩한 눈깔로 해서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 좋게 보인다 말입니다. 따라서 죄罪는 어디가 있는가? 죄는 밉게 보는 '나'한테가 있다 말입니다.
왜 남을 용서를 못하는가 말입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우리가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말은. 동체대비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체同體라, 동체라는 말은 본질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 성품은 부처란 뜻이란 말입니다. 본 성품에서는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냥 약빠른 인정이 아니라 대비大悲라. 대비라는 것은 큰 대大자, 슬플 비悲자 말입니다. 본체本體에 입각해서, 본체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입각해서 상相이 없는 자리가 대비란 말입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의 모두가 두두물물頭頭物物 자타시비自他是非없이 모두가 다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말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 듣기 싫은 말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베풀어라, 말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하라,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다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약능료심若能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本體를 깨닫는다고 생각할 때는 만덕萬德이 다 갖추어 온단 말입니다.
그물코가 천 코 만 코 있다 하더라도 벼리를 쭉 잡아당기면 코가 따라 오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이 무엇인가,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저절로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思想 밑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참선參禪 하면, 화두만 의심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 안 하면 그 참선이 아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달마達磨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까?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이것은 중국에서도 저 북송北宋때에 임제臨濟 일파一派에서 한 것이고, 또 한국에 들어와서, 이조李朝(조선) 오백년 동안에 불교가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그런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그때에 한 거란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오히려 화두 의심하면 참선인 것이고, 그런 것은(다른 것은) 참선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법집法執입니다. 법집!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부처님 법法은 문마다,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하는 문이나, 또는 경經을 보는 문이나, 복숭아 꽃 보고 깨닫고 말입니다.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이 참선이 아니고 또는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하나님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바이블Bible이나, 또는 알라신의 코란이나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마음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다시 바꿔서 말씀 드리면 불교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조명照明한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수자상壽者相, 시간이 짧고 길고 내 생명生命이 짧고 길고, 또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개다, 저것은 풀이다, 저것은 자연이다, 이와 같이 구분하는 중생상衆生相, 이런 상相(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없어야 한다 말입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 공해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우리가 함부로 오염을 시킬 수가 없다 말입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요새(요즘) 한마음 운동,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가톨릭에서 이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그네들은 아직은 한마음을 모릅니다. 오랫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불교인들이 제도濟度를 해야 한마음을 알 것입니다. 한 몸, 한 마음은 불교의 대승大乘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진소위眞所謂, 참말로 한마음 운동, 한 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네들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 몸으로 압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 우주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부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 우주의 따라서 하는 것은(천지 우주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 우주는 우주 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인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원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無量法門을 다 알게 하소서! 말입니다. 그런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주의 뜻. 우주의 목적의지란 말입니다. 그것 보고 본원本願이라. 부처님의 본원입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겠지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있다 말입니다. 절대로 과학적이고 절대로 철학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굉장히 말입니다. 음식도 적게 먹으면 그렇게 좋고 말입니다. 또는 절약도 낭비 않고서 과소비 않고서 절약하면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도 가볍고 생활도 좋고 말입니다. 남도 숭상하고. 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고기 안 먹는 사람이 고기 먹어 보세요.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 많이 먹고서 헛살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생명에 아무런 플러스가(보탬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와 생명이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으니깐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우리가 많이 먹으니깐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 먹는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생生엔가는 우리 부모님 살肉일수가 있다 말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업장業障이 무겁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과거세過去世에 오계五戒를 못 지켜서 사람이 못 되었다 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그놈의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에 내 소중한 몸 세포가 그때는 오염이 된다 말입니다. 오염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많이 먹어 놓으면 문명병文明病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우리 신앙信仰이라 하는 것은 철저히 해야 합니다. 매서운 결단이 있어야지, '그냥 대중화 시키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이런 식으로 믿어서는 앞서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말법末法이라 하는 상식 차원, 속물俗物 차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가 말했듯이, '세계世界를 움직이려면 (먼저) 자기自己부터서 움직여야 한다.' 자기自己부터서 부처님의 정견正見을 바로 딱 (세워)두고 바른 수행으로 해서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증명만 해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별로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벌써 향기香氣가 풍깁니다. 우리한테 사향麝香을 가지고 있으면 사향 같은 아주 향내가 훈감薰酣되는 그런 향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에다 구태여 향香을 안 바르고 말입니다.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간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고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는 것보고,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번 외우고, 우리가 화두도 한번 참구參究하고 말입니다.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생명에 향기香氣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후광後光을 보십시오. 후광. 본래本來로 우리한테는 그런 광명光明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런 후광을 우리가 인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외길로 천지 우주의 진리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다른 선택은 우리가 궤도軌道를 떠나는 것입니다. 따라서(그러면) 우리한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고를 받는다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의 인을 안 지었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 전생에 무명無明도 없고, 탐심貪心도 없고, 진심嗔心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으로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극락極樂에서 영생永生을 구가謳歌한다 말입니다.
우리는 바꿔져야 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부처님 법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영생의 길로 우리가 걸음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무자 화두나 이뭣고 화두나, 모두가 다 성불成佛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정견正見, 정견과 더불어서, 정견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에 두고서 해야 그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다 참선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어머니를 부르나, 어떻게 부르나, 또, 이름을 안 부르고 그냥 명상暝想을 하나, 그냥 호흡법呼吸法을 하나, 호흡법도 그냥 호흡법만 해서는 그것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 정견과 더불어서 해야 참선이 됩니다.
정견을 한사코 가지고서 거기에 따르는 수행 거기에 따르는 수행은 부처님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쓰셔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나그네 길에서 우리를 가볍게 (하고), 공부하기 쉽게시리 하는 것입니다. 태국泰國 잠롱 스리무앙(Chamlong Srimuang, 1935~) 시장, 그의 가르침을 알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는 적어도 잠롱시장 정도는 해야 한다 말입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부지런히 벌어서 남한테 베푼다. 그 정도는 돼야 재가불자의 본분입니다.
한 달에 음력으로 8일, 14일, 15일, 29일, 30일 육재일六齋日날, 육재일 정도는 꼭 출가 수행자같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청정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오늘 내일 다르고 차근차근 맑아져야 합니다.
이 가운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분이 계시면 대단히 죄만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번에 수원가서 어느 신도님이 구경을 시켜 주어서 자연 민속촌民俗村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본사람이 굉장히 많이 왔다 말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관광객 가운데) 아마 3분의 2쯤 되었다 말입니다. 여기 계신 우리 노덕老德스님들도 같이 저랑 동행 했습니다만, 일본의 어느 여학교에서 왔는데 말입니다. 여학생들이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렇게 선량善良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 선생님들도 다 일매지게(일률적으로) 유니폼을 다 입었다 말입니다. 그 여인들의 치마는 무릎 아래로 쑥 내려갔습니다. 미니 입은 사람이 한 분도 안보인단 말입니다. 그 (미니스커트) 입은 것이 더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저 같은 구닥다리는 도저히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이 무슨 필요인가 말입니다. 건강에도 좋은 것인가. 다른 사람이 더 예쁘게 볼 것인가 말입니다. 우리네 어머니나 아버지들 좀 반성을 해야 합니다. 딸이나 누가 그러면 엄격하게 꾸중을 하셔야 합니다. 한 더위에도 우리 보십시오. 이렇게 다리도 묶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그렁저렁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을 부처님 법에 맞추어야 한다 말입니다. 가장 검소한 것이 부처님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우리 절寺도 낭비를 많이 합니다. 낭비를 많이 하니깐 앞으로는 더욱더 검소하게 우리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희들 출가 불자나, 우리 재가불자나 정말로 부처님 법대로 따르셔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말법末法을 떠나고 상법像法을 떠나고 정법正法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도 절대로 훌륭한 나라가 못됩니다. 세계평화도 절대로 안 옵니다. 진리眞理와 더불어서 만이 참다운 자유自由, 참다운 평등平等, 참다운 해탈解脫이 있습니다.
부처님 교법敎法에 따라서 바른 수행修行, 바른 수행에 따라서 증명證明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증명해 들어가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계행戒行 지키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욕도 하기보다 않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담배도 피우기보다 안 피우기가 더 쉽습니다. 술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우리는 매서운 결단決斷을 하십시오. 그래서 부처님 법法 아닌 것은 내가 단연코 안한다!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 말과 같이 "철학哲學은 결단의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더욱 그러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바꿔져야 합니다. 범부가 바꿔져서 성자가 되는 것이 종교란 말입니다. 이런 정법正法의 방향으로 불교를 그렇게 회변廻變시켜서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山僧의 말씀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 19920830 광주시 청년불자회 청화淸華 큰스님 초청 특별법회 법문
영상법문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5Ij0HfOtT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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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92년 광주시 청년불자회 청화淸華 큰스님 초청 특별법회 법문으로 마음의 고향 - 반야와 정견입니다.
기존 텍스트의 몇 말씀이 누락된 부분과 오타 등을 확인하고 큰스님 말씀 그대로 올려드립니다.
일부 영상법문은 이번주에 업로드 후에 다음주에 전체본을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