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재조명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렸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당시 삼국사기가 백제와의 적대관계였던 신라의 입장에서 써졌기에 그 진실은 확실하다고 보기 어렵다.
의자왕은 백제 31대 마지막 왕으로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한 왕이다. 아버지 무왕이 등극하기 전 익산의 귀족(?) 혹은 신라의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이 왕은 해동증자(증자 : 공자의 수제자로 효도의 대명사)라고 불릴 정도로 효가 극심한 왕이기도 하다. 특히나 그의 이력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뒤늦은 나이에 책봉이 되고 왕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뒤늦은 왕위에 올랐을까?
그 의문에서는 당시 백제의 권력계승에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당시 백제는 일부다처제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에 왕의 아내가 낳은 자식들은 곧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무왕 역시 다른 아내의 아들이 있었으며, 결국 그 아들들과의 권력계승싸움은 쉽지 않은 계승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견제들 사이에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왕위에 오르면서 대성8인 가문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로 세력을 구축하면서 자신만의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554년 나제동맹을 끊은 신라의 공격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참형을 당한다. 그로부터 88년 후 백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관산성을 다시 공략하면서 40여개의 성을 공격하며 무너뜨린다. 그리고 신라의 중심부를 진입할 수 있는 거점지인 대야성을 공략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을 참형하며 대야성을 차지한다.
여기서 의자왕은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며 신라를 위협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648년 김유신이 백제를 치기위해 진덕여왕을 찾았을 때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가 생각하는 백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범하려다 위태로워지면 어찌 하겠는가?" 당시 의자왕의 신라 공격을 보면 백제 국력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당시 위로는 고구려와 당이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신라와 왜가 버티고 있던 삼국정세 속에서 의자왕은 자칫 몰릴 수 있었던 지리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643년 의자왕은 고구려와 제려화친을 맺고 우호를 다지는 한편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고립시켰다. 이렇듯 백제는 고구려와의 관계만을 유지하고 당과의 관계를 소훌히 하면서 나당연합에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700년 역사의 백제가 왜 나당연합에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일까? 신라에게 몰리던 백제를 다시 세우며 신라를 공략하던 의자왕. 하지만 그의 계속된 승리로 인한 자신감이 문제였을까? 그는 점점 정치와 나라에 소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변모에 대한 분석들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655년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궁궐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라고 쓰여 있다.
의자왕은 말년에 국세를 낭비하기 시작하고 당의 해상공격을 예상하여 금강 지역에 대비책을 강구하자 했던 충신 성충의 요구를 거부하며 당시 급변하는 삼국정세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사비성을 내주며 나당연합에 무릎 끊고 마는 마지막 백제왕으로 남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잊으면 안된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삼국사기는 신라의 입장에서 다루어졌기에 백제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