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선한 뜻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선한 의도를 삶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이 발휘되어 이 땅 가운데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길,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택하지 않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의도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주목해 읽으면서 항상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요단강을 따라서 내려와서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지만 예수님은 의도를 갖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대략 35시간이 걸립니다. 주님이 이 길을 택하신 이유가 보이는 것은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12절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모든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 한센씨 병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중에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본문에서 흥미있게 보게 되는 것은 한센씨 병에 걸리니까 사마리아 사람도 차별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동병상련이란 말이 있습니다. 고난중에 있을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도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있는 이 나라가 여야가 없이 하나로 연합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저주받은 사람, 외면당하는 사람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그 길을 택하시고 그들을 만나셨습니다. 마4:14-15절 말씀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흑암에 사로잡힌 백성들에게 주님의 빛이 비춰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는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입니다. 사랑하는 예신 가족여러분! 교회와 성도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걸어야 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어허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야 합니다. 오늘 내가 걸어야할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의 길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만나야할 10명의 나병환자를 찾아가는 복된 발걸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기를 권면합니다.
간절함
사람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갖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지금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1천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일천번, 꾸준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솔로몬이 그렇게 했다는 말은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순위를 제사 드리는 일에 두고 모든 상황속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솔로몬이 일천번의 제사를 통해서 구한 것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지혜였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새롭고 놀라운 일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사라진 것이 바로 이 하나님께 구하는 간절한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왜 주님께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우리는 뜨겁지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성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매섭습니다. 계3:15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교인들이 더 뜨겁게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저절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의 심령과 교회가 부흥되는 일을 바란다면 그것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과 동일한 일입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었고, 최선의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병환자들은 소리를 크게 지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주와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희망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간절함은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게 반드는 힘이 있습니다.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주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더 크게 예수를 불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행2:21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아멘! 중요한 것은 예수를 찾는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이들은 긍휼에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에게 외면당하고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를 긍휼히 여겨주실 분,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 긍휼에 기대어 목소리 높여 주님을 부르는 간절함을 회복하여 소원을 이루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20: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이 말씀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간절한 소원입니다.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라고 해서 주님은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의 긍휼히 여겨달라는 외침에 예수님은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아마 이 말씀을 이해하시는 분들은 제사장에게 왜 몸을 보여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레14:2절입니다.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나병의 치유여부는 제사장이 관찰하여 선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말은 나병이 나았음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우 그냥 말씀만 하셨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어떤 터취도 없었습니다. 말씀만 하셨는데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은 단순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맥스 루케도의 <거친 세상에서 실패했거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폴레옹 장군의 말이 도망쳤을 때, 날쌘 병사 하나가 자기 말을 타고 장군의 말을 쫓아가 잡았습니다. 그가 말고삐를 나폴레옹에게 건네주자, 나폴레옹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네, 대위.”이 말을 들은 병사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얼른 차렷 자세를 하고서 경례를 붙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그는 즉시 막사로 가서 짐을 챙겨 장교 숙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낡은 군복을 벗어 병참 담당자에게 주고 대위의 군복을 받았습니다. 장군의 말 한 마디에 그는 병사에서 장교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따지지도 않았고, 사양하지도 않았으며,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면, 그 병사의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에게 경례를 붙이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들의 믿음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믿었을까? 제사장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 주님의 말씀 한마디가 이들을 움직였습니다. 나병이 나은 증거를 찾느라고 자기 몸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증거도 없이 갔다가 망신당하고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당하면 어떻게 하지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 확신이 있었으면 그 말씀대로 했을까요?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그들의 순종이 치유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우리에게도 치유와 회복, 상급이 있는 믿음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 나병환자들이 가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믿음의 승리자가 됩시다.
감사
10명이 똑같이 치유를 받았는데 감사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하게 엎드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병환자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순간 그 기쁨에 취해 세상으로 간 사람들과 예수님앞에 돌아와 감사한 한 사람이 구별이 됩니다. 우리는 떠나간 아홉명을 향해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데 감사하다는 그 말한마디가 뭐 어렵다고”그런데 그 아홉사람의 모습이 나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그들의 모습에 있습니다. 지난 9개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몇 번이나 감사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이 모이면 헌금이야기를 가끔 할 때가 있는데 성도들의 헌신에 대한 간증입니다. 21년에 저희 교회 감사헌금이 천만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코로나로 어렵고 힘든 시절에 감사가 풍성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매주 감사헌금을 기도제목과 드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힘겹게 공부해 치과의사가 된 남자가 있습니다. 첫 봉사활동으로 소록도에 방문했는데 마음에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이분들을 위해 살아야겠다.’
기도가 응답되어 1994년 4월 23일 소록도에 배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무가 끝나고 그는 가족과 친구들까지 만류했지만 소록도 의사로 남았습니다. 외지인들을 꺼려하는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진료가 끝나면 가운을 벗고 평상복으로 온 마을을 다니며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소록도에서 만난 간호사와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살면서 온 마을 사람들의 의사이자, 아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이 베풀고 나누는 것보다 오히려 그분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배웠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분들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후유증이 심한 분들은 눈도 잘 보이지 않아 음식도 제대로 먹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항상 숨은 쉴 수 있고 하루 세끼 밥은 먹지 않느냐며 불평을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감사와 행복이 무엇인지 저는 소록도에서 깨달았습니다.”소록도의 아름다운 치과의사 오동찬씨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한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올해의 남은 시간을 감사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부모님의 사랑/ 가족들의 관심/ 이웃들의 친절에 감사를 고백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당부합니다. 가장 많은 차별과 냉대를 당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탄식했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병도 고치고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 되었으니 감격할 따름입니다. 감사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