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月, 기상의 날)
[2004년] 한국, 12종목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서 11개 금메달 획득, '금 신기록' 달성
12개 중 11개. 한국이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서 금메달 신기록을 세웠다. 2004년 3월 22일(한국시각)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폐막한 대회 마지막 날 경기서 한국은 남녀 1000m와 3000m, 계주, 남녀 개인종합 1위를 차지하며 전체 12개 세부종목 가운데 11종목 우승을 쓸어담는 사상 최고의 ‘금 잔치’를 벌였다. 쇼트트랙 세계최강국인 한국은 은메달과 동메달도 3개씩을 보태 2002년에 세웠던 종전 최고성적(금8·은7·동1)을 뛰어넘으며 3연속 종합우승을 일궜다.
한국이 시즌을 결산하는 세계선수권서 이 같은 성과를 올린 이유는 현 남녀 세계랭킹 1·2위에 올라있는 안현수와 송석우, 최은경과 변천사가 기량을 100% 발휘했기 때문. 이승재, 김현곤, 고기현, 김민지 등 동료들도 계주 등서 제 몫을 다했다.
미국은 남자 세계랭킹 3위이자 2002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 챔피언인 아폴로 안톤 오노가 1000m 준결승서 이승재의 레이스를 방해하다 실격당하는 등 한 종목에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해 노메달에 그쳤다. /조선
[2001년]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호 남태평양에 추락(활동 종료)
러시아 우주 정거장 미르(Mir)가 2001년 3월 23일 당초 예상대로 피지섬 인근 남위 40도, 서경 160도의 남태평양에 추락하고 15년 생을 마감했다. 미르호는 이날 동체에 부착된 화물선 ‘프로그레스’의 역추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폐기 과정에 들어가 모두 세 차례의 역추진 점화를 거쳐 오후 2시 44분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으며, 약 1500개의 파편들이 남태평양에 추락했다.
러시아어로 ‘평화’를 뜻하는 우주정거장 미르는 ‘하늘 위의 집’을 갖고 싶었던 인류의 오랜 꿈을 이뤄냈다. 미르는 과거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간의 우주개발 경쟁의 산물로 태어났지만 오히려 상호협력을 통해 더 큰 과학적 진보가 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소련은 1961년 최초의 유인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주시대의 기원을 열었지만 8년 후 미국에 달을 선점당했다. 우주정거장 건설을 통해 이 패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운 소련은 1971년부터 7차례에 걸쳐 소규모 우주정거장 살류트를 발사했다. /조선
[1908년] 장인환·전명운 의사, 스티븐스 저격
← 서울 남산에 있던 일제 통감부 건물
1908년 3월 23일 장인환·전명운이 대한제국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당시 스티븐스는 워싱턴 주재 일본공사관의 촉탁으로 있다가 1904년 대한제국 외부 고문관으로 임용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그를 통해 국제사회에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시키고자 했다. 1908년 3월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국화를 환영한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의 전신인 대동보국단 회원들은 격분했으며,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 저격을 감행했다. 전명운이 스티븐스에게 권총을 발사했으나 불발되자, 그에게 달려들어 격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도착한 장인환이 총탄 3발을 발사해 스티븐스를 사살했다. 이 사건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독립운동에 전환점이 되었고, 해외의 항일투쟁을 고무시켰다./브리태니커
[1874년] 한말의 의병장 박도경(朴道京) 출생
1874. 3. 23 전북 고창~1910. 2. 8.
을사조약 체결 후 호남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본관은 밀양. 일명 경래(慶來). 자는 경화(京化)·화옥(化玉). 아버지는 준식(準植)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기삼연(奇參衍)이 장성(長城)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김익중(金翼中)·전수용(全垂庸) 등과 함께 종사(從事)로 활약하면서 1907년(융희 1) 9월에는 전라북도 모양(牟陽:지금의 고창)의 무기고를 습격했다. 영광 수록산을 근거지로 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陣)의 포사대장(砲射隊長)으로 활약하면서 천보포(千步砲)를 휴대하고 광주·담양·순창·고창·영광 등지에서 일본군에 항전했다. 1908년 1월 기삼연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다시 모으고 포사장(砲士將)으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의 의병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약해지자 장성에서 의병모집과 훈련에 주력했다. 김영엽(金永曄) 전수용 의병과 연합하여 남포·부안 등지에서 활약했고, 1909년 4월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했으나 싸움에서 패하자 의병을 해산시키고 가협산으로 피신했다. 그뒤 체포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내 의연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그해 12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1910년 2월 옥중에서 자결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83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전략방위구상(SDI) 연구ㆍ개발을 지시
← 1983년 11월 3일, 레이건 대통령(왼쪽)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방장관이 보인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3년 3월 23일 새해 들어 처음 가진 백악관 TV연설에서 우주병기를 포함한 핵미사일 공격방어시스템인 전략방위구상(SDI:Strategic Defence Initiative)의 연구ㆍ개발을 지시했다.
이 전략방위구상은 소련의 핵전력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비롯한 소련의 핵미사일을 비행 도중에 격추시키는 방법에 관한 연구계획을 의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보다 훨씬 우세한 핵전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한 종류의 군사력만으로 그 통제가 충분히 가능했으나, 소련이 모든 종류의 지상미사일을 일소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정확한 핵무기를 가지게 된 지금 새로운 종류의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을 설득할 더 좋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는 서부쿠바에 배치되어있다는 소련제 미그23기와 미그21기의 현황을 찍은 미인공위성 사진을 공개했다. 그의 사진 퍼레이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카리브해일대의 소련 전력 증강 현황을 보여주는 항공사진들까지 공개했다. 이는 당시 극심한 불경기 때문에 미처 ‘안보’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미국민들의 여론을 자극하기에 더없이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SDI계획은 발사장치를 우주 또는 지상에 배치, 미사일이나 핵탄두를 각각의 비행단계에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향후 약 10년동안 총 300억달러가 투입됐다. 이에 대해 소련과 서방국가는 물론 미국내 일부에서도 SDI가 우주군비확장을 초래하는 ‘별들의 전쟁’이라며 비판했다./조선
[2001년] 그린피스 공동 창설자 데이비드 맥타가트 사망
← 데이비드 맥타가트.
세계 최대 환경보호단체인 ‘그린피스 인터내셔널’의 공동 창설자 데이비드 맥타가트(68)가 2001년 3월 23일 이탈리아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맥타가트는 이날 오후 자신의 올리브 농장이 있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역 시골길을 혼자 운전하고 가다 반대편 차와 정면 충돌, 그 자리에서 숨졌다.
캐나다 태생인 그는 1972년 그린피스를 창설, 소형 보트를 타고 프랑스의 핵실험 장소인 태평양 무루로아 환초를 항의 방문, 국제 환경보호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후 유럽 내 여러 환경단체들을 규합, 지난 1979년 그린피스 세력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해 1991년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고래 보호·핵폐기물 해양투기·유독 폐기물 생산·핵실험·남극 대륙의 석유·광물 개발 방지 등 그린피스 환경보호 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미 경제지 포브스의 표현대로 "그린피스를 세계 최대 환경보호단체로 만들고, 환경보호 산업 붐을 일으킨 신화 창조자"였다.
맥타가트는 1932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태어나 20여년 간 건설업에 종사하다 196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청부업자와 택지개발업자로 일하던 1971년 자신이 건설한 스키휴양지에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크게 낙심,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남태평양을 떠돌았다. 이듬해 프랑스가 핵실험을 위해 태평양의 국제해역을 봉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피스 창설에 나섰다. /조선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선거에서 리덩후이 총통 당선
← 리덩후이 (오른쪽)
리덩후이 [李登輝, 1923~ ] 총통이 대만 초대 직선 총통에 당선됐다. 이총통은 1996년 3월 23일 약70%의 투표율을 보인 대만사상 첫 직접선거에서 최종개표결과 유효투표의 53.99%(5백81만여 표)를 얻어 제9대 총통에 당선됐다. 대만은 지난 연말의 총선에 이어 대선을 실시함으로써 정치 민주화를 이룩했고 리총통은 1988년 권력을 승계한 이래 12년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대만 초대 민선총통에 당선된 리덩후이는 정치 민주화와 경제 기적을 동시에 이룩한 최초의 대만인 총통이다. 그는 지난 1988년 총통취임이래 추진해온 민주화 장정을 이번 대선을 통해 순조롭게 마감, 장제스[蔣介石, 1887~1975]-장징궈[蔣經國, 1906~1988] 총통 시절의 권위주의 체제를 국민들이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민주체제로 이전시켰다. /조선
[1990년] 한국-불가리아 국교 수립
불가리아는 북한과 우방관계를 유지하여왔으나, 한국과는 1980년대 후반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여 소련의 개방·개혁 추진에 따른 불가리아의 대(對) 한국관계 개선 의지와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급속히 관계개선이 진전되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북한은 1948년, 한국은 1990년 3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88년 11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불가리아상공회의소는 상호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하였으며, 1989년 4월에는 소피아, 7월에는 서울에 양국 무역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90년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 1994년 문화협정, 1995년 항공협정·이중과세방지협정, 1996년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1991년 5월 외무장관 볼코프와 재무장관 코스토프가 방한하였다. 1992년 9월에는 소피아에서 ‘한국문화의 날’ 행사가 열려 음악·미술·무용·영화전시회가 거행되었으며, 11월에는 불가리아 체임버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naver
[1970년]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사망
←최현배
1894. 10. 19 ~ 1970. 3. 23
외솔 최현배는 주시경의 뒤를 이어 김윤경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일제하 및 해방 후 국가건설기에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 발전시키는데 온 생애를 바친 학자로, 1970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은 ‘우리말본’(1937년), ‘한글갈’(1940년) 등 20여종이 넘는 한글에 대한 저술과 4백여편에 이르는 각종 논문과 논설,수필 등은 한글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공헌을 보여준다.
아버지 최병수와 어머니 박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김두봉의 권유로 조선어강습원에 다니며 주시경으로부터 사사받았다. 1915년 졸업 후 관비유학생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문과 제1부에서 수학한 후 1920년부터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2~25년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1926년 연희전문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국어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후 그해 9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했다. 이때 국어 교재의 편찬과 교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큰사전〉을 편찬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몰두했다.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한글학회의 중추로서 한글전용·국어순화 등 실용적인 어문 활동에 힘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작고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1965년] 미국 제미니3호 발사, 지구를 3바퀴 비행
제미니 1호(Gemini 1)는 1964년 4월 8일 발사되어 무인으로 탄도비행(彈道飛行)을 하고, 같은 무인의 2호는 대기권 재진입과 회수를 시도하였다. 1965년 3월 23일 발사된 3호는 미국 최초의 2인승 유인우주비행이었다. 6호는 발사 5시간 47분 후 태평양 위에서 7호와 랑데부하였다. 7호는 지구를 13일 18시간 35분 날아 장시간의 우주비행 기록을 수립하였다. /naver
[1964년] 제네바에서 제1회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 열림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국제연합총회의 상설기관이다. 국제연합통상개발회의 또는 운크타드(UNCTAD)라고도 한다. 1964년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을 지원하고 심화된 남북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독립했으나, 급속한 인구 증가와 취약한 경제구조로 인한 이들 저개발국가의 빈약한 경제는 전후 세계경제의 큰 문제로 부상했다.
또한 당시 세계무역을 지배하고 있던 GATT(General Agreement on tar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등 선진국 위주의 경제기구에 대한 반발이 높아지면서 남북문제의 근본적 개선이 요구되었으며, 그 결과 1964년에 국제연합총회의 상설기관으로 설치되었다. /naver
[1956년] 파키스탄 회교공화국 수립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도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교섭이 시작되자,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 계획(이슬람교도가 많은 동·서 파키스탄 지역에 독립국을 세우는 계획)’의 실현을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1947년 8월 인도국민회의파·무슬림 연맹·영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인도 독립법이 제정되고 동·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분리하여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독립하였다.
파키스탄은 독립 후 얼마 동안은 인도 통치법에 따라 영국 자치령이었으나, 1956년 헌법이 제정되고 이슬람 공화국이 성립, 대통령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정당의 난립과 정치정세의 불안정기가 계속되었고,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아유브 칸은 1962년 신헌법을 제정하여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1965년의 인도·파키스탄 분쟁으로 인한 심한 타격과 ‘아유브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대두로 12년간 지속되어온 정권이 1969년 야히아 칸에게 이양되었다. /naver
[1950년] 세계기상기구[WMO] 발족
세계기상기구(世界氣象機構,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WMO)는 UN(국제연합)의 전문기구로, 1879년에 창립한 국제기상기구(International Meteorological Organization, IMO)가 그 전신이다. 1947년 IMO 이사회에서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기 위하여 세계기상협약을 채택하였고, 그 결과 1951년부터 44개 회원국으로 WMO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관측망 확립을 위한 세계 협력, 기상사업 설비를 갖춘 기상중추의 확립·유지, 기상정보의 신속한 교환조직 확립, 기상관측 표준화와 관측 및 통계의 통일성 있는 간행 확보, 항공·항해·농업 및 인류활동에 대한 기상학 응용, 기상학 연구 및 교육의 장려와 국제적인 조정 등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활동 중인 사업으로 세계기상 감시, 세계기후 프로그램, 대기조사 및 환경 프로그램, 기상학 장비 프로그램, 수문학 및 수원(水原) 프로그램, 기술협력 프로그램,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등이 있다. 2000년 현재 179개국에서 185개 회원 단체가 참가하고 있으며, 한국은 1956년 3월에 회원으로 등록하였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naver
[1940년] 히틀러-무솔리니 회담, 동맹 체결
2차대전이 일어난 지 5달 뒤인 1940년 오늘, 히틀러(Hitler, Adolf, 1889~1945)가 무솔리니와 회담을 갖는다. 두 사람인 만난 곳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지대에 있는 브레너(Brenner) 고개! 알프스를 횡단하는 고개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이어서 이미 로마시대부터 교통과 군사상 요충지로 꼽힌 곳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번 회담에서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계획 등 전략을 논의했다. 이들은 이듬해까지 이곳에서 세 번 회담을 열었다. /YTN
[1919년] 무솔리니(Mussolini, Benito Amilcare Andrea) 파시스트당 결성
← 무솔리니
1919년 3월 23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파시스트당을 결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생디칼리슴을 주장한 사람들과 사회당원 등이 밀라노에 모여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하는 조직을 결성했다. 1922년 10월의 로마 진군은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추종자들은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하며 로마를 행진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이에 굴복해 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무솔리니는 이듬해 1월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했다. 1924년 총선에서는 중산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후 1925∼29년 모든 노동조합의 해산, 반대파 정당의 해산, 정치범 특별 재판소의 설치 등 전체주의 독재가 이뤄졌으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히틀러의 나치즘(국가사회주의)에 미치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1912] 독일 태생 미국의 로켓과학자 브라운(Braun, Wernher von) 출생
← Von Braun standing at his desk at Marshall Space Flight Center in May 1964, with models of rockets developed and in progress.
1912. 3. 23 ∼ 1977. 6. 16
독일 태생의 미국 로켓기술자. 비르지츠 출생. 소년시절에 읽었던 H. 오베르트의 《행성공간으로 가는 로켓》에 자극을 받아 우주로켓 연구를 지망하였다. 1930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중에는 오베르트의 조수로 소형로켓 실험을 하였다. 1934년 베를린대학에서 액체로켓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연구는 독일 육군의 주목을 받아 1932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 때부터 독일 육군의 문관으로 채용되었고 페네뮌데에서 로켓병기 V2호를 개발하는 팀을 이끌게 되었다. V2호는 본래 우주여행용으로 구상되고 있었던 것 가운데서 가장 소형인 로켓이었는데, 현재의 우주용 로켓의 선구가 되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후 그 설계팀과 함께 미국에 가서 V2호의 실험을 계속하였고, 1952년부터는 헌츠빌의 미육군미사일개발부대를 지도하였다. 1955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으나, 소련의 스푸트니크에 대항하고 있던 뱅가드계획이 계속 실패하자 그의 팀이 급히 동원되어, 1958년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의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 후 미국국립항공우주국(NASA)의 발족과 함께 로켓개발의 중심인 마셜우주비행센터에서 아폴로계획용 새턴V형 로켓 개발을 지도, 1969년 아폴로 11호에 의한, 인류의 달착륙을 성공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어서 NASA의 장래계획 부장관(副長官)으로 유인 화성비행계획을 작성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972년 NASA를 떠났다. /yahoo
[1842년]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Stendhal) 사망
← 스탕달, Pierre-Joseph Dedreux-Dorcy가 그린 유화
1783. 1. 23 ~ 1842. 3. 23
본명 마리 앙리 벨(Marie Henri Beyle). 그르노블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반항정신과 반(反)종교사상에 눈을 떴고, 혁명정부가 설립한 그르노블중앙학원에 재학하였다. 1799년 에콜폴리테크니크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에 나왔으나 수험(受驗)하지 않고, 제2의 몰리에르가 되고자 관극(觀劇)과 극작에 몰두하였다. 1800년 친척의 주선으로 육군성(陸軍省)에 들어가 나폴레옹 원정군을 따라 알프스를 넘었다. 군대를 나온 후 관극·독서·낭독법 연습에 전념하고, 순회공연을 하는 여배우 멜라니 길베르와 마르세유의 식료품 도매상의 점원 노릇까지 하면서 동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06년 다시 군인으로 복직하여 파리로 돌아가 사교와 연애에 빠지는 등 지극히 활달한 군생활을 보냈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동시에 가장 동경하던 땅 이탈리아로 가서, 주로 밀라노에서 가극·미술감상·독서·사교에 밤낮을 보내는 딜레탕트 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이탈리아 각지를 여행하고 다니며, 《하이든, 모차르트, 메타스타시오전(傳) Vies de Haydn, de Mozart et de Metastase》(1814) 《이탈리아 회화사(繪畵史) Histoire de la peinture en Italie》(1817) 《로마·나폴리·피렌체 Rome, Naples et Florence》(1817) 《나폴레옹전 Vie de Napoleon》(사후 1876년 출판)을 저술하였다.
1819년 이후, 메칠드에의 짝사랑으로 고민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프랑스 정부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1812년에 상심한 채 귀국하였다. 이듬해 《연애론 De l’amour》(1822)을 간행하였다. 파리에서도 여전히 문단과 사교계에 관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영국·프랑스의 각 잡지에 서평과 시사평론을 집필하는 한편, 《라신과 셰익스피어 Racine et Shakespeare》(1823∼1825)로 낭만주의 운동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 밖에도 《로시니전(傳) Vie de Rossini》 등을 썼으며, 퀴리알부인과 2년 정도 교제하였다.
현대의 진실은 소설에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극작을 단념하고, 《바니나 바니니》 등의 단편을 쓰는 한편, 실재의 재판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불후의 명작 장편소설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830)을 간행하였다. 1830년에 트리에스테 주재영사(駐在領事), 이듬해 로마 근교의 교황령(敎皇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 영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임지를 떠나 로마의 사교계에 출입했으며, 《에고티즘의 회상 Souvenirs d’egotisme》(사후 1892년 출판) 미완의 장편 《뤼시앙 뢰방 Lucien Leuwen》(사후 1894년 출판) 등을 집필하였다.
1836년 휴가를 얻어 프랑스에 3년간 머물렀다. 그 동안 남프랑스·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등지를 여행하여 《한 만유자(漫遊者)의 메모 Memoires d’un touriste》(1838)를 쓰고, 이탈리아의 고사본(古寫本)을토대로 《카스트로의 수녀원장》(1839) 등의 중편(사후 《이탈리아 연대기》로 간행)을 발표하였다. 그 중 한 편을 늘려 쓴 것이 제2의 걸작 장편 《파르므의 수도원 La Chartreuse de Parme》(1839)으로 “글의 행마다 숭고함이 폭발하고 있다”는 발자크의 칭송을 받았다. 그 후 집필을 계속했으나, 관절염·신경성 뇌졸중에 시달렸고, 1841년 휴가를 얻어 귀국, 이듬해 3월 거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생전부터 그는 이탈리아어로 “밀라노인 베일레,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라는 묘비명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소설가의 2대 거장으로 평가된다. /naver
[1900년] 독일 태생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사회철학자 프롬(Erich Fromm) 출생
"사랑은 인간 실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유일한 해답이다." - 에리히 프롬
1900년 3월 23일 태어남 / 1980년 3월 18일 죽음
프롬은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학자이다. 1922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뮌헨·베를린 등지에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다. 1933년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에 이주한 그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이후 베닝턴대학교·미시건대학교·뉴욕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 초기에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으나, 프로이트가 무의식적 충동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 정신에 미치는 경제적·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중요시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1941)에서는 중세 이후 인간의 자유 및 자각의 발전이라는 문제를 연구했으며, <건전한 사회 Sane Society>(1955)에서는 산업 사회의 인간 소외 문제를 다루었다. 그밖에 물질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버리고 사랑에 근거한 의미 있는 삶을 피력한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1956)·<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등의 저서로 많은 호응을 얻었다./브리태니커
[1814년] 쿠바의 극작가, 시인 고메스 데 아베야네다(Gomez de Avellaneda, Gertrudis) 출생
← Gertrudis Gómez de Avellaneda
1814. 3. 23 ~ 1873. 2. 1
19세기의 위대한 낭만주의 작가이자 여류시인으로 손꼽힌다. 1836년 스페인에 가서, 1859~63년을 제외한 일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쿠바에 머무르는 동안 쿠바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라 페레그리나(순례자)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초기 시들은 1841년 〈서정시 Poesias liricas〉로 출간되었다. 마누엘 호세 킨타나의 고전적 문체에 그녀 특유의 낭만적 상상력이 결합된 이 시들은 많은 개인적 고통에서 비롯된 염세주의 색채가 가미되어 스페인 문학에서 가장 애절한 감동작으로 꼽힌다.
시적 어법과 서정적 대목이 뛰어난 그녀의 희곡은 주로 역사적 실존인물을 다루었다. 알퐁소 10세의 삶을 다룬 희곡 〈알퐁소 무니오 Alfonso Munio〉(1844, 1869년 〈Munio Alfonso〉로 개칭)와 성서극 〈사울 Saul〉(1849)은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내용인 〈사브 Sab〉(1841)를 위시한 소설들은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남편을 2번이나 잃고 많은 연인들이 있었던 그녀의 파란 많은 삶은 여러 전기물의 주제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1775년] 패트릭 헨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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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Henry, Patrick, 1736~1799)는 버지니아 식민지 출생으로 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1763년 '목사사건'의 소송에서 당시 영국 국왕 보호하에 특권을 지닌 목사 봉급을 담배의 최저가격으로 묶어 두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떨쳤다.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의원이 되어 식민지의 입법권을 주장하고, 영국의 인지조령(印紙條令)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가결하게 함으로써 전식민지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1774년의 제1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 각 식민지의 급진파를 대표하여 식민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할 것을 강조하였다. 1775년 3월 버지니아 의회가 해산되자 리치먼드에서 개최된 비합법 민중대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라는 연설을 하고 영국 본국과의 개전(開戰)을 주장하였다. 1776년 버지니아가 혁명을 일으키자, 초대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는 강력한 중앙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참석을 거부, 헌법 초안의 승인에는 맹렬히 반대하여 헌법 수정 10개조를 추가시켰다. /naver
[1743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The Messiah)>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
← 헨델, Thomas Hudson이 1756년에 그린 유화(부분)
헨델(Händel, Georg Friedrich, 1685~1759)의 대표작이자 동서고금을 통틀어 종교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영국의 시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성서와 기도문를 인용하여 영어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헨델이 56세 때인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며, 테너의 독창 <그대들 나의 백성을 위하라>로 시작하여 아리아와 합창곡 등 53곡이 연주된다. 연주시간은 약 2시간 20분이다. 초고가 완성된 뒤 헨델이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악보를 수정하였기 때문에 정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초연된 이래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각처의 자선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1743년 3월 23일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국왕 조지 2세는 제2부의 마지막 곡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자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오늘날의 연주회에서도 이 곡이 합창되면 청중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naver
[1458년] 조선 전기의 문신, 음률가(音律家) 박연(朴堧) 사망
1378 ~ 1458
본관 밀양(密陽),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然), 영동(永同) 출생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14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naver
[502년] 신라에서 처음으로 우경법 실시
신라 지증왕(智證王)은 즉위(卽位) 3년 만에 각 지방에 명(令)을 내려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농사를 짓는 우경법(牛耕法, 소농사)을 시행토록 했다고 한다. /Google
그밖에
2004년 박근혜 한나라 대표에 당선, 39년 만에 여성당수 탄생
2004년 한국 안전표지 6종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채택
2004년 하마스 창설자 야신 후임에 강경파 란티시 피선
2003년 전남 신안군 홍도 북서쪽 50km 해역에서 규모 4.9 지진 발생
2002년 40년 만의 최악 황사. 초등학교·유치원 휴교
2001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빈소에 북한 조문단 방문
2000년 문화재청, 안동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가 현존최고(1428년 제작)로 확인
2000년 북한, 서해5도 ‘통항질서’ 일방적으로 공포
2000년 IMF 이사회, 독일 호르스트 쾰러를 신임 총재로 선출
1999년 제2차 정부조직개편안 국무회의서 확정(중앙인사위원회, 국정홍보처 신설)
1999년 태국정부, 홍순경 참사관 일가 납치사건과 관련된 6명의 태국 주재 북한 외교관 추방령
1996년 유럽연합(EU), 광우병과 관련 영국산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
1994년 인물상 문양 청동기 시대 암각화 발견
1994년 멕시코 대통령 후보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 피살
1993년 새로운 혜성 발견 ‘슈메이커-레비 혜성’으로 명명
1992년 한국-아제르바이잔 국교 수립
1989년 화학연구소, 신약 항생제 ‘KR-10664’ 개발
1983년 미국, 미사일킬러 초무기 개발
1977년 영국 멘트모어 장원 경매
1974년 북한, 미국에 4개항 평화협정 제의
1972년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발렌시아가 사망
1963년 학사고시 및 대입자격고시 폐지
1961년 중앙관상대 신청사 준공
1955년 조선일보 지령 1만호 발행
1949년 초대 주한미국대사에 무초 임명
1946년 김일성 사회주의 정강 발표
1933년 독일 의회 바이마르헌법 폐기
1932년 신의주 비행장 설치
1910년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출생
1894년 청-일강화조약 조인
1894년 김옥균 일본 망명중 상해로 향발
1862년 러시아 외무장관 칼 바실예비치 네셀로데 사망
1749년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 출생
1674년 아일랜드 정치가 헨리 크롬웰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