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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겨쌈을 당하여도 (느4:1-6절)
이 세상에 값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지도자의 발걸음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역동적인 사람, 다시 말하면 다이나믹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헤미야에게도 거꾸러뜨리려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일은 오직 하나, 예루살렘을 성벽으로 둘러 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성벽을 쌓는 일이 성전을 짓는 일보다 신령한 일로 들리지 않을지 모르나 그 일이 바로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해 나가는 느헤미야의 방책은 하나의 틈도 없이 완벽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난날에 있었던 성벽 공사의 실패 때문에, 가라앉은 동족들의 냉담한 가슴에 새로운 꿈을 심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의욕마저 상실한 백성들을 움직이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구경꾼 하나 없도록, 모두가 하나같이 일하도록, 한 그룹으로 팀을 만든 팀워크 전략은 심리학적 논리로 보아도 일품인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성벽 공사는 절반도 못가서 반항하는 세력에 직면합니다. 산발랏은 분노하고 비웃습니다. 비난하고 도전합니다. 주위 사람들을 부추기고 세력을 형성하여 악한 소문을 내고 방해 공작을 펼칩니다.
성벽 재건 소식에 분노한 산발랏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협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비야와 함께 비웃으며 조롱의 말을 하고 유다 백성들의 능력에 대해 조소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조서를 올려 공사를 중지하도록 훼방하였습니다.
산발랏의 전술은 다분히 심리전으로 건축하는 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일손을 거두고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공사를 하는 백성들을 조롱만 하더라도 그들이 낙심하여 하던 일을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여 공사에 상당한 진척을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처럼 어리석은 존재가 없습니다. 참으로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두려워 떨거나 무서워 놀라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경향이 많은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와 암몬과 아스돗은 바사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한다는 말을 듣고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였습니다. 그 중에 사마리아인 산발랏은 크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느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그야말로 이는 대적의 분노였던 것입니다. 성벽 중수를 지휘하고 있던 느헤미야는 이 같은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분노는 마귀의 본성입니다.
*계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마귀의 사주에 붙잡힌 자들은 누구나 분노를 터뜨리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대제사장 가야바가 크게 분노를 터뜨린 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야바의 분노는 얼마나 극도에 찼던지 자기의 옷을 다 찢고 내팽개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발광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잠14:17-18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우리는 어떤 대적의 분노라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 물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분노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분노인 것입니다.
산발랏과 그의 동조자들의 방해는 자신들의 유익이 손상됨을 분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크고 부강한 성으로 복원하게 되면 사마리아 지역을 지배하는 자신들의 부와 지위에 상당한 손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개인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산발랏은 유다를 미약하다 하며 비웃으며 온갖 조롱을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느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산발랏은 유다 백성들을 비유하기를 ‘나무가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것.’ 처럼 미약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곁에 서 있던 도비야도 성벽이 아주 허술하다고 하며 한 몫 크게 거들었습니다.
*느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적대자들은 늘 성도의 허물이나 나약함을 조롱하고 즐깁니다. 이러한 조롱은 불신앙에서 오는 것으로 듣는 이에게 심한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모욕을 통해서 오는 사탄의 시련을 이기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채워 주시며 사탄의 궤계를 물리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비판이 다 악하다거나 사탄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는 비판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에는 내가 수용해야할 비판이 있고 대적해야할 비판도 있는 것입니다.
1993년도 미국의 뉴욕 타임지에 ‘겨울을 맞은 크리스찬’ 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복음 전도자로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함 목사님은 그의 한 생애를 개신교를 본 위치로 개혁하는데 바친 분입니다.
그는 교단을 만들지도 않았고 이름 그대로 복음 전도자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이 기도가 필요할 때에 청한 분이 바로 그래함 목사님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하여 특히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의 저녁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 목사님에게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를 무명의 대사 자격으로 만나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미국의 모든 T.V 전도자들이 연봉 수백만 달러를 받을 때에도 그는 연봉을 7만 달러로 만족했고 그의 전도 협회 수익금을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 75세가 되어 파킨스 병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벌써 그는 신경에 마비가 오면서 운전도, 글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약에 주의 제자들이 죽을 때까지 은퇴하거나 편안하게 살지 않았지 않습니까.’
비록 그의 목소리는 탄력이 없어도 그는 다음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밥 잔스 라는 근본주의 지도자가 그를 비판하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애를 영혼의 구원에 바치고 가겠다는 그래함 목사님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입니다.
‘그는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일에 해를 준 사람’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그래함 목사님은 아예 이 비판에 대하여 침묵하였습니다. 사실 그래함 목사님은 미국 기독교의 초상화가 아니라 이 합중국 전체의 초상화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대적들의 성벽 재건 방해 공작은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조롱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것으로 만족해 할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음모를 이웃의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 사람들에게로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대적자 사탄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의 나약함, 수치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합니다.
결국 그들은 우리의 목숨까지도 빼앗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얻기까지 그들은 결코 방해 공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사탄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사탄은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쳐들어올 것입니다.
*느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참으로 분노나 조롱이 그렇듯이 협박 역시 사탄의 본성에 속한 가증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이 의인 욥을 두고서 하나님께 협박을 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향하여 비아냥거렸습니다.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욥의 재산과 자녀를 빼앗도록 간청합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을 단순히 기복적인 신앙으로 간주하고 물질의 축복이 상실되면 욥의 신앙 또한 궤멸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큰 상처를 입힐 정도로 타격을 가하면 욥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할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산발랏 일행이 이처럼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섬멸할 것이라고 겁을 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낙심하여 성벽 건축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사실 감당해야할 사명은 어렵고 대적자는 계속하여 사나운 기세로 조롱하고 협박하며 목숨까지 위협하는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겪어야 하는 고초는 바울의 고초를 연상하게 합니다.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이라고 한 말입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표현입니다. 지도자로 부름 받은 바울도 질그릇 같이 보잘것없는 불완전한 인생이었습니다. 이 불완전한 질그릇을 깨려는 도전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맞아서 넘어지는 경우도 있고, 공격을 당하여 쓰러지는 때도 있지마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먼저 날마다 죽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발랏, 도비야의 모욕적인 도전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고 일하는 지도자의 두 가지 슬기를 봅니다.
첫째로, 발이 아닌 무릎입니다.
*느4: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도전자들에게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대적자들을 파멸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며 악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죄를 도말하시며 불의에 대해 격동하시는 하나님께 탄원했던 것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정식으로 바사 제국의 왕의 허락을 받아 공사를 시작했지만 당시 바사 제국은 위성국가들의 내정과 사소한 알력 다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사 제국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사마리아인들의 업신여김이 도리어 그들의 노략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염원하였습니다.
*잠15:28 의인의 말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느헤미야는 대적들에 대하여는 한 말도 대답하지 않고 억울하여 발을 동동 구르기보다는 무릎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말하기를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믿음, 그리고 의로운 마음의 상태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느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라.
느헤미야를 대항하는 세력은 불어만 갔습니다. 산발랏, 도비야,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마침내 아랍 사람들까지 합세합니다. 느헤미야를 저항하는 세력은 잠들 줄을 모릅니다. 오히려 응원군, 군사력은 매일 매일 증강되고 있습니다.
실로 느헤미야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건축을 계속합니다.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어려움이 오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의 기도는 구구절절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의 추격을 당할 때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추격이 심할수록 그는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피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피해 아비멜렉의 보호를 받을 때입니다. 그 땅의 장관들이 자기들의 장군 골리앗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다윗은 완벽하게 미친 자의 모습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정녕 경계해야 할 것은 밖에서 오는 비판이나 비난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위축되고 낙심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부름 받은 우리는 결단코 비판이나 비난을 면제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저항세력 없이 성곽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의 방해가 없는 역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사탄과의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는 늘 사탄의 유혹과 방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사탄을 대적하고 이기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적대자들 앞에서 먼저 행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6. 25 전쟁 때의 일입니다.
모든 정치인들이나 군 수뇌부들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보다는 거짓된 확신을 신뢰하고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과 과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요즈음 러시아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비화가 일부 공개되고 있는데 그 중에 보면 한국은 지형이 산이 많기 때문에 북한에서 탱크로 내려올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전력을 보면 북한이 크게 우세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소련의 군사 전문가가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라도 되는 날이면 미국 참전의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소련군대는 전투에서 제외시켰고 그로 말미암아 북한군은 전쟁의 경험 부족과 전술 교육의 부족으로 무질서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미리 알고 남한이 대비를 철저히 했다면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에 비해 우리나라는 올바른 정보 하나 없이, 우왕좌왕 하면서 잘못된 판단과 거짓된 승전보를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불과 며칠 만에 나라 전체를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런 풍전등화의 때에, 낙동강 전선에서 밀리면 완전히 이 나라가 공산화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죄를 회개하며 이 민족에게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단 한 번도 합의가 된 적이 없는 유엔군 파병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감행되었고 강토는 수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미국의 명배우 토마스 에드워드 머독은 링컨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대통령 숙소에서 하루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남북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링컨은 매우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머독은 아주 절제된 절규의 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기도하는 링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링컨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나라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 주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머독은 그때 기도하는 지도자가 이 나라에 있는 한 이 나라는 굳건하다는 것을 깨닫고 승리를 확신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을 품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시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둘째로,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셋째로, 의심하며 구하기 때문입니다.
*약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구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넷째로, 자기를 드려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처럼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찾아보고 우리 자신이 먼저 회개하고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도비야 등의 협박을 전혀 두려워하거나 개의치 않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백성을 무장시키는 일에 전심을 쏟았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탄의 계략은 다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만 하나님의 힘에 비하면 다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느헤미야를 믿고 따르며 역사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참여자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의 자세가 성벽 재건 사업이 크게 진척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의 고라 자손들은 마음이 상하고 눈앞이 캄캄해 올 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외쳤습니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들은 슬픔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숙였고, 심한 우울증으로 낙망하고 불안해 하였습니다. 신앙으로부터 온 믿음과 불신의 상태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역경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고라 자손들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내주하시며 고통을 신원하여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앙했던 것입니다.
가히 사면초가에 처한 고라 자손들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나 용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고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대적들의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소망에 가득 찬 하나님,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탄이 나의 재물과 형제와 자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칠 때가 있습니다. 비난하고 조롱하며 비웃고 나아가 협박하고 훼방하며 우리의 길을 방해합니다.
낙망되고 실망하며 믿음에서 떨어질 것 같은 아픈 심령이 될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는 결코 무너지거나 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주께 맡기고 믿음과 은혜를 회복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 속에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은혜가 충만해지면 사탄은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교회를 재건하는 용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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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阿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