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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제2주일)
“들음”에서 “순종”으로
삼상3:1~10; 고전6:12~20; 요1:43~51
지난주에 교회에서 이틀간의 향심기도 피정이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지막 나눔의 시간에, 아~! 우리가 누리는 정말 좋은 것들은 이렇게 공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덧붙일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괜찮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무엇을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나로, 본디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한다는 이 엄청난 은혜가 공짜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본래, 공짜를 우리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그게 은혜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깨닫고 보면, 우리는 공짜의 세상, 은혜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진보해 나가는 데는 공짜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공짜로 넓어지고 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장과 성숙은 땀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 엄중하고 정말 정확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빌립보서에서 “(나는)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4:13~14)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4: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서는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고전9:2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편지 여러 곳에서 땀을 흘려 달려가라고, 목표점을 향하여, 썩지 않을 월계관을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달려가라고, 자신도 그렇게 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했던 바울은 “나는 아직 내가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하지요.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9:27) 그가 얼마나 깨어있었는지, 자신과의 싸움에 철저했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고린도전서9장 마지막에 나오는 이 장면을 보면, 바울은 방금 전에 올림픽 경기를 관람한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메달을 얻기 위해 쏟아야 했던 헌신과 훈련을 아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자기를 절제하고 땀을 쏟으며 훈련했는지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입니까? “모든 것이 공짜다” 하는 것과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수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공짜라는, 모든 것이 은혜라는 하늘이 원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본디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뭐하고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여기서 “오늘의 나”는 “모든 것이 은혜구나”를 깨달은 나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이룬 것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구나를 경험한 나입니다. 이런 삶은 내가 붙잡고 있고 내가 소유하고 있고 내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내가 의지할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들은 우리가 이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내가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할 분이며, 그래서 내 중심을 넘어 더 큰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는 깨달음에서 옵니다.
여러분, 이런 나를 살아보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잠시라도 이 땅에서 이런 나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냥 나로 충만한 삶, 그냥 나로 행복한 삶 말입니다. 그냥 나로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나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살고 싶다 생각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요. 내가 얼마나 집요하게 내가 소유한 무언가로, 내가 붙잡은 무언가로 나를 증명해내려고 애쓰는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한 번의 결단과 의욕으로 자유로운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기분 내킨다고 반짝 하고 말 것이 아닙니다. 이 경주는 단거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평생에 걸치는 긴 싸움이고 평생에 걸치는 초 울트라 마라톤입니다. 평생에 걸치는 헌신이고 훈련입니다. 이런 장기적인 수련을 위해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 작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모두 함께 경주해 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올해 정초에 우리가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수련에 대한 본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린 사무엘의 “듣는 훈련”, “경청 훈련”입니다. 우리가 다 귀 구멍이 뚫려서 듣는다 하지만, 얼마나 잘 듣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청각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이자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언인가에 집착하고 달라붙어 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 사막의 교부들은 잘 듣기 위한 기초, <아파테이아> 즉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 초연함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기3: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였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사사시대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이스라엘에 잘 듣는 지도자도 없었고, 환상을 보는 예언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때는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의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은 이미 그런 능력을 상실한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 없었다”는 말은 엘리의 영적 상태를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엘리 제사장을 시종 들던 어린 사무엘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그것이 엘리의 음성인줄 알고 세 번이나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3번이나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뭔가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이 시기가 영적으로 매우 메말라 있던 시대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는 일도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었던 사무엘은 자신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시자만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당시 지도자인 엘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의 부름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를 못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잘 듣는 연습부터 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하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이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
마침내 3번의 실패를 거쳐 엘리의 조언을 듣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답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10절) 바로 이 말이 준비될 때까지 사무엘은 몇 번의 듣는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무엘은 자기의 소리를 넘어 하나님의 신탁을 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사사가 된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알게 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기 전체는 신명기의 핵심, 즉 “잘 듣는 것”(순종하는 것)을 국가의 존망과 관련을 짓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그분에게 순종하여(그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주님께서 당신들을 쳐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또 사무엘은 자신이 세웠던 왕 사울이 아말렉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사울에게 이런 유명한 경고를 하지요.
15:22 “주님께서는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 쉬모아 /샤먀의 부정사)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쉬모아/ 샤마의 부정사)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주목하여 듣는 것이)(카샵의 부정사/ 카샵은 “귀 귀울이다, 주목하여 듣다”)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잘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잘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잘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듣는다는 것이 우리의 총체적인 성장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들을 때 이미 우리의 필터를 통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빌립이라는 제자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나다나엘은 대뜸 이렇게 반문하지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자신의 생각과 판단, 무엇보다도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말한 겁니다. 자신이 배운 바로는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은 대단한 인물이 나올 그런 동네가 아닌 것입니다. 그때 빌립의 대답하지요. “와서 보시오” 직접 경험해 보라는 말이지요. 직접 훈련해 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말한 듣고 순종하는 것은 로봇처럼 프로그램 된 대로 끌려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은 아주 자발적인 행동이요 더욱이 우리의 내적인 자유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잘 듣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리석고 고집스런(편견에 가득찬)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의 absurd는 “귀머거리”라는 뜻의 라틴어 surdus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 순종이라는 말 obedience는 “듣는다”는 뜻의 audire에서 왔다고 하지요.) 번잡한 염려와 수많은 생각이 가득 찬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 가려면,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들을 수 있는 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의 핵심은 사실상 듣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순종의 마음으로 서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자유로운 내적 공간, 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자유로운 내적 공간, 틈을 내기 위해서는, 초연함(detachment) 즉 떨어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딱 달라붙어 있는 내 생각으로부터 떨어지고 내 기분에서 떨어지고 내 소유에서 내 딱지에서 떨어지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보기보다 쉽지 않는 우리 삶의 총체적인 훈련입니다. 우리의 배움을 넓히고 경험을 넓히고, 특히 마음을 넓히고 열어놓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생각을 가게 놔두는” 관상기도의 훈련은 이 모든 훈련의 밑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훈련”으로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듣는 훈련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대면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깊게 듣기 위해서는 마음에 맞든 안 맞든, 듣고 싶은 것이든 불쾌하거나 위협적으로 들리는 것이든, 먼저 가만히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가려서 듣기 시작한다면, 예상치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는 것이 됩니다. 듣는 훈련은 두려움과 불안, 죄책감과 수치감, 성적 공상, 탐욕과 분노, 기쁨, 성공, 동경과 희망, 묵상, 꿈과 정신적 방황 무엇보다도 우리의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 적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그분이 내 존재의 구석구석에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두운 면을 보는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으로 해야 할 훈련입니다.
듣는 훈련 중 세 번째 기억할 것은, 함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듣는 훈련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홀로 그리고 함께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고 해서, 동굴 속에 파고 들어가 홀로 앉거나 그저 편안한 온실 속에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훈련은 지체가 함께 하는 훈련이요, 공동체가 함께 하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 믿음의 공동체가 지지하는 축복의 말을 되새기십시오. 성경말씀 속에, 영적 독서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의지지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너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 나의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우리가 반드시 듣고 새겨야 할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듣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의 내밀한 소리를 듣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신음하는 피조물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